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를 들자면 이런 식이다. 일본의 후쿠시마 핵발전소에서 유출된 방사성 물질을 놓고 일부 의사를 포함한 많은 이들이 그 위험을 경고했다. 환경 단체 역시 이들의 위험을 시민에게 적극적으로 알리는데 앞장섰다. 정부의 입장을 대변하는 전문가들이 "인체에 무해한 수준"이라고 강변해도 소용이 없었다.
왜냐하면, 미량의 방사성 물질이 인체에 어떤 영향을 줄지는 지극히 '불확실하기' 때문에 실제로 치명적인 결과로 이어질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이 대목에서 환경 단체를 비롯한 여럿이 미량의 방사성 물질이 인체에 미치는 영향의 '불확실성'을 강조하며, 주의를 요구할 때 그것은 수긍할 만하다.
그런데 비슷한 시기, 환경 문제를 둘러싼 또 다른 논쟁을 살펴보자. 지난 10년간 귀가 닳도록 들은 지구 온난화의 위험을 놓고서 딴죽을 거는 '소수의' 회의주의자들이 있다. 최근의 가파른 지구 기온 상승과 인간 활동 사이의 관계도 부인하는 '극소수의' (전 세계에서 한 여섯 명?) 과학자의 견해는 웃으면서 넘어가자.
이 논란의 진짜 핵심은 이렇다. 더워진 지구가 과연 어떤 식으로 반응할 것인가? 일부 환경 운동가를 비롯한 비관론자의 주장처럼 할리우드 영화 <투모로우>가 보여줬던 대재앙으로 나타날 것인가? 아니면 회의주의자의 장담대로 인류는 더워진 지구에 비교적 수월하게 적응하면서 문명을 계속 유지할 것인가?
이런 양극단의 입장 사이에 수많은 이견들이 존재한다. 왜냐하면, 미래 지구의 기후가 어떻게 변할지를 예측하는 일은 지극히 불확실한 일이기 때문이다. 생각해 보라! 슈퍼컴퓨터 몇 대가 동원되는데도 한반도의 일주일 후의 날씨도 '모 아니면 도' 식일 경우가 많은데, 어떻게 50년 후, 100년 후의 지구 기후 변화를 확실하게 예측할 수 있다는 말인가!
이쯤 되면 지구 온난화에 어떻게 대비할지는 과학의 문제라기보다는 정치의 문제 혹은 윤리의 문제로 비약한다. 그런데 여기서 웃지 못 할 전도가 일어난다. 방사성 물질의 위험을 놓고는 '불확실성'을 강조했던 쪽이 이제 지구 온난화의 위험을 놓고는 전 세계 수천 명의 과학자가 '합의'한 '확실한' 예측이라고 목소리를 높인다. 반면에 그 반대편은 '불확실성'을 강조한다.
이런 대립 속에서 인류가 숙고해야 할 지구 온난화를 둘러싼 정치의 문제 혹은 윤리의 문제는 설 자리가 없다. 예를 들자면, 이런 질문. 아마존 열대 우림을 무차별 개간하는 땅 없는 농민들의 '만행'에 맞서서 전 세계가 브라질 정부에 압력을 가하는 일은 정당한가? 지구 온난화의 주범으로 꼽히는 이산화탄소를 펑펑 배출하는 선진국 시민의 수브(SUV)는 그대로 두고서?
환경 문제가 자꾸 과학 논쟁으로 치환되면서 나타나는 부정적인 효과는 또 있다. 온갖 '괴짜'들이 환경 문제의 허구를 보여주겠다면서 한두 가지 잣대를 동원해서 "○○○는 사기다" 유의 얘기를 떠들고, 그것이 상식 뒤집기에 혹하기 마련인 기자나 출판사 편집자를 자극해서 기사나 책으로 대중 앞에 나타난다.
이 주장의 대부분은 복잡한 환경 문제를 한두 가지 논리로 재단해 현실을 제대로 보여주지도 못하는데도, 그러니까 말 그대로 '탁상공론'인데도 마치 대단한 진실인 양 누리꾼이나 혹은 언론 칼럼니스트에게 영향을 준다. (왕년에 이런 역할을 했던 한 보수주의자가 요즘에는 마치 환경주의자인 양 행세하며, 진보 언론의 단골 필자가 되었으니 이 또한 흥미롭다.)
앞에서도 강조했듯이 이런 식의 담론 구도 속에서 환경 문제에 대한 넓고 깊은 고민이 들어설 자리는 좁다. '과학 vs 신화', '진실 vs 거짓' 등의 대립 구도로는 포착할 수 없는 환경 문제를 둘러싼 수많은 다양한 쟁점들이 사라져버리는 것이다. (하긴 이것은 마치 한국 사회의 모든 문제를 '이명박 vs 반(反) 이명박'으로 치환해서 자기 잇속을 차리는 모습들과도 흡사하다!)
▲ <에코의 함정>(헤더 로저스 지음, 추선영 옮김, 이후 펴냄). ⓒ이후 |
미국의 저널리스트 로저스는 도시의 쓰레기 문제에 천착한 전작 <사라진 내일>(이수영 옮김, 삼인 펴냄)로 나를 부끄럽게 하더니(넌 도대체 뭐했니?), 이 책을 통해서 또 다른 기쁨을 주었다(미국에도 동지가 있었네!). 왜냐하면, 이 책에 실린 상당수 주장이 수년간 내가 글과 말로 해온 것과 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서, 이런 질문들. 미국산 쇠고기의 광우병 위험으로 온 나라가 들썩였던 2008년 이후 생활협동조합에 대한 시민의 관심이 늘었다. 그런데 덩치를 불린 일부 생활협동조합이 이마트, 홈플러스와 같은 기존의 대형 유통 업체의 관행을 따르려는 모습을 어떻게 봐야 할까? 생활협동조합의 성장에 초점을 맞춰서 마냥 환영하는 게 맞는 걸까?
최근 국내에서도 '지역에서 생산한 먹을거리를 지역에서 소비하자'는 지역 먹을거리(local food) 운동이 관심을 받고 있다. 그런데 지역 먹을거리 운동의 가장 약한 고리는 바로 유통이다. 농민들이 땀 흘려서 생산한 먹을거리를 지역의 시민에게 어떻게 전하는 것이 효과적일까? 여기서 '규모의 경제'를 거론하며 대형 유통 업체 활용 전략이 나온다.
이마트, 홈플러스에서 지역의 농민으로부터 먹을거리를 구매해서 지역의 시민에게 공급하자는 발상이다. 앞으로 지역 먹을거리에 대한 시민의 관심이 높아지면 분명히 대형 할인점 '유기농 먹을거리' 매대 옆에 '지역 먹을거리' 매대가 마련될 텐데, 이것은 농민과 시민에게 득일까, 해일까?
몇 년 전부터 '착한 초콜릿', '착한 커피' 이런 식의 공정 무역 먹을거리에 대한 관심이 높다. 그런데 공정 무역 먹을거리는 과연 최선일까? 제3세계 농민에게 정당한 노동의 대가를 주자는 그 발상의 선의를 의심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런 선한 동기가 꼭 선한 결과로 이어질까? 아니, 그것은 정말 선한 동기일까? (☞관련 기사 : '착한' 마케팅이 지키는 '나쁜' 세상)
<에코의 함정>은 바로 이런 질문을 놓고서 정말로 '불편한 진실'을 얘기한다. 발로 뛴 '철저한 조사', 상식에 기대지 않은 '대담한 해석', 환경 문제로 나타나는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적 탐구'는 저널리즘의 본보기여서 또 한 번 기자 행세를 하는 나를 부끄럽게 한다. 몇몇 대목에 아쉬운 점 혹은 이견이 있어도, 감히 목소리를 높이지 못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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