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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조선책략'이 한국인에게 남긴 것은?

박노자ㆍ허동현의 서신 논쟁-'우리안 100년 우리밖 100년' <9>

***현대 친미론의 토양을 만드는 데 이바지/박노자**

허동현 교수님,

안녕하십니까?

최근에 친미와 반미가 중요한 논의거리 하나 됐기에, 우리의 친미 의식의 뿌리가 과연 무엇이냐고 물어보는 사람이 꽤나 있습니다. 그 물음을 들을 때마다 120여년 전에 주일 중국 공사관의 참찬관(參贊官)이었던 유명한 시인 황준헌(黃遵憲: 1848-1905)이 쓴 『조선책략(朝鮮策略)』이라는 소책자에 대해서 이야기하게 됩니다.

조선의 수신사 김홍집(金弘集: 1842-1896)에게 1880년에 건네준 이 책에서 미국에 대해서 긍정 일변도의 묘사가 담겨져 있었고, 조선이 침략을 도모하는 러시아의 호시탐탐을 막으려면 반드시 연미(聯美: 미국과 조약 체결과 관계 유지)해야 한다는 주장이 보이기 때문입니다. 일개의 외교관이 며칠 간에 쓴 얇은 소책자지만, 대원군 시기 때 개와 양과 같은 자(犬羊之類)들의 땅으로만 통했던 미국에 대한 조선 조정의 의식을 바꾸는 데에 있어서 큰 역할을 했음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1(김홍집).jpg> 제2차 수신사 김홍집(金弘集: 1842-1896) @프레시안

그러한 의미에서는, 물론 오늘날의 친미론과 직접 연결시키기란 무리가 따르지만 현대 친미론이 배태될 수 있는 토양을 만들어 주는 데에 있어서 이바지한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이 책으로 인해서 미국을 긍정적으로 생각하게 된 고종과 그 측근들이 호의적으로 대접해준 미국의 선교사들에 의해서 세워진 배재 학당(1886)을 위시한 여러 미션 스쿨(선교사들의 학교)에서 결국 이승만, 신흥우(申興雨: 1883-1959), 오긍선(吳兢善: 1879-1963) 등의 각계의 친미적, 개신교적 지도자들이 배출됐기 때문입니다. 미션 스쿨의 초기 졸업생들을 중심으로 형성된 인맥은 결국 대한민국 건국 초기의 지배층의 근골을 이룬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말하자면 이 책이야말로 굳게 잠겨져 있었던 조선의 문을 미국의 종교적, 문화적 침투에 열어주었던 하나의 열쇠였던 셈입니다.

물론 김홍집으로서 황준헌과 그 상사인 주일 청국 공사 하여장(何如璋: 1838-1891)과의 몇 차례의 만남은, 미국에 대한 의식의 변화 이외에도 상당히 큰 의미를 가졌습니다. 어떻게 보면, 1880년7월의 동경에서의 그 만남들은 조선의 고급 관료가 받은 최초의 개화 수업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요? 예컨대, 자강(自强)이라는―앞으로 한 시대의 표어가 될―표현을, 김홍집이 최초로 황준헌과의 필담에서 익혔을 것입니다. 외국 침략의 위협을 어떻게 물리칠 수 있느냐고 물어본 김홍집에게 황준헌이 다음과 같이 이야기했습니다.

"조선에 대한 청나라의 보살펴주는 마음은 단단하여 천하 만국에 그 예가 없을 정도이지만, 오늘의 급무는 힘써 자강을 도모하는 데에 있을 뿐이다(『大淸欽使筆談錄』)."

중국의 입장을 대변해주는 황준헌이라, 자강의 방도로서 당연히 중국에 유학생을 보내어 서양 언어와 조선 기술, 서구적 무기 제작 등을 익히는 방안부터 제안했습니다. 그러나 아울러 그는 서양인들을 초대해서 군사학과 천문학, 광학, 화학 등을 익힐 수 있는 학교를 조선에 세워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습니다 (『朝鮮策略』). 4 명의 미국 교관들이 조선 군인들에게 서구식 병법을 가르쳐주는 조선 사상 최초의 서구식 사관양성기관 연무공원(鍊武公院: 1888-1894) 설치의 아이디어를, 바로 황준헌이 건네준 셈이었습니다.

김홍집이 알현 시에 고종에게 황준헌의 "자강" 권고를 이야기하자 고종이 "청나라 사신의 말이 간곡하게 들리지만, 청나라의 진짜 뜻도 알 수 없으니 우리가 스스로 부강해지는 것이 유일한 해법이다"라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修信使入侍筵說」). "자강"이 조야 노력의 최상 목표가 되는 시대가 점차 오고 있었습니다. "자강"의 아이디어 이외에도, 황준헌이 "보호 관세"의 관념을 조선 관료들에게 최초로 설명해준 사람인 듯합니다. 관세 장벽을 통해서 자국의 이익을 보호해야 한다는 그의 지론은 오늘날에 와서도 개도국의 입장에서 꼭 맞는 말로 들리지만, 흉년 때 조선이 방곡령을 선포하여 미곡 수출을 금지해도 일본이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겠다는 황준헌의 예상은 크게 틀렸습니다. 조약문의 텍스트를 믿고 함경도 방곡령을 실시하다가 일본의 협박을 당해 거액의 배상금까지 물어주어야 했던 1890년대 초기의 일을 우리가 다 기억하지 않습니까? "결일본(結日本)"을 열심히 권고했던 황준헌이, 일본이 힘의 외교를 통해서 조선의 자국 이익 보호의 시도를 무력화시킬 가능성이 있다는 예상을 했을 리가 만무했습니다·

<2(조선책략).jpg> 구한말 중국의 외교관 황준헌이 쓴 『조선책략(朝鮮策略)』. 조선이 미국과 연대해야 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중앙일보

과연 관세의 문제뿐만입니까? 중국에 있어서 가장 큰 위협인 "호랑이 나라 러시아"를 조선이 "막아야 한다"는 목적 의식에 사로잡힌 황준헌이, "러시아를 막기 위한 일본과의 화친"을 제안하면서 일본의 상황과 의도를 『조선책략』에서 다음과 같이 묘사했습니다.

"조선과 중국은 그 정의가 한 집안 같고, 조선이 중국을 섬기기를 예전보다 더 하니 일본인들도 그 힘이 겨룰 수 없음을 헤아리고 함께 화친하고자 할 것이다. …만약 일본이 조선을 공격한다 하더라도 반드시 이긴다고 하기 어렵고 하물며 중국의 도움을 얻어 좌우로 돕고 동서로 정벌하면 일본이 반드시 지탱하지 못할 것이다 …더군다나 일본은 겉으로 강한 듯하나 속으로는 메말라 조야가 어그러지고 정부 금고가 비어서 스스로를 꾀함에도 겨를이 없음에랴!"

자국의 강함을 완전히 자신하여 "일본이 만약 침략한다 해도 중국이 언제나 조선을 구해줄 수 있을 것이다"는 황준헌의 태도를, 물론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1880년대의 조선에서의 중국과 일본의 대결이 결국 어떻게 끝났는지 우리야 잘 알지만, 동시대인으로서 그 자그마한 일본이 노대국 중국을 쓰러뜨릴 수 있다고 보는 이들이 아주 흔치 않았습니다. 메이지의 개혁이 아직 시작에 불과했던 1880년은 물론, 1894년의 청일 전쟁을 앞두고는 대부분의 유럽 신문들이 중국의 승리를 의심치 않았습니다.

그런데 일본보다 러시아가 조선을 더 위협한다는 황준헌의 이야기를, 세계 정세에 어둡기로 유명했던 그 당시의 보수적인 유생마저도 믿으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황준헌의 주장들을 조목조목 비판하는 이만손 등의 1881년의 "영남만인소"(嶺南萬人疏: 『일본외교문서』 제14권 수록)를 보면, 일본이 딴 마음을 품을 것이 뻔한데, 조선과 본래부터 무관한 러시아를 "막기 위해서" 일본과 연대한다는 것이 도대체 웬말이냐고 따지는 것이 아닙니까? 우리가 위정척사파의 선비들을 보통 "완고한" 존재로 상상하지만, 이 경우에는 그들의 상황 판단은 중국의 개화파 황준헌보다 훨씬 정확했습니다.

그러나 조선 사회에서 엄청난 파장을 일으킨 『조선책략』이라는 소책자를 오늘날에 와서 다시 읽으면 미국 관련의 부분은 가장 묘한 느낌을 들게 합니다. 그 당시에 중국에서 제일 개명한 사람 중의 한 명으로 꼽혔던 황준헌의 텍스트의 몇 구절을 인용해 볼까요.

"미국은 민주와 공화로써 정치하기 때문에 남이 가지고 있는 것을 탐내지 않는다. 그리고 나라를 세울 당시에 영국의 학정(虐政)으로 말미암아 발분하여 일어났기 때문에 늘 아시아에 친근하고 유럽에 소원해왔다. … 그 나라의 강성함은 유럽의 여러 대국들과 함께 하지만 땅이 동, 서양 사이에 뻗쳐 있기 때문에 늘 약소한 자를 돕고 공의를 유지하여 유럽 사람으로 하여금 그 악을 함부로 하지 못하게 하고 있다. …이를 끌어들여 우방으로 삼음으로써 도움을 얻을 수 있고 재앙을 풀 수 있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연(聯)미국이라고 하는 것이다"

황준헌이 그린 그림은 어떻습니까? 허동현 교수님께서 좋아하시는 표현을 빌리자면, 꼭 호랑이에게 쫓겨 나무 위에 올라온 남녀 아이들을 구제하려고 하늘이 내려준 동아줄을 그린 것 같지 않습니까? 우리를 해칠 마음이 없을 뿐만 아니라 우리를 이롭게 하려고 우리에게 접근한 미국의 긍정 일변도의 초상화를 그려준 황준헌이 뚜렷한 목적 의식을 갖고 저술에 임한 것은 물론입니다.

그 당시 중국 외교의 책임자이었던 이홍장(李鴻章: 1823-1901)이 중국과 국경 분쟁을 일으키고 있었던 러시아를 우리의 속국 조선을 침략하려는 나라로 지목하여 조선의 대미 조약 체결을 가장 좋은 방아책(防俄策: 러시아를 막는 대책)으로 내놓은 관계로, 황준헌이 조선의 보수적인 지도층에게 대미 수교의 장점을 설득력있게 납득시킬 의무를 맡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 『조선책략』에서 러시아를 악마로, 미국을 동양의 수호 천사로 각각 그린 이유가 상부의 지시만이 아니었다는 겁니다. 당시의 중국의 외국통이었던 황준헌의 대미 의식은 정말 바로 그 흑백 그림의 수준을 크게 넘지 못했습니다. 그는, 실상 극동에서 상리(商利)만을 생각했던 미국의 거중 조정(居中 調停: 조약 체결의 상대 국가에게의 각종의 외교적 도움)의 궤변적, 형식적 약속을 진정한 것으로 오해하고 있었으며, 하와이 병탄, 필리핀 침략 등의 태평양 방면의 세력 확장을 꿈꾸었던 미국을 순진하게도 영토적 야욕이 없는 나라로 생각했던 겁니다. 청나라의 엘리트 외교관의 대미 의식의 이와 같은 수준을 생각해보면 청나라가 끝내 무너진 이유 중의 하나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3(낙시).jpg> 중ㆍ일ㆍ러 삼국의 한국을 둘러싼 각축전을 묘사한 삽화 @프레시안

청일전쟁의 발발(1894년)을 앞두고도 주일본의 중국 공사관에서 일본의 대륙 침략 계획을 까맣게 모르고 우리의 위엄을 과연 무시할 수 있으랴는 식으로 생각할 만큼 청나라 말기의 지배층은 밖의 세계를 철저하게 몰랐습니다. 결국 그 무지와 오해가 『조선책략』과 같은 책자를 통해서 조선에 옮겨와 미국에 가본 적도 없는 고종과 그의 대신들을 미국의 의리를 믿는 신미(信美)주의자로 만들어버렸습니다. 1905년에 미국의 대통령 루즈벨트가 고종의 애원을 무시하고 일본에 의한 한국의 보호국화를 적극적으로 지지하고 나서야, 황준헌이 심어준 신미주의의 뿌리가 드디어 본격적으로 흔들리기 시작했습니다. 한 마디로, 『조선책략』의 전달과 그 효과는, 우리에게 다시 한번 외국에 대한 정확한 정보의 중요성, 그리고 강대국에 대한 순진한 꿈의 위험성을 가르치는 셈이지요?

캄캄해진 오슬로에서 박노자 드림

***청ㆍ일의 침략을 막기 위해 러ㆍ미를 이용하려 했던 것 아닐까요?/허동현**

안녕하세요 박노자 선생님

저는 『조선책략』이 미국에 대한 잘못된 허상을 전파하고 친미파를 길러내는 발판 역할을 함으로써 미국이라는 제국주의 국가에게 침략의 길을 열어준 "트로이 목마"였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조선왕조의 위정자들에게 정글의 법칙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살아남을 방법을 알려준 판도라의 상자 속에 마지막으로 남아 있던 희망이었다고 봅니다. 『조선책략』이 제기한 두 가지 생존전략, 곧 주변 열강들 사이에 힘의 균형을 만들고(대외적 균세론, 均勢論) 부국강병을 도모하라(대내적 자강론, 自强論)는 전략이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하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물론 선생님 지적대로 이 책에 담긴 영토 확장욕에 불타는 야만국 러시아, 약소국 편에 서는 부강하고 공평무사(公平無私)한 미국의 이미지는 황준헌이 청국의 이해에 맞춰 날조ㆍ왜곡한 흑백사진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저는 유학까지 다녀 온 황준헌이나 당시 청국 지도부의 지적 수준이 실질적 구속력이 없는 미국의 외교적 수사를 진심으로 받아들일 만큼 저급했다거나, 조선사람들이 그처럼 왜곡되어 있는 남의 눈을 통해서만 세상을 보았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고종을 위시한 조선정부도 직접적인 정보수집을 통해 러시아의 남침 가능성에 대해 검증하기 위한 노력을 전개한 바 있습니다.

황준헌이 『조선책략』에서 제기한 균세론ㆍ자강론의 배후에는 중국이 조선 개화의 옹호자 혹은 인도자라는 의식이 깔려 있었을 뿐 아니라, 조선에 개방을 촉구하고 서양 문물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일 것을 권유한 이면에도 정치ㆍ경제적으로 중국의 영향력을 증대하려는 의도가 크게 작용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는 역으로 중국에 의해 침략세력이라는 이미지로 소개되었던 러시아도 중국이 조선에 대한 실질적 위협세력이나 참략자로 판명났을 때에는 이들을 견제해 세력균형을 이룸으로서 조선의 독립을 보장해 줄 수 있는 조선 독립의 옹호자로 그 역할이 바뀔 수 있다는 말도 됩니다. 실제로 조선정부는 중국에서부터 의도적으로 유입된 러시아 위협론에 맹목되지 않았으며, 자신이 수집한 정보를 바탕으로 조선을 둘러싼 열강간의 세력균형을 이루는 데 동원할 수 있는 가능성을 계속 타진해 온 바 있습니다.

『조선책략』이 전해진 이후 조선정부는 러시아 사정에 밝은 인물을 1880년말에 신설된 통리기무아문(統理機務衙門)에 배치하고 1881년초에 일본에 파견된 조사시찰단(朝士視察團, 소위 신사유람단)의 조사(朝士)들에게도 러시아를 비롯한 주변국들의 침략 가능성에 관한 정보를 수집하여 보고하도록 했습니다. 대다수 조사들은 일본 시찰을 통해 일본처럼 부국강병에 성공하는 것만이 일본이나 러시아의 침략을 막을 수 있는 최선의 대책이라고 보았습니다. 약육강식의 춘추전국 시대보다 더 생존경쟁이 치열한 시대에서는 오직 부국강병의 실현만이 국가의 생존을 보장해 줄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지요. 일례로 조사 어윤중(魚允中, 1848~1896)은 당시 국제정세가 "러시아에는 내부 변란[니콜라이 2세의 암살]이 있고 프로이센과 프랑스도 서로 견제하고 있는 때"이므로 조선으로서는 부국강병을 이룩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고 판단하고 "힘을 다해 미리 면밀하게 준비하여 부강을 이루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한 바 있습니다.(어윤중, 『수문록(隨聞錄)』. 특히 어윤중이 수집한 정보에 의하면 당분간 러시아가 조선으로 침략할 가능성이 거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실제로 당시 조선인들은 러시아의 위협이 과장된 것임을 보여주는 정보도 접하고 있었습니다. 이는 1884년 6월 23일자 『한성순보(漢城旬報)』에 실려 있는 다음과 같은 기사를 통해 알 수 있습니다.

"러시아의 수도에서 훈춘(琿春)까지는 서(西)로든 동(東)으로든 수만리의 거리며 중간에 동서백리아(東西伯利部, 동부시베리아)가 황막(荒漠)하여 끝이 없으니 서쪽으로부터 군사를 움직이려고 하면 결코 성공하기 어려울 것이고 동부에는 비록 병사가 있으나 충분하지 못하니 러시아가 비록 침식하고 싶은 뜻이 있더라도 다른 날을 기다릴 것이라 결코 지금 싸움을 벌이지는 않을 것이다.… 러시아가 비록 고려를 넘어다본다 하여도 동부의 힘으로는 병탄하기에 부족하고 서부의 병사는 또 실어 나르기가 쉽지 아니하니 실지는 중국의 길림ㆍ흑룡강 두 선(省)을 도모하려는 것처럼 뜻은 있어도 이루지 못하는 것과 한가지다. 더욱이 고려는 현재 미국과 이미 통상을 하였고 또 영국과도 조약을 맺었으며 그리고 중국의 도움을 받을 수 있고 일본의 후원이 있으니 러시아가 어찌 감히 사지(私志)를 드러내겠는가."

오히려 러시아는 조선을 둘러싼 열강간의 세력 균형을 이루는데 필요한 존재로 인식되었으며, 김옥균(金玉均, 1851~1894)ㆍ박영효(朴泳孝, 1861~1939) 등 개화파 인사와 고종은 러시아와의 수교를 위해 독자적인 노력을 기울여 왔습니다. 즉 이들은 임오군란 이후 부차적 제국주의(secondary imperialism) 세력으로서 중국의 간섭이 점점 노골화하자 중국이 가장 두려워한다고 본 러시아와 수교함으로써 조선의 독립을 옹호해 줄 세력으로 끌어들이려 했습니다. 즉 이들은 임오군란 이후 일본에 파견된 수신사절로 일본에 갔을 때 주일 러시아공사 로센(Romananovih R. Rosen)과 만나 수교를 위한 교섭을 전개한 바 있습니다. 특히 김옥균은 1884년초에도 주일 러시아 공사 다비도프(Alexandre P. Davydow)에게 조약체결 의사를 표명한 바 있으며, 고종도 김관선을 노브키예브스코(Novokievskoe)로 보내 러시아 관리에게 수교의사를 전달한 바 있었습니다. 마침내 서울로 들어 온 천진(天津) 주재 러시아 영사 웨베르(Carl Waeber)는 1884년 윤 5월 15일 전격적으로 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갑신정변 실패 이후 중국의 간섭정책이 더욱 심해지자 고종은 이른바 조로밀약(朝露密約)을 추진하는 등 인아책을 적극 구사하기 시작했지요. 고종과 그 주변세력들이 청국 견제를 위해 러시아를 이용하려 했었음은 1885년 7월 2일자(음력) 윤치호(尹致昊, 1865~1945)의 일기에서도 확인 할 수 있습니다.

"이날 일본 신문을 보니 '조선정부에서 러시아 정부의 요구에 응하여 제주의 조차를 허락하였다'고 하였다. 또 '조선과 러시아가 맺은 내약(內約)에 러시아의 보호를 부탁하였다'고 하였다. 이를 비록 믿을 수 없다 하더라도 또한 믿을 단서가 있는 것이다. 2, 3년전 조정 내에서 일찍이 이런 논의가 있었던 까닭이다."

그러면 당시 인아책을 구사했던 인아론자(引俄論者)들은 누구였을까요? 고종의 측근이었던 민영익(閔泳翊, 1860~1914)과 한규직(韓圭稷, ? ~1884)이 바로 그들입니다. 민영익은 보빙사(報聘使)로 미국과 유럽을 다녀온 후 고종에 복명하면서 "유럽에서는 특히 러시아가 강대하며 유럽 여러 나라는 모두 러시아를 두려워합니다. 그리고 조만간 러시아가 아시아로 침략의 손을 뻗쳐 조선에도 그 영향이 미칠 것이니 우리 나라 입국(立國)의 근본정책은 일본이나 청국만 상대할 것이 아니라 한 걸음 더 나아가 러시아의 보호를 받도록 하는 것이 상책입니다"라고 고종에게 헌책한 바 있었습니다(김도태, 『서재필 박사 자서전』, 수선사, 1948). 민씨 척족정권의 중요인물 중 하나이자 경흥부사를 역임한 한규직도 다음과 같이 인아론을 제기한 바 있었지요. "일본은 청과 러시아를 의식하여 감히 조선을 병탄하지 못하지만 늘 침략하고자 하는 뜻을 가지고 이으며, 청은 다른 나라가 조선을 점령해도 힘이 부족하여 조선을 보호하지 못할 것이지만 조ㆍ일간의 조약에 문제가 있으면 '감국제권(監國制權)'하려고 할 것이며, 러시아는 세계 최강국으로 세계가 두려워 하지만 조선과 더불어 도울 수 있다(『淸季中日韓關係史料』4, 도서번호 999)"고 말이지요.

1880년대 이전 러시아는 중앙아시아와 발칸반도 경략에 몰두하였으며, 새로 개척한 극동지역 쪽으로의 육로 교통망도 갖추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조선에 대한 영향력 확대를 적극적으로 기도하지 않았던 것이 사실입니다. 러시아가 조선을 둘러싼 국제정치 무대에서 대해 눈에 띠는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은 1884년에 일어난 갑신정변의 결과 조선의 대내외 정치에 대한 중국의 적극적 간섭이 가해진 후부터이며, 조선을 둘러싼 각축전에 능동적으로 개입해 괄목할 역할을 수행하는 것은 1895년 삼국간섭으로 일본을 굴복시킨 다음부터의 일이었습니다. 중국 등 주변국을 통해 감염ㆍ이입된 공로증적 러시아 인식은 한ㆍ러관계의 진전과 한반도를 둘러싼 열강의 역관계 변화에 따라 러시아를 조선 독립의 옹호자로 이용하려는 인아책이 수립ㆍ추진되기에 이르렀던 것이지요.

<4(북경함락).jpg> 영ㆍ불연합군에게 함락된 북경 @프레시안

한마디로 1860년 북경함락 이후 중국이나 조선은 자력만으로는 적대세력을 막을 수도, "힘의 균형(balance of power)"을 도모할 수도 없었습니다. 따라서 렌슨(George Alexander Lensen)의 지적처럼, 이홍장(李鴻章, 1823~1901)이나 고종이 이이제이(以夷制夷)라는 전통적 외교 술책에 의존하는 "책략의 균형(balance of intrigue)"을 꾀하였다고 보는 것이 보다 합리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조선왕조가 힘의 논리가 지배하는 세상에 뛰어든 1876년이래 국권을 빼앗긴 1905년까지 30여년간 명맥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도, 열강의 각축 속에서 주권을 지키기 위해 도모한 책략이 유효했기 때문 아닐까요.

사실 조선 정부는 개항 이후 줄곧 러시아의 침략성을 강조하는 청ㆍ일 두 나라의 러시아 위협론을 맹종했다기보다는, 러시아를 두려워하는 이들 두 나라를 견제하는 데 러시아를 이용하려 했습니다. 1884년 갑신정변 실패 후 러시아를 끌어들여 더욱 거세진 청국의 압력을 견제하려 한 "인아거청책(引俄拒淸策)"이나, 명성황후 시해 사건 이후 일본의 독주를 견제하기 위해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거처를 옮긴 아관파천(俄館播遷)이 그 대표적 사례입니다.

어떻게 보면 한 세기 전 한반도를 열강의 즐거운 "이권 사냥터"로 만들었던 조선정부의 이권 양여 정책도 이러한 이이제이에 입각한 균형의 책략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마치 오늘날 이라크정부가 미국을 견제하기 위해 프랑스와 독일에게 유전개발권을 준 것처럼 말이지요.

그렇다면 경부ㆍ경인 철도 부설권과 운산 금광 채굴권 같은 노른자위 이권을 미국에게 준 이유가 단지 순진하게 미국의 "의리"를 믿은 때문일까요? "천상천하 유아독존" 격으로 제국의 오만을 과시하는 현재의 모습과 달리, 백년 전의 미국은 선생님 말씀대로 "상리"만 쫓는 2류국가에 불과했습니다. 국제정치에서 차지하는 위상도 지금과 전혀 달랐지요. 그런데 개화기의 조선사람들은 왜 그런 미국에게 일방적인 짝사랑을 퍼부었을까요? 그 주된 이유를 당시 열강들이 조선에 대해 갖고 있던 이해의 크기와 소재―영토적 야욕, 전략적 동기, 경제적 이익, 문화적 욕구―에서 찾아봅시다.

<5(삽화).jpg> 1895년 청ㆍ일 전쟁에 종군했던 프랑스 언론인 조르주 비고(Georges Bigot.1860~1927)가 파리로 돌아간 1899년 찍어낸 그림엽서 세트. 중ㆍ일ㆍ러 삼국의 한국을 둘러싼 각축전을 묘사하고 있다. 그림의 제목은 '조선을 둘러싼 일ㆍ청ㆍ러'(上), '러시아와 싸우라고 일본의 등을 떠미는 영국과 미국'(下). @중앙일보

먼저 청국은 순망치한(脣亡齒寒). "입술이 없으면 이가 시리다"는 말처럼, 조선이 자국에게 위협적인 러시아ㆍ영국ㆍ일본 같은 나라의 영향권에 들어가지 못하게 막으려는 전략적 동기를 갖고 조선을 종속시키려 했습니다. 일본은 상품 판매 시장과 원료 공급지 확보라는 경제적 이익과 영토적 야욕, 그리고 러시아와 같은 적대세력의 한반도 장악을 막으려는 전략적 동기로 침략하였습니다. 러시아는 태평양 진출에 필요한 부동항을 얻으려는, 영국은 중국 무역과 인도 경영에 위협이 되는 러시아의 부동항 확보를 막으려는 전략적 목표가 있었고, 프랑스와 미국은 천주교와 기독교를 포교하려는 문화적 욕구가 있었습니다. 미국은 여기에다가 고래잡이와 무역 같은 경제적 이익도 노렸지요.

재미있는 것은 자본주의가 고도로 발달한 최강대국 영국이나 프랑스 같은 진짜 제국주의 국가들은 조선에 큰 욕심이 없었고, 후발 제국주의 국가인 러시아와 미국은 그다지 절실하지 않은 전략적ㆍ경제적 동기만 갖고 있었던 데 비해, 제국주의라고 할 수도 없는 "부차적(secondary) 제국주의" 국가인 청ㆍ일 양국은 조선에 매우 절실한 이해가 걸려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 가운데 조선 정부는 청국과 일본의 침략을 막기 위해 러시아와 미국을 이용하려 했던 것 아닐까요? 지금의 미국이 동아시아 지배를 위해 한국에서 추구하는 전략적 동기를 그때의 미국은 갖고 있지 않았던 것이지요. 이것이 당시 한국인들이 미국을 짝사랑한 진짜 이유가 아닐까요?

오늘의 우리가 『조선책략』에서 얻을 교훈은 자력 없이 남의 힘을 이용하는 책략만으로는 다시 돌아온 열강 각축의 시대를 뚫고 나갈 수 없다는 것이겠지요. 현명한 책략과 견실한 자강, 이것이 먹이를 노리는 포식자들의 다툼에서 우리의 번영과 양심을 지켜줄 방패일 겁니다.

개나리와 진달래가 꽃망울을 터뜨리는 수원에서

허동현 드림

<필자 사정으로 10회는 21일에 게재됩니다.>

***더 읽어 볼 만한 책**

유영익. 「조미 조약의 성립과 초기 한미 관계의 전개」. 『한국근현대사론』, 일조각, 1992.
송병기 편역. 『개방과 예속』. 단국대학교출판부, 2000, (『조선책략』번역문)
권석봉. 『청말대조선정책사연구』 일조각, 1986.
동덕모. 「한국의 개국과 국제 관계」. 서울대학교 출판부, 1980, (1882년의 조미수호통상조약의 텍스트).
Deuchler, Martina. Confucian Gentlemen and Barbarian Envoys : The Opening of Korea, 1875~1885. Seattle and London : University of Washington Press, 1977.
Kamachi, Noriko. Reform in China: Huang Tsun-hsien and the Japanese Model. Cambridge, Mass. and London : Harvard University Press, 1981.
Conroy, Hilary. "Chosen Mondai: The Korean Problem in Meiji Japan." Proceedings of the American Philosophical Society 100:5 (October 15, 1956): 443-454.
Iriye, Akira. "Japan's Drive to Great-Power Status." In Marius B. Jansen, ed. The Cambridge History of Japan, volume 5: The Nineteenth Century.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89.
Kim, Dal Choong. "Chinese Imperialism in Korea: With Special Reference to Sino-Korean Trade Regulations in 1882 and 1883." Journal of East and West Studies 5:2 (October 1976): 97-110.
Kim, Key-Hiuk. The Last Phase of the East Asian World Order: Korea, Japan, and the Chinese Empire, 1860-1882. Berkeley: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1980.
Kim, Key-Hiuk. "The Aims of Li's Policies toward Japan and Korea, 1870-1882." Chinese Studies in History 24:4 (Summer 1991): 24-48.
Kim, Key-Hiuk. "The Aims of Li's Policies toward Japan and Korea, 1870-1882." In Samuel C. Chu and Kwang-Ching Liu, eds. Li Hung-chang: Diplomat and Reformer. Armonk, NY: M.E. Sharpe, 1993.
Kim, Key-Hiuk. Opening of Korea: A Confucian Response to the Western Impact. Seoul: Institute for Modern Korean Studies, 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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