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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 여중생에게 못 볼 거 보여주셨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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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선생님, 여중생에게 못 볼 거 보여주셨어요!

[마녀의 '도서관 편지'] <분노의 포도>를 권해주신 선생님께

긴 세월이 흐른 오늘에야 선생님께 편지를 씁니다. 어쩌면 선생님의 제자이던 그 시절 한 번쯤은 안부 편지를 썼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반항적이긴 해도 예의 바른 아이였으니 선생님께 받은 책 선물에 대한 답례로 카드 한 장 썼을 것도 같은데, 기억이 없기도 하거니와 어쩐지 그랬을 것 같지가 않습니다. 선생님이 주신 책을 숙제가 아닌 선물로 여기게 된 것은 방학이 거의 끝날 무렵이었고 편지를 쓰기엔 너무 늦은 때였지요. 하긴 늦기로 말하면 지금이야말로 너무 늦은 때이겠지요. 그럼에도 이렇게 편지를 쓰는 것은 선생님이 제게 얼마나 큰 선물을, 아니 부담을 주셨는지 한번은 꼭 말씀드리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기억나세요? 중학교 1학년 겨울방학을 하던 날이었습니다. 종업식이 끝나고 선생님은 마지막까지 남아 청소를 한 아이들 대여섯을 데리고 학교 앞 서점에 가서 원하는 책을 한 권씩 고르라 하셨지요. 신나서 책을 고르려는데 선생님이 저와 한 친구만 동서문화사에서 펴내는 세계명작전집 코너로 데려가더니, 친구에겐 <죄와 벌>을 제게는 <분노의 포도>를 건넸습니다. 너흰 이걸 읽어라, 하시면서. 아마 그때 선생님도 제 얼굴에 드러난 실망과 당혹감을 읽으셨겠지요.

좋아하는 책도 아니고 <죄와 벌>처럼 유명한 고전도 아닌, 생전 들어본 적도 없는 존 스타인벡이라는 작가의 책을 받은 저는 울고 싶었습니다. 더구나 선생님은 그 책이 퓰리처상 수상작이며 존 스타인벡은 노벨상을 받은 유명한 작가라는 식의 말로 실망한 학생을 위로하기는커녕, 울상이 된 저를 빙긋이 웃으며 바라보기만 했습니다. 평소에도 엄하고 쌀쌀맞은 선생님께 거리감을 느끼던 저는 선생님이 원망스러워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옆에 있던 친구들은, 무슨 책이야, 포도가 왜 분노하니? 하면서 수군대다가 저를 안됐다는 눈으로 쳐다보았지요. 제 취향이 아닌 책을 선물 받고 곤혹스러웠던 적이 많지만 그때만큼 실망스러웠던 적은 없는 것 같습니다.

▲ <분노의 포도 1>(존 스타인벡 지음, 김승욱 옮김, 민음사 펴냄). ⓒ민음사
그래도 책까지 사주며 읽으라 한 말씀을 거역할 배짱은 없어서 책을 펼쳤는데 후유, 한숨이 나오더군요. 나름 책은 좀 읽는다고 자부하던 저였으나 조그만 활자들이 빽빽이 2단 조판된 페이지가 무려 500쪽이나 이어지고 첫 장(章)부터 신산한 시골 풍경을 꼼꼼히 묘사하는 데는 숨이 막힐 지경이었습니다. 한 가지 위안이 된 것은, 제가 이렇게 두껍고 어려운 책을 읽을 수 있다고 선생님이 생각하셨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우쭐한 마음이 들었지요. 그래서 재미가 없는데도 계속 읽었습니다. 독서력을 과시하고 싶은 허영심, 선생님의 기대에 부응해야 한다는 의무감이 더해져 책장을 넘긴 것이지요.

하지만 허영과 의무의 독서는 오래가지 않았습니다. 인물들이 등장하고 이야기가 진행되면서 땅을 잃고 일자리를 찾아 나선 가난한 조드 일가의 이야기에 감정이입이 되어 손에서 책을 놓을 수가 없었지요. 살인 전과자이지만 누구보다 정의로운 톰 조드, 고뇌하고 회의하면서도 주어진 책임을 다하는 지식인 짐 케이시, 흔들리는 가족의 버팀목으로 모두를 품어주는 어머니. 저는 그들에게 공감하고 그들을 응원하며 그들이 탐욕스런 지주와 은행, 불공정한 경찰, 이기적이고 무심한 이웃들에 맞서 승리하기를, 그래서 그들이 잠시 머물렀던 위치패드 천막촌에서처럼 평화롭고 민주적인 공동체를 이루어 행복하기를 바랐습니다.

문제는 그 바람이 너무 크다 보니 줄거리가 전개되는 장(章)에 이어 배경을 묘사한 장이 나오면 긴장이 확 풀리면서 재미가 없어지는 것이었습니다. 아시다시피 <분노의 포도>는 사건이 진행되는 장과 번갈아서 그와 관련된 상황을 전혀 다른 화법으로 묘사하는 장이 이어지는데, 그 시절의 저로선 왜 이런 뜬금없는 묘사를 해서 맥을 끊는지 이해도 안 되고 다음에 어떻게 되는지 궁금하기도 해서 몇 번이나 그 장들을 건너뛰고 싶었습니다. 선생님이 사주신 책이 아니었다면 필경 그리 읽었을 겁니다. 듬성듬성 책장을 넘기며 줄거리만 챙겼겠지요. 하지만 처음으로 선생님께 선물 받은 책을 그렇게 읽으면 안 될 것 같더군요. 그래서 고민 끝에 '하루에 한 장(章)만 읽는' 독서 원칙을 세웠습니다. 아무리 지루해도 끝까지 읽고 아무리 재미있어도 더 읽지 않기로요. 그렇게 전체 30장으로 이루어진 <분노의 포도>를 겨울방학 내내 읽었습니다.

개학을 며칠 앞두고 마침내 독서는 끝이 났습니다. 이전에는 느끼지 못한 감동과 희열에 가슴 벅차서 한동안 멍했던 기억이 납니다. 특히 쫓기는 몸이 된 톰이 어머니와 헤어지며, "사람은 커다란 영혼의 한 조각인지도 몰라요. 그렇다면 저는 사방에 있을 거예요. 어머니가 어디를 보시든. 배고픈 사람들이 먹을 걸 달라고 싸움을 벌이는 곳마다 제가 있을 거예요. 경찰이 사람을 때리는 곳마다 제가 있을 거예요. 우리 식구들이 스스로 가꾼 음식을 먹고 스스로 지은 집에서 살 때도, 저는 거기 있을 거예요." 하고 말하는 대목은 오래 잊히지 않았습니다. 저는 그 말에 눈물로 공감했고, 나 역시 모든 이와 영혼을 함께한다고 믿었습니다. 그리고 결심했습니다. 존 스타인벡처럼 소외되고 상처받은 사람들의 삶을 그리는 진실한 작가가 되겠다고.

모든 이와 영혼을 함께한다는 믿음이 얼마나 흔들리기 쉬운 것인지, 상처 입은 삶을 그리는 작가가 되겠다는 결심이 얼마나 무섭고 무거운 것인지 그때는 몰랐습니다. 권선징악을 철석같이 믿었고 분노만큼 열망도 컸던 열네 살이었으니까요.

선생님, 왜 그때, 읽은 대로 사는 걸 당연시했던 당찬 열네 살에게 존 스타인벡을 읽게 하셨나요? 그리하여 불과 십여 년 만에 그 시절의 믿음과 다짐을 버거워하며 작가의 꿈을 버리게 하셨나요?

예, 알아요. 이 모두가 허튼 투정이란 걸. 그럼에도 아쉬워서, 왜 그 시절엔 "배가 고프고 병이 드는 것조차 삶을 이어가기 위해 이루어지는 일"이며 그렇게 "삶은 계속된다"는 소설 속 어머니의 위로에 귀 기울이지 않았는지 안타까워서 투정을 부립니다.

그때 저는 스타인벡의 소설에서 정의와 분노와 당위만을 읽었고, '자신은 어디에나 있을 것'이라는 톰의 말에서 강한 확신만을 보았습니다. 스타인벡이 보여주고자 했던, 질 줄 알면서도 싸우는 것이 사람이고 삶이란 사실은 읽지 못했습니다. 톰이 그리 말할 때 확신보다도 절망을 살아내기 위한 안간힘이 더 컸을지 모른단 사실도 그때는 보지 못했습니다. 그랬기에 부족하고 흔들리는 제 자신을 견디기 어려워 꿈을 버렸고 오랫동안 스타인벡을 읽지 않았습니다. 그의 정직한 리얼리즘이 감당하기 힘들었고, 나중엔 구태의연하게 여겼지요.

그런데 그 시절 선생님과 비슷한 나이가 되어 다시 보니 전과 달리 흔들리고 회의하는 스타인벡이 읽힙니다. 좌우 양쪽의 비난을 받은 사회소설 <의심스러운 싸움>(윤희기 옮김, 열린책들 펴냄)에서도, 연극과 영화로 두루 호평을 받은 <생쥐와 인간>(정영목 옮김, 비룡소 펴냄)에서도, 그는 정의를 향한 열망이나 선한 의도가 곧바로 올바른 결과를 낳는 것은 아니라고 말합니다. 그에게 노벨상을 안겨준 만년의 장편 <불만의 겨울>(윤강원 옮김, 동천 펴냄)에서는 자본주의 사회를 비판하면서도 그에 영합해 타락하는 인간을 그렸고요. 그렇게 작가 스타인벡은 무엇이 옳고 그르며, 무엇이 선이고 악인지, 인간이 과연 정의롭고 선한 삶을 감당할 수 있는 존재인지, 끊임없이 묻고 의심했습니다.

하지만 스타인벡은 인간을 회의하되 냉소하진 않았습니다. 노벨상 수상 연설에서 말했듯이 그는 "인간이야말로 우리의 가장 큰 위험이며 우리의 유일한 희망"이라고 믿었습니다. 인간이란 제 이익을 위해 이웃을 속이고 착취하고 죽이는 존재임과 동시에, 배를 곯으면서도 빵을 나누고 불이익을 감내하면서도 정의롭게 살려 애쓰는 존재라는 것. 스타인벡은 자신을 포함한 모든 인간이 이처럼 '지킬박사와 하이드' 같은 존재이며, 바로 거기에 인간의 비극이 있고 인간의 희망이 있다는 걸 알았습니다. 때문에 그는 인간의 허약과 비열과 이기심만을 들먹이며 냉소하지도 않았고, 인간의 용기와 헌신과 이타심에만 주목해 꿈을 꾸지도 않았습니다. <분노의 포도>, <에덴의 동쪽>(1,2 권, 정회성 옮김, 민음사 펴냄), <생쥐와 인간> 같은 여러 작품에서 선한 세상을 향한 열망을 그리면서도 결코 그 실현가능성을 장담하지 않았을 만큼 그는 시종 정직한 리얼리스트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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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찰리와 함께한 여행>(존 스타인벡 지음, 이정우 옮김, 궁리 펴냄). ⓒ궁리
어쩌다보니 두 번이나 '정직'이란 표현을 썼네요. 아무래도 요즘 제가 읽는 <찰리와 함께한 여행>(이정우 옮김, 궁리 펴냄) 때문인 듯합니다. 스타인벡이 쉰여덟 살에 애견 찰리를 데리고 미국 전역을 돌아보고 쓴 이 여행기는 1965년 이정우의 번역으로 삼중당에서 <아메리카 초상>이란 제목으로 처음 나왔는데, 2006년에 그 번역 그대로 다시 출간되었습니다. 어쩌면 선생님은 <아메리카 초상>일 적에 이미 읽으셨을지 모르겠습니다만, 아무튼 저는 이번에 읽으면서 반세기 전의 번역임에도 정갈하고 맛깔스런 문장이 어찌나 좋던지, 소설가가 아닌 에세이스트 스타인벡의 매력에 흠뻑 빠지고 말았습니다.

특히 제 마음을 사로잡은 것은 스타인벡의 곧고 담백한 성품입니다.(그래서 자꾸 그 앞에 정직하다는 형용사를 쓰게 되는 것 같아요.) 중언부언 자기 이야기를 늘어놓는 작가는 아니지만 그래도 여행기인 탓에 소설과 달리 이 책에서는 그의 속내를 읽을 수 있는데, 그렇게 읽은 스타인벡이라는 사람이 좋아서 새삼 그가 세상을 떠난 것이 아쉽기만 했습니다.

더구나 작고한 번역자를 대신해 아들이 쓴 후기에서, 번역자가 의문 나는 것을 편지로 물으면 스타인벡이 확인 답장을 보냈다는 일화를 읽으니, 짧은 동안이지만 '친절한 존 아저씨'와 제가 이 지구에서 함께 호흡했다는 사실에 그가 더 가깝게 느껴지더군요. 몸이 무거운 저와 달리 방랑벽 때문에 이혼을 당했을 만큼 여행을 좋아한 스타인벡이지만, 그런 그도 "나는 떠나고 싶지 않았다. 출발할 날이 다가오자 따뜻한 잠자리와 아늑한 집이 더할 나위 없이 아쉬워"진다고 토로할 때는 제 맘과 똑같아 반가웠지요.

하지만 마냥 '나도 그래!' 하고 고개를 끄덕일 수만은 없었습니다. 몇 개월이 걸릴 대장정을 계획한 까닭을 설명하며, "미국에 관해서 글을 쓰는 미국 작가이지만… 나는 참된 미국의 언어를 듣지 못하고 미국의 풀과 나무와 시궁창이 풍기는 진짜 냄새를 모르고, 그 산과 물, 또 일광의 빛깔을 보지 못했다."고 고백할 때는 가슴이 뜨끔했고, 큰 병을 앓고 난 몸으로 무모한 도전을 한다는 시선에 대해서, "내 보기에 덧정 없이 지지하게 망설이며 무대를 떠나지 않으려는 사람들이 너무도 많다. 삶으로서도 글렀거니와 연극으로서도 사뭇 멋쩍다.… 만약 내가 계획한 이 여행이 못 견딜 만큼 힘들다는 걸 알게 된다면 그때야말로 어차피 세상을 떠나야 하리라."고 천명할 때는 절로 낯이 붉어졌습니다.

한국에서 한국어로 글을 쓰는 이른바 작가라면서 이 땅과 이 땅의 사람들에 대해 무엇 하나 제대로 아는 것이 없는 자신이 창피하고, 행여 건강을 상할까 영양제를 챙기고 운동을 하면서도 그 건강한 몸을 던질 간절한 삶은 잊어버린 지 오래인 제가 한심했습니다. 모르면 알고자 하고 알면 아는 대로 쓰고자 했던 스타인벡의 정직한 작가정신이 다시금 저를 부끄럽게 했지요.

그런데 선생님, 오래 전엔 그 부끄러움을 감당하지 못해 꿈을 접었지만 이번엔 피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나이가 들어 뻔뻔해진 탓인지도 모르나 부끄럽고 모자라도 그대로 힘껏 살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30여 년 만에 다시 <분노의 포도>를 읽으며, 병드는 것도 삶을 이어가는 데는 필요한 일이란 문장에 밑줄을 그었습니다. 그 말처럼, 부족한 제 능력을 수긍하고 조금씩 나아가려 힘쓰는 것이 지금 제 삶에 필요한 일이라 믿습니다.

선생님, 한때는 너무 일찍 너무 큰 산을 보여준 선생님을 원망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큰 산을 보았기에 제가 부족한 줄을 알았고 멈춰선 안 된다는 걸 알았습니다. 송정자 선생님, 선생님은 제게 인생의 선물을 주셨습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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