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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독립을 지지했던 별종의 일본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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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독립을 지지했던 별종의 일본인들

박노자ㆍ허동현의 서신 논쟁-'우리안 100년 우리밖 100년' <11>

***국경과 국적을 뛰어넘는 사해동포적 인류주의의 이상과 실천/박노자**

허동현 교수님,

안녕하십니까?

1990년대 같으면, '사회주의의 실패'를 이야기하는 것은 하나의 유행이 된 것 같습니다. 동구권이 몰락한 데다가 1989년의 천안문 사태가 중국 공산당 권력의 살인적인 탄압성을 전세계에 보여주기도 하고, 북한의 기아 사태가 한반도에서 병영식 사회주의가 미래 없음을 보여주기도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물론, 근대적 군사주의적 국가의 건설을 목표로 하는 권력 집단의 이데올로기가 돼서 왜곡돼버린 '사회주의'가 많은 이들을 희생시키기도 하고 진정한 사회주의적 이상과 거리 먼 사회를 만들기도 한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아직까지―평등과 박애에 입각한 보다 나은 사회가 건설된 적이 없었다고 해서 우리 극동의 사회주의의 역사를 무조건 '실패작'으로만 치부해도 되는가요? 약육강식의 세계를 초월하려는 초기 사회주의자들이 결국 이상향을 얻지 못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 구도(求道)의 길에서 적어도 한 가지를 얻은 것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다름이 아니라 국경과 국적을 뛰어넘는 사해동포적 인류주의의 이상과 실천입니다.

<1(홉스봄).jpg> 홉스봄(E. Hobsbawm) @ 프레시안

또 한 가지 고려해야 할 사항은, 20세기 초반의 극동권의 사회주의자들이 결코 모두 전체주의적 색깔의 레닌ㆍ스탈린주의에 흘린 것은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물론 홉스봄(E. Hobsbawm)의 표현대로 '극단의 세기'이었던 만큼 한중일 삼국의 좌파 운동에서 다 스탈린주의의 여러 갈래들이 패권을 잡은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지 않았던 소수도 존재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할 듯합니다.

예컨대, 인본주의적 사회주의의 선구자이었던 조소앙(1887-1959)은, 이미 1920년대 초기부터 그의 노선이 '볼세비즘과 본질적으로 다르다'는 것을 명확하게 이야기했습니다. 마찬가지로, 기독교의 입장에서 사회주의를 받아들인 여운형(1886-1947) 같은 온건, 중도 사회주의자들은 명백하게 폭력 혁명과 무산 계급의 독재론을 부정하고 민주적 사회주의 이론을 전개했습니다. 소련식 공산주의의 비민주성과 독재성을 1920년대에 가장 신랄하게 비판한 것은 다름이 아닌 사회주의의 한 갈래로 인식됐던 아나키즘 운동가들이었습니다. 국가와 계급과 경쟁이 없는 새로운 사회를 만들어보겠다는 모든 이들에게 레닌ㆍ스탈린주의의 범죄에 대한 책임을 추궁하는 것이 올바르지 않을 듯합니다. 그리고 비록 레닌주의 당에 몸을 담은 사람이라 해도, 그 사유 방식이나 추구하는 목표, 그리고 투쟁 방법은 꼭 '정통' 레닌주의와 같지 않을 수도 있었습니다. 좌파로서의 정치 생활을 레닌주의자로 시작했다가 나중에 스탈린주의자 되기를 거부하여 민주주의 옹호와 트로츠키의 '지속적 혁명'의 사상을 융합한 진독수(陳獨秀, 1879~1940) 선생과 같은 사람의 이념적 편력은 중국에서의 좌파 사상의 발전이 얼마나 복잡하게 이루어졌는지를 잘 보여줍니다.

<2(진독수).jpg> 호적(胡適: 1891-1962)과 함께 문자 혁명의 선봉에 섰던 진독수(陳獨秀, 1879~1940) @ 프레시안

극동 아나키즘의 한 가지 매우 중요한 이론적인 특징은, 근동의 초기 근대 지식인의 핵심적인 담론이었던 사회진화론을 극복한 것이었습니다. 사회진화론이 인류 사회 진화의 원동력을 잔인한 경쟁에서 찾는 데에 반하여, 1920년대의 극동에서 그 인기가 대단했던 아나키즘의 원조 크로포트킨(Pyotr Kropotkin, 1842~1921)은 상호 애정과 상부상조, 즉 인간적 연대를 진화의 원천으로 봤습니다. 1920년대의 한국의 대표적인 지성인 잡지 『동광』(제10호, 1927년2월)에서, 크로포트킨의 인류애와 연대주의 사상이 다음과 같이 소개됐습니다.

“크로포트킨씨의 입론의 근거를 먼저 알아야 한다. 그는 말하기를 ‘사회성립은 다만 인류 협동(協同)의 사회적 본능에 의한 것이라’하였고 ‘문화 발생은 다만 몇 세기, 몇 천만 명의 이름 없는 군중의 한갓 노력으로 되었다’고 하였다. 사회는 사랑과 동정심으로 조성된 것이 아니고 다만 인류 협동의 의식으로 조성된 것이라고 하였고 또 그의 말은 ‘...동물의 사회성(社會性)을 단순히 사랑과 동정심으로만 본다면 실로 동물의 보편성과 중요성을 감소시킨다.

인류의 도덕도 이러하다. 만약 단순히 사랑과 개인 동정심으로 윤리의 기초를 삼는다면 도리어 전체 도덕 감정의 의의를 협소하게 만드는 것이다. 우리가 만약 이웃집에 불이 남을 보면 곧 물통을 가지고 그 집으로 달아간다. 이 이웃은 우리가 잘 알지 못하는 집이다. 이것이 결코 사랑이 아니다. 이것은 비교적 광대하고 비교적 막연한 협동심과 사회성의 감정이 우리를 감동시킨 것이다. 동물도 역시 이러하다. 반추류(反芻類)와 야마(野馬)가 한 무리가 되어 늑대를 방어하는 것은 이것은 사랑도 아니고 진정한 동정심도 아니다. 늑대는 무리를 지어 사냥꾼이 그를 공격함을 방어하며 어린 고양이와 어린 양과의 장난이나 각종 작은 새가 가을날에 놀며 즐기는 이 모든 것은 사랑이 아니다. 더욱 한 종류의 노루 새끼들이 각처에 분산하여 있다가 큰 내를 건너려할 때는 모두 한 곳에 모인다. 이 역시 사랑도 아니고 동정심도 아니다.

사랑과 동정심보다 더욱 광대한 감정―곧 동물과 인류 사회 중 점점 진보하는 본능이다. 이러한 본능은 동물과 인류로 하여금 상부상조의 실천으로부터 힘을 얻게 할 수 있다. 또 그들로 하여금 사회 생활로부터 쾌락을 얻게 할 수 있다. 사랑와 동정심과 희생은 비록 우리의 도덕 감정의 발전에 큰 공헌이 있지마는 그러나 인류사회는 사랑과 동정심으로 기초를 만듦이 아니고 다만 인류의 협동의식으로 기초를 만든다. 비록 본능의 영역에만 한정돼 있지만 이것은 무의식적으로 상부상조의 실험으로부터 나온 힘을 승인하게 되며 무의식으로 개인의 행복은 모든 타인의 행복과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승인하게 되며 더욱 무의식적으로 각 개인으로 하여금 다른 개인의 권리와 자기의 권리가 동등하다고 인정케 하는 정의와 평등을 승인케 한다. 허다한 고상한 도덕 감정은 이 광대한 필연의 기초위에서 발전한다.’

크로포트킨씨의 사상은 인류의 사회는 인류의 협동적 본능이 조성한 것이라는 것이다. 인류의 자신은 곧 전세계다. 비록 작은 세포나마 모두 ‘자치적 유기체며 자치적 유기체는 협동이며 상부상조한다.’ 고로 그는 호조(互助)를 사회 성립의 일개 중대한 요소로 보았다.“(38-40쪽, 맞춤법을 현대식으로 바꾸었음)

<3(크로포트킨).gif> 크로포트킨(Pyotr Kropotkin, 1842~1921) @ 프레시안

즉, 크로포트킨과 그 한국 지지자들이 믿었던 것은, 개인적 차원의 사랑의 감정이나 동정심이 아니고 전체 인류의 “협동 본능”―즉, 무의식적인 연대 의식―이 동물계와 인간 사회의 진화를 이끌었다는 것이었습니다. 진화를 인정하는 것은 큰 차이지만, 일체 만물―그리고 특히 인간―의 “집단적 본성”을 “협동”으로 규정한 것은 측은지심과 같은 자비로운 마음이 인간의 본질에 속한다고 믿었던 유교와 구조적으로 흡사한 점도 있습니다.

유교적인 휴머니즘을 닮은 것은, 아나키즘이 그 정도로 극동에서 유행한 이유 중의 하나가 아닌가요? 어쨌든 근대식 과학의 성과를 이용하면서 사회진화론의 살인적인 논리를 체계적으로 부정할 수 있었던 이데올로기는, 1920년대로서 아나키즘을 비롯한 여러 갈래의 좌파 사상이 유일했을 것입니다. 새로운 차원에서 “휴머니즘으로의 귀환”을 이룬 아나키즘의 창조적인 수용은, 사회진화론이 아직 한국 사상계를 풍미했던 1920년대로서 일대 쾌거였습니다.

민족간의 경쟁이 아닌 “협동”, 그리고 운동가들의 초(超)국가적 연대를 주장했던 아나키즘의 정신이 투철한 사람이면, 사회진화론의 정신에 의해서 만들어진 근대의 가장 무서운 독약인 폐쇄적인 국가 중심의 민족주의를 상당히 탈피할 수 있었습니다. 예컨대, 인생을 한문을 익히는 유생으로 시작하여 1964년에 한국민주사회주의 연구회를 만드는 등 한국적 사민주의(社民主義) 발전에 크게 기여한 독립 운동가 정화암(鄭華巖, 1896~1981) 선생은, 1932년의 윤봉길의 거사와 관련된 다음과 같은 재미있는! 에피소드를 소개한 일이 있습니다:

"중국인 동지의 소개로 알게 된 일본인 종군 기자를 통해서 천장절(天長節, 일본 천황의 생일 기념일) 기념식에 나올 놈들의 명단과 식순을 쉽게 입수했어요. (…) [거사가 성사되고 나서] 그 일본인 기자가 비를 맞고 뛰어들어오면서, ‘너희 성공했다, 너희 성공했다’하는 겁니다. ’무엇이 성공했느냐‘했더니 ’터졌어, 터졌어. 상해 방면 최고 사령관 시라카와 대장이 폭사하고 제3함대 노무라 사령관이 눈알이 빠지고(…)‘ 이 친구는 일본인 종군 기자이면서도 은근히 우리 계획을 눈치채고 성공을 바랐던 겁니다." (『혁명가들의 항일회상』, 김학준 편집, 민음사, 1988, 326~327쪽).

일본이 군국주의적 열풍에 휩싸였던 1930년대에, 일본인으로서 조선인들의 독립 투쟁을 이처럼 도와주면서 반기는 것이 과연 쉬운 일이었을까요? 그러나, 사회주의와 아나키즘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극소수의 젊은 인텔리겐챠 같으면, 일본 군벌이 입은 손실에 대해서 조선인보다 더 기뻐할 수 있었던 겁니다. 정화암선생이 그 일본인을 신뢰할 수 있었던 이유는, 정화암이 발기인이었던 비밀 무정부주의 조직 “남화(南華) 한인(韓人)청년 연맹”(1931년11월 결성)에서 두 명의 일본인 동지가 이미 일제와 싸우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4(정화암).jpg>한국적 사민주의(社民主義) 발전에 크게 기여한 독립 운동가 정화암(鄭華巖, 1896~1981) @프레시안

물론, 오늘의 우리 입장에서 보면, 그 때 정화암과 그 동지들이 사용했던 “암살주의”이라는 운동 방법은 무자비하고 미숙하기 짝이 없는 겁니다. 사실, 그 방법은 아나키즘의 근본 정신인 “인류 협동”과 근본적으로 모순되는 점이 있습니다. 경쟁을 위주로 하는 반인륜적 자본주의 사회를 평화적으로 개조시키는 데에 대해서 절망했던 유럽의 일부 아나키스트도, 극동의 소수 아나키스트도 “파괴주의”의 유혹에 빠졌지만, 상당수의 아나키스트들이 각종의 역경 속에서도 아나키즘의 원칙에 충실하여 평화적 수단만을 썼던 사실도 기억해야 합니다. 그러나 일부 아나키스트들의 투쟁 방법을 못 마땅하게 여길 수 있지만, 1920~30년대 극동의 아나키스트들에게 배울 점은, 바로 이와 같은 초(超)국가주의, 초(超)민족주의 아닌가 싶습니다. 그 점을 가장 잘 표현한 사람은, 조선인 아나키스트 박열(1902~1974)과 함께 일본 천황을 암살하려다 투옥돼 감옥에서 변사체로 발견된 박열의 일본인 연인이자 동지 가네코 후미코(金子文子)가 아닌가요?

<5(박열).jpg> 1923년 일왕 폭살혐의를 받고 구속된 아나키스트 박열(왼쪽)과 그의 일본인 아내였던 가네코 후미코. 1926년 감옥 독방에서 의문의 자살을 한 그녀의 유해는 현재 박열의 고향인 경북 문경에 묻혀 있다. @중앙일보

물론 허동현 교수님께서는 대다수가 국가주의의 환상에 빠져 있는 상황에서 소수의 깨인 정신이 무슨 소용이 있는가를 반문하실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사회주의에 입각한 소수의 보편주의적 자각은, 1930년대의 일본 군국주의를 이기지 못했지만 전후(戰後) 일본의 민주주의 심화에 크게 공헌하지 않았습니까? 우리 문제들과 관련된 사건들만 이야기한다 해도, 1970~80년대에 김대중의 생명을 구출하려고 운동을 벌였던 사람들도, 일본 교과서들의 역사 왜곡에 맞서 싸우는 사학자와 시민들도 대개 좌파에 속하거나 좌파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사람들이 아닙니까? 저는, 그러한 사람들이 일본 사회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미치기에 일본이 지금까지 평화주의적 전후 헌법을 그대로 고수할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즉, 사회주의자들이 아직까지 이상향을 건설하지 못했다 해도, 우리 세상이라는 이름의 지옥을 뜯어고치는 데에 약간이라도 도움이 된 것 같습니다.

캄캄해지는 오슬로에서 박노자 드림

***"새로운 동아시아는 관용과 대화에서 시작돼야"/허동현**

반갑습니다, 박노자 선생님.

무정부주의자들은 개인의 자유와 평등을 극대화하고 정부와 통치권의 존재할 이유를 부정하며, 모든 제약이 사라진 완전자유의 자연 상태로의 복귀를 꿈꾸었습니다. 아나키스트 정화암과 박열. 두 분도 자유를 억압하는 모든 힘―국가ㆍ법ㆍ감옥ㆍ사제(司祭)ㆍ재산 등―이 사라진 세상을 꿈꾸었지요. 이 점에서 두 분은 국가가 권력과 소유를 독점하는 사회를 꿈꾼 마르크스주의자들과 달랐습니다. 1919~1921년간 임정 대표로 만국사회당대회에 참석차 유럽을 여행한 조소앙도 볼세비키의 계급독재론과 폭력주의에 실망해 민족주의의 입장을 취했지만, 독립운동 진영의 좌ㆍ우 분열을 우려하고 연합전선을 추구한 바 있습니다. 특히 1927년 2월 15일 국내에서 좌우합작에 의해 신간회가 창립되고, 이에 자극받아 중국에서 유일독립당 운동이 전개되자 조소앙은 이에 적극 참여하였습니다.

<6(조소앙).jpg> 임시정부 외무부장관 시절(1925)의 조소앙(趙素昻, 1887~1958) @삼균학회

이 운동이 실패로 끝날 무렵 조소앙은 “①개인과 개인간의 균등, ②민족과 민족간의 균등, ③국가와 국가간의 균등, ④ 완전한 세계의 균등”을 지향하는 “완전균등”을 꿈꾸는 “삼균주의(三均主義)”를 완성했습니다. 이는 그가 1929년 3월 1일 주동이 되어 만든 “한국독립당”의 주의와 정책을 해설한 「한국독립당의 근상(近像)」이란 글에 잘 나타납니다.

“그렇다면 독립당이 표시로 내걸은 주의는 과연 어떠한 것인가? ‘인간과 인간, 겨레와 겨레, 나라와 나라 사이의 균등한 생활을 주의로 삼는다’할 것이다. 무엇으로써 인간과 인간 사이의 균등을 꾀할 것인가? 정치의 균등화, 경제의 균등화, 교육의 균등화라고 하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보선제를 실행하여 정권을 가지런하게 하고, 국유제를 실행하여 경계를 가지런하게 하며, 국비로 의무학제를 실행하여 교육을 가지런하게 할 것이니, 이로써 나라 안에서 인간과 인간의 균등한 생활이 실현된다. 무엇으로써 겨레와 겨레가 균등하게 이르도록 할 것인가? ‘민족자결’을 제 민족과 다른 민족에게 적용시킴으로써 소수민족과 약소민족으로 하여금 압박을 당하고 통치를 받는 자리에 빠지지 않도록 할 것이다. 무엇으로써 나라와 나라 사이의 균등을 꾀할 것인가? 식민정책과 자본 제국주의를 무너뜨리고, 약소한 자를 점령하거나 우매한 자를 치거나 혼란을 틈타 이득을 취하거나 남의 패망을 업신여기는 따위의 전쟁 행위를 금지하며, 모든 나라로 하여금 서로 간섭하거나 침범하지 않고 서로 침탈함이 없도록 함으로서 국제생활에 있어 평등한 지위를 온전하게 하며, 나아가서는 사해일가, 세계일원이라는 최종목적들을 꾀할 수 있다 할 것이다.“(역문은 홍선희, 『조소앙의 삼균주의 연구』한길사, 1982, 58쪽에서 인용했음)

삼균주의는 사회주의의 한계를 극복해 민족주의와 사회주의 양자를 종합하고 있는, 변증법적 진테제(Synthesis)를 지향하고 있다는 점에서 민족문제와 평등문제를 생각하는 오늘의 모든 사람들에게 아직도 설득력을 발휘한다고 봅니다.

따라서 저 역시 정화암과 박열, 그리고 조소앙 세 분의 삶과 꿈은 모순으로 가득 찬 세상에서 우리의 정신이 썩지 않도록 막아주는 소금과 같았다고 생각합니다. 하나 저는 이 세 분과 다른 길을 걸었던 인물 중에, 민족기업가 유일한(柳一韓, 1895~1971)과 민주주의 정치가 장면(張勉, 1899~1966)의 삶과 꿈도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소중한 희망의 기억이라고 생각합니다.

<7(유일한).jpg> 42세(1937) 때의 민족기업가 유일한(柳一韓, 1895~1971)@유한양행

평등과 박애의 세상을 만들려면, 지향의 좌우를 넘어 함께 생각하고 모색하는 노력이 중요하다고 보기 때문이지요. 어떻게 하면 계층ㆍ인종ㆍ남녀ㆍ좌우ㆍ국경을 넘어 나와 다른 존재인 타자와 더불어 살 수 있을 것인가, 이것이 우리 세상의 화두(話頭) 아닙니까? 그렇다면 1939년 우리나라 최초로 종업원지주제를 도입한 유일한의 나눔 정신과, 노동자들이 자주적으로 꾸려나가는 산업체를 세우려 했던 아나키스트들의 꿈 사이에서 공통분모를 찾아보아야 하지 않을까요? 나아가 그리스도교 정신에 따라 국가와 민족을 넘어 '완전한 평등'이 구현되는 '사해동포주의 이상향'의 실현을 꿈꾼 장면에게서도 '폐쇄적인 국가 중심의 민족주의'를 극복할 가능성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요? 그의 이야기를 들어보시지요.

“우리 시대는 이들 많은 비그리스도교국이 자유와 독립 정신의 강력한 부흥에 참여하고 있다. 이러한 부흥은 신흥 국민 사이에도 완전한 평등에 대한 동경이 숨어 있다. 세계는 나날이 좁아져가고 모든 종족과 모든 국민 사이의 접촉은 더욱 친밀하게 되어간다. 사람들 사이에서 커다란 일치, 더 큰 협동체를 원하는 마음이 뚜렷이 눈에 띈다. 더욱 밀접한 일치와 참된 평등을 구하는 소망은 당연한 것이며 정당한 것이다. 교회의 태도는 그 교육과 그 유력한 원조로 이 갈망을 채우기 위하여 온 힘을 기울인다. 하느님은 아버지이기 때문에 사람은 누구나 형제라는 이 교회의 가르침은 피부의 색깔, 인종, 사회적 지위의 구별 없이 인격의 영원한 운명에 대하여 평등한 존엄을 각자에게 주는 것이다. 우리는 그리스도교도가 아닌 우리 형제, 특히 지식인에게 교회의 이 가르침을 열심히 또 절실하게 알려야 한다."(장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한 알의 밀이 죽지 않고는』가톨릭출판사, 1999, 149~150쪽)

그리스도교의 신앙에 입각해 국가를 초월한 인류의 평등을 지향하는 그의 국제주의적 정치사상은 현실 세계에서 실현되기 어려운 비현실적 이상에 불과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냉전 붕괴 후 지역간 갈등이 증폭되는 현재적 입장에서 볼 때 그의 사해동포주의에 입각한 자유민주주의 정치사상은 시대를 넘어서는 설득력을 갖고 있다고 봅니다.

<8(장면).jpg> 제2공화국 국무총리 장면(張勉, 1899~1966)@운석장면연구회

한 세기전 서구와 일본인들이 근대 만들기에 전력할 수 있었던 데 비해 우리 선조들은 제국주의 열강의 침략에도 맞서 싸워야만 했습니다. 오늘의 우리도 계층과 세대, 그리고 남북 사이의 분열을 극복하여야 하며, 동아시아 지역에서 화해를 이끌어 내야 한다는 점에서 한 세기 전 선조들과 마찬가지로 무거운 짐을 지고 있지요.

그렇다면 정화암, 박열, 조소앙, 유일한, 그리고 장면, 이 다섯 분의 삶과 꿈에서 최대공약수를 찾는 것이 갈등과 분열, 지향과 세대의 장벽을 넘어 자유와 박애를 바탕으로 더불어 살아가는 세상을 만드는 첫걸음이 아닐까요?

한 세기전 일제의 침략으로 더욱더 깊어진 한ㆍ일 양국간의 반목과 갈등은, 유럽통합이 현실로 나타난 지역 간 화해와 통합의 시대에도 얼마 전 역사교과서 왜곡파동에 잘 나타나듯이, 독일과 달리 일본의 불충분한 전후 청산노력 때문에 여전히 극복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한ㆍ일 양국의 갈등과 반목을 주체적이고 상호 평등한 화해와 협력의 선린관계로 발전시키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할까요?

그 첫 걸음은 불행한 과거 ‘역사의 기억’에 대한 화해에서 시작해야 할 것이라고 봅니다. 그렇다면 박열과 그의 아내를 변호한 일본인 변호사 후세 다츠지(布施辰治, 1880~1953)와 일본 정부의 역사왜곡에 맞서 싸운 이에나가 사부로(家永三郞, 1913~2002) 교수의 삶 역시 우리에게 많은 메시지를 전해줍니다. 후세 다츠지는 3.1운동을 맞아 「조선독립운동에 경의를 표한다」는 글을 발표하고, 1920년대 비타협 폭력노선 항일운동을 펼쳤던 의열단 관련 사건의 변론을 맡는 등 평생을 독립운동의 정당성 옹호와 일제의 인권탄압에 맞서 싸우다 옥고를 치르기도 하였습니다. 일본인이기를 부끄러워한 일본의 양심이었지요.

<9(이에나가).jpg>일본 정부의 역사왜곡에 맞서 싸운 이에나가 사부로(家永三郞, 1913~2002) 교수 @한겨레신문

또한 노벨 평화상 후보로 지명되기도 했던 이에나가 사부로는 “일본인으로서 과거의 역사를 반성하고 평화유지를 위해서 노력하는 것은 당연하며, 과거의 역사를 맹목적으로 미화(美化)하는 것은 일본인으로서의 자각(自覺)을 높이고 민족에 대한 애정을 기르는 올바른 길이 아니다”라는 인식을 갖고 1965년 일본 정부의 역사교과서 검정에 항의하는 소송을 제기한 이래 무려 32년 동안 과거사 왜곡을 막기 위해 국가를 상대로 법정 싸움을 해나간 깨인 지성이었습니다. 1997년 3차 소송 최고재판소 선고공판에서 일부 승소 판결을 받아낸 뒤에 한 그의 다음과 같은 말이 가슴에 와 닿습니다.

“양심적인 많은 사람들의 지원 하에 싸워 이긴 것을 영광스럽게 생각한다. 전전(戰前)에 국정교과서로 공부를 했던 사람으로서 두 번 다시 그런 시절로 되돌아가서는 안된다는 마음이 간절하다. 나는 전쟁에 가담하지는 않았지만 침략을 막기 위해 아무런 일도 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간접적으로 전쟁에 대한 책임이 있다고 생각한다. 때문에 내 이름으로 출판되는 역사교과서가 문부성의 주장대로 수정되는 것을 결코 받아들일 수 없었다."(『국민일보』 1997년 8월 30일자)

이 두 분의 삶과 꿈은 유럽통합이 현실화된 화해와 통합의 시대에도 여전히 극복되지 못하고 있는 한국과 일본의 해묵은 갈등을 풀고 화해와 관용의 길로 이끌 희망의 기억이라고 봅니다. 때문에 저 또한 선생님의 우려와 달리 우리의 독립운동을 도운 일본의 열린 지성들과 오늘날 일본의 우경화에 저항하는 시민들의 노력에 찬사를 보냅니다. 특히 얼마 전 일본 정부의 검인정을 통과한 왜곡 교과서가 교육 현장에서 사용되는 것을 막아낸 일본 풀뿌리 시민사회의 성숙된 모습에서, 일본 시민들이 초국가주의와 배타적 민족주의를 넘어설 수 있는 저력을 갖고 있다는 믿음을, 그리고 불행했던 한 시기 '역사의 기억'에 대해 한국과 일본의 시민들이 화해할 수 있다는 희망을 품게 되었습니다. 지금 일본에서는 타자ㆍ타민족과 더불어 살기를 원하는 다원화된 시민사회가 성장하고 있으며, 이들의 힘은 향후 화해와 통합의 시대가 동아시아 지역에 도래하는 것을 촉진하는 쪽으로 기능하리라는 희망적 관측이 가능하다는 점입니다.

<10(일본시민).jpg>
<11(일본시민).jpg>"새로운 역사 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이 만든 중학교 역사교과서 채택을 반대하는 일본 시민들 @프레시안

그러나 이러한 희망이 현실에서 이뤄지기 위해서는 국가주의나 민족주의를 넘어 타자와의 공존을 도모하는 일본 내 양심세력에 대한 국제적 지원세력으로서 우리가 챙겨야 할 우리 몫의 책임을 다해야 한다고 봅니다. “욕하면서 배운다고 했던가요.” 일본 역사교과서 왜곡을 둘러싼 일본 내의 갈등을 보면서 우리도 결코 이 문제에 자유롭지 못함을 절감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반면교사로서 일본의 역사교과서 왜곡파동을 보며 어떠한 교훈을 얻어야 할까요?

역사교과서 문제에 한정해 말하더라도, 현행 한국의 국정 교과서 체계가 일본의 교과서 검정체계보다 더 국가주의적 색채가 짙은 상황에서 일본의 왜곡된 역사서술에 대한 우리의 비판은 공허하기만 합니다. ‘역사의 기억’을 둘러싼 일본의 ‘내전’을 바라보며 우리는 우리의 국사교과서를 반성적ㆍ비판적 입장에서 성찰해야만 한다고 봅니다. 이제 저항민족주의에서 기인하는 배타성과 우월의식 같은 우리 안의 특수를 어떻게 남의 눈을 감당할 수 있는 일반적인 문제로 환원시킬 수 있는가를 진지하게 고민해야만 할 시대가 도래했기 때문입니다.

사실 국가와 민족을 앞세워 개인의 권리를 경시하는 전체주의나 우월주의에 입각한 배타적인 민족주의를 고취하는 역사 교육의 악영향은 한 나라만의 문제에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과거사 왜곡문제는 시민단체 같은 자국 지성의 문제만이 아니라 국제적 연대와 관심이 필요한 범지구 차원의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일본의 역사교과서 왜곡 문제는 ‘역사의 기억’을 둘러싼 일본 국민들 사이의 ‘내전’이 아니라, 동아시아 지역의 ‘국제전’이기에 국경을 넘어 생각을 함께하는 모든 사람들이 연대하여 풀어야만 하는 과제라고 봅니다.

그렇다면 우리 안과 밖에서 평등과 박애의 세상을 이루기 위해, 한 세기 전 실패의 역사에서 어떠한 교훈을 얻어야만 할까요? 그 첫걸음은 지향과 국경을 넘어 나와 다른 생각을 갖고 있는 사람, 이해를 달리하는 집단과 더불어 살려는 열린 자세로 생각을 나누는, 즉 관용과 대화에서 시작해야만 하지 않겠습니까?

<시리즈 일단 마칩니다. 오는 7월경 재개될 예정입니다.>

***더 볼 만한 책**

1. 김학준 편. 『혁명가들의 항일회상』 민음사, 1988.
2. 이호룡. 『한국의 아나키즘: 사상편』 지식산업사, 2001.
3. 운석기념회. 『한 알의 밀이 죽지 않고는: 장면 박사 회고록』 가톨릭출판사, 1999.
4. 정화암. 『어느 아나키스트의 몸으로 쓴 근세사』 자유문고, 1992
5. 오장환. 『한국 아나키즘 운동사 연구』 국학자료원, 1998.
6. 유일한전기편집위원회. 『유일한』 유한양행, 1995.
7. 홍선희. 『조소앙의 삼균주의 연구』 한길사, 1982.
8. 김기승. 「조소앙의 사상적 변천과정 -청년기 수학 과정을 중심으로-」『한국사학보』 3ㆍ4합집, 1998.
9. 강만길. 「한국민족주의와 삼균주의」 『삼균주의연구론집』7, 1986.
10. 고범서. 「기독교와 기업윤리―유일한씨의 경우」 『한국의 근대화와 기독교』, 1983.
11. 허동현. 「일본 역사교과서 문제에 관한 일관견」 『경기사학』5, 2001.
12. 정준영. 「역사발굴: '일본판 쉰들러' 후세 다쓰지(布施辰治) 변호사」 『신동아』2001년 2월호
12. Arif Dirlik, “Anarchism in the Chinese Revolution”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19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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