최성각의 소설집 <쫓기는 새>(실천문학사 펴냄)의 서평을 써달라는 청탁을 받았을 때도 나는 똑같은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졌다. 문학평론가도 아닌 내가 왜 이 책을 읽고 서평을 써야만 하는지, 또 내가 쓸 만한 것인지를 자문해 보았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최성각과 나는 (최소한 내 입장에서는) 좀 애매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내 기억이 맞는다면 내가 그를 처음 만난 것은 최성각이 '풀꽃 세상'을 만들어서 활동을 시작할 무렵이었던 것 같다. 나는 그 모임의 회원이 아니었지만 그곳 활동에 적극적이셨던 아버지가 모임에 가실 때 차로 모시고 가는 따위의 일로 본의 아니게 모임에 참가하는 경우가 생기곤 했었다(늘 뒤에서 딴 짓을 하고 있었지만). 아버지가 주도하는 여러 행사에 최성각이 자주 참가하게 되면서 내가 그를 만날 기회도 잦아졌다. 나는 늘 예의 바르게 그에게 목례를 하곤 했지만 그와 심각한 이야기를 나눠본 적은 없다.
찬드라의 이야기를 풀꽃세상에서 네팔 인 케이피를 통해서 처음 접한 때는 2000년 3월께였다.
"그래서 선생님, 제가 이근후 선생님한테 전화를 받고 용인정신병원에 가서 확인해보니 네팔 인이 맞았습니다. 세상에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 선생님!"
케이피의 목소리는 흥분으로 떨고 있었다.
▲ <쫓기는 새>(최성각 지음, 실천문학사 펴냄). ⓒ실천문학사 |
사실 <쫓기는 새>를 처음 만난 것도 아버지의 서재에서였다. 아버지에게 드린다는 지은이의 서명이 들어있었다. 내가 서평까지 쓰게 될 줄은 몰랐지만 기회가 되면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최성각이 그의 책이 나오면 아버지에게만 보내는 것은 아니었다. 화장실 앞 책꽂이에 있는 <나는 오늘도 책을 읽었다>(최성각 지음, 동녘 펴냄) 내지에는 최성각이 나의 어머니에게 보내면서 내 아들과 함께 보시라는 글귀가 적혀있다. 내 아들이 먼저 읽고 한참 전에 나한테 넘겨주었는데, 나는 아직 그 책을 읽지는 못하고 책꽂이만 담아두고 있다. 나는 정작 최성각으로부터 직접 책을 받아본 적이 없다. 그만큼 애매한 거리를 유지하고 있는 사이라는 뜻이다.
유머 감각이 뛰어난 <딴지일보>는 호외를 발행했고, 인터넷신문 <오마이뉴스>와 <프레시안>도 풀꽃나라의 출현을 범상치 않은 일이라고 여겨 진지하게 다루었다.
'프레시안 books' 기획위원으로 활동하면서 글을 청탁하고 검토하면서 가끔씩 최성각의 글을 만날 수 있었다. 그가 '강물은 흘러야 하고, 갯벌은 갯것들 넘쳐야'에서 <프레시안>을 콕 집어서 이야기 했으니 그와 나와의 인연으로 얽어매자면 이것도 인연이겠다. 약간은 애매한.
이 쯤 적었으면 내가 최성각의 <쫓기는 책>의 서평을 쓸 만한 지극히 개인적인 이유는 충족된 것 같다. 내게 서평을 청탁한 사람도 이 점을 깊이 간파했을 것으로 추측한다.
나는 그의 소설을 <쫓기는 새>를 통해서 처음 만났다. 문학평론가가 아닌 그와 애매한 관계에 있는 한 지식인의 눈으로 최성각의 소설들을 읽었다.
<쫓기는 새>에 실린 단편, 중편, 엽편 소설을 읽으면서 먼저 든 생각은 '이게 소설인가?'라는 질문이었다. 소설이라고 하니 그런가 보다 할 만한 작품이 많았다. '녹색문학'이라고 어떤 의미로 그런 수식어를 붙였는지 조금은 이해하겠는데, '이게 소설인가?' 하는 의문은 가시지 않았다.
그러나 돌이켜보니, 비록 재주 없으나 책 읽고 글 쓰고 살게 된 자로서 나는 내 시대에 내게 가장 절박하게 육박해온 일들에 깜냥껏 고지식하게 반응하려고 애쓴 것 같다. 이렇게 묶인 것들이 문학인지는 사실 나도 잘 모르겠다. 문학이 아니라고 해도 상관없는 일이긴 하다. 바라건대 '내게 절박하게 다가온 일들'이 다른 이에게도 절박한 일, 우리 모두의 일들로 읽히기를 바랄 뿐이다.
지은이 스스로 '작가의 말'에서 이야기하고 있듯이 그의 소설은 픽션의 경계를 넘어서 논픽션의 세계에 바탕을 두고 있다. 소설의 내용이 모두 우리 사회의 가치관이 격돌하는 현장이다. 그 현장에 최성각 자신이 있었고 그것을 그의 말대로 '글'로 써낸 것이다. 그는 이 책 속의 글들을 소설이라고 발표를 했고 평론가들은 '녹색문학'의 정수라고 이름 붙였다.
하지만 정작 그에게 중요한 것은 이것저것 모두 걷어내고 나면 '절박함'을 표현하는 것뿐이었을 것이다. 소설은 그의 삶의 표현의 한 방식 중 하나일 것이다. 그가 시골 생활을 하는 것이나 갈등의 현장에서 몸으로 울부짖는 것이나 세상에서 잠시 벗어나서 히말라야 산맥이 있는 네팔을 찾는 것이나 모두 총체적인 그의 삶의 단면일 것이다. 그것이 고함이든 사색이든 소설이든 무슨 상관이겠는가. 단지 '표현'일 뿐인 것을. 그렇다면 그의 문학에서 '이게 소설인가?'라는 질문은 그 질문의 효력을 상실하고 만다. 이제 우리는 오히려 '왜 소설인가?'라는 질문을 던져야할 것이다. 그는 '작가의 말'에서 이렇게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적어놓았다.
소설이라는 양식의 넉넉함 속에서 분방한 방식으로 전개한 이 증언으로 인해 우리 시대가 자연을 어떻게 대했고, 지금도 어떤 일들이 진행되고 있는지에 대해 조금이라도 관심을 지니고 계신 분들에게 이 책이 작은 참고가 되기를 바란다.
얼마 전 소설가 정소연과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었다. 어떤 이야기를 에세이로 풀어내고 또 어떤 이야기를 소설로 풀어낼 것인가 하는 주제였다. 긴 시간 이야기를 나누었지만 간략하게 결론을 말하자면 때로는 에세이의 솔직함과 담백함으로 풀어내기 어려운 강렬한 경험이나 인상이 있는데 이런 것들을 소설로 풀어내면 좋을 것 같다는 것이었다. 나는 서평도 쓰고 이런저런 에세이도 쓰고 있는데 최근 들어서 이런 형식으로 담아내기 어려운 이야기들이 다가오기 시작했다. 소설을 써야하나 하는 생각이 드는 주제와 에피소드들이었다. 작가면서 변호사인 정소연도 비슷한 고민을 하고 있었다.
최성각도 그런 고민 끝에 그의 삶을 소설이라는 단면에 조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이미 픽션과 논픽션의 경계를 넘어선 듯하다. 그가 담아낸 '절박함' 앞에서 픽션이니 논픽션이니 하는 구분은 의미가 없을 것이다. 다만 소설이라는 형식이 그 절박함을 담아내기에 조금 더 넉넉하고 절실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만큼 우리가 사는 세상이 팍팍하고 척박하다는 반증이기도 할 것이다. 세상이 이런 지경인 한 최성각의 이야기는 계속 소설의 형태로 우리와 만나게 될 것이다. 물론 그것을 소설이라고 부를 것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 <인간에 대하여 과학이 말해준 것들>(장대익 지음, 바다출판사 펴냄). ⓒ바다출판사 |
작가는 여러 유형이 있다. 산업사회를 회의하지 않는 인류가 필연적으로 맞닥뜨린 환경문제와 거기 맞바로 대응하는 내 글쓰기의 즉발성에 대해 나는 별로 우려하지 않는다. 아름다움에 이르는 길은 여러 갈래가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내 걱정은 언제나 나의 분노나 안타까움이 아니라 그것이 '표현'에 이르렀느냐, 아니냐이다. 깊어진 걱정이 꽃이 될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김욱동이 <쫓기는 새>의 '해설'에서 인용한 것을 다시 옮겨 놓았다. 그의 말대로 "이 짧은 인용문에서 최성각의 녹색문학, 좀 더 넓게는 생태주의 사상을 읽을 수 있다." 나는 이 글에서 자연을 가까이 하고 사랑하는 '문명인 최성각'을 봤다. 문명을 가늠하는 것은 단순히 '자연이냐 인공이냐'가 아닐 것이다. 오히려 '세상을 어떻게 보느냐' 하는 태도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최성각이 그의 삶의 현장이나 소설에서 보여준 세상에 대한 태도가 진정으로 문명적이라는 것이다. 나는 그의 생태주의 사상에는 동의하지만 실천의 문제에서는 애매한 거리를 유지하고 있는 편이다. 그의 목소리가 아무리 날카롭고 억척스럽더라도 세상을 대하는 그의 태도가 평화롭다는 것을 나는 안다. 그의 삶과 글속에서 숨길 수 없는 미소처럼 드러나는 그의 태도가 그것을 증언하고 있다.
나는 최성각의 <쫓기는 새>를 이 글에서 쓴 방식으로 한번 읽어봤다. 다시 읽으면 또 다르게 읽힐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아름다움에 이르는 길'이 여럿이라고 그가 생각하는 한, 그가 늘 '꽃'을 피우기 위해서 노력하고 있는 한, 나는 그를 지지하는 글을 다시 쓰고야말 것이다. 언제나 그의 삶의 태도를 존중하고 존경할 것이다. 다시 그를 만나면 먼저 인사를 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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