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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 라덴과 최익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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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빈 라덴과 최익현

박노자ㆍ허동현의 서신 논쟁-'우리안 100년 우리밖 100년' <4>

***"두 전통 엘리트의 보수적 자구책 강구는 자연스러운 모습 아닌가요?/박노자**

허동현 교수님, 안녕하십니까?

작년 11월 24일자 <옵서버(The Observer)>라는 영국 일간지에서 소위 미국인에게 보내는 빈 라덴의 편지라는 문건이 나왔습니다. 빈 라덴 본인이나 그 측근들이 적성한 것으로 추측되는 이 문건의 집필 의도는, 이슬람 운동가들의 대미(對美) 성전(聖戰: 아랍어로 지하드)의 이유와 목적을 설명해주는 것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 문건을 유심히 읽어보면, 한국사 속에서의 어떤 에피소드를 꼭 방불케 하는 듯한 느낌을 자꾸 줍니다. 예컨대, 다음과 같은 단락을 보시지요.

"당신네들은 우리의 석유를 헐값으로 우리로부터 탈취하고 있다. 당신네들의 무력과 협박으로 이루어지는 이 불공평한 거래는 세계사 상의 가장 큰 도둑질 중의 하나다. (…) 우리의 종교인 이슬람은 (…) 자비와 정의와 성실함과 염치와 청결과 근엄의 믿음이다. 우리들이 당신네들에게 이슬람으로 귀의할 것을 촉구한다. [귀의하지 않는다 해도], 일단 당신네들의 억압과 거짓과 음행 등을 즉각 정지하라! 예의, 원칙, 염치, 청결의 인간이 되라! 사음(邪淫), 동성연애, 마약 복용, 도박, 그리고 고리대업 등의 사악에 더 이상 빠지지 말라! 안타까운 사실이지만, 지금 상태에서의 당신네들의 문명이 인류 사상 최악의 문명이다. (원문 참조: http://www.observer.co.uk/worldview/story/0,11581,845725,00.html )."

<사진 1> 오사마 빈 라덴 (Osama bin Laden, 1957(?)~ ) 이슬람 지도자, 알 카에다를 이끌며 미국에 대한 '성전'을 외치고 있다.< 1(빈라덴).jpg> 프레시안사진

이와 같은 사상을 가진 이들을 우리가 보통 별 생각도 없이 이슬람 근본주의자라고 부르지 않습니까? 사실 근본주의자라는 용어만큼 이슬람을 충실히 실천하려는 이들에 대해서 쓰지 말아야 할 말은 없을 겁니다. 그들을 이슬람의 열성 분자나 이슬람적 보수주의자, 전통주의자로 불러도 되지만, 근본주의라는 말은 그들과 너무나 어울리지 않습니다.

근본주의 (fundamentalism)이란, 19세기말~20세기초의 미국 기독교의 한 운동의 이름인데, 그 운동이 대개 성경의 무오류설과 예수의 재림, 예수의 천년 왕국, 그리고 신앙에 의한 기적(안수 치료 등)의 실재성을 주장하면서 최근에는 무시 못할 정치적, 경제적 기반을 다졌습니다. 미국의 기독교 근본주의자들이 이슬람을 불구대천(不俱戴天)의 적으로 알고 예수의 재림 이전에 기독교와의 대대적인 전쟁에서 이슬람이 소멸돼야 된다고 보기에, 지금 서방 국가 중에서 미국에서 유달리 이라크 전쟁을 지지하는 층이 비교적으로 많은 이유 중의 하나는 바로 그쪽에서의 기독교 근본주의의 만연입니다.

기독교 근본주의자들은, 자본주의의 발전 과정에서 점차 생존에의 위협을 더 많이 받는 소부르조아들을 주된 기반으로 삼습니다. 이와 반대로, 이슬람의 열성 보수주의자들 중에서 전통 엘리트나 귀족, 대자본가, 그리고 상당수의 지식인들이 포진돼 있습니다. 즉, 사회적인 지지 세력들이 미국의 근본주의자들과 사뭇 다른 모습을 보이지요. 과연 서구인들에 의해서 근본주의자라고 비칭(卑稱)되는 중동이나 북아프리카의 이슬람 단체들이 현실적으로 무엇을 지향하는가요? 이슬람의 전멸을 요구하는 미국의 기독교 근본주의자와 달리, 이슬람 단체들이 서구인의 이슬람에의 귀의를 환영하면서도 기독교 자체를 멸망시키려 하지 않습니다. 다만, 기독교권으로 분류되는 미국과 서구의 이슬람 지역에서의 약탈 행위(불평등 무역 등)와 이스라엘에 대한 지원을 중단하기를 요구할 뿐입니다.

그들이 보통 미국이나 서구 언론에 의해서 일률적으로 테러리스트로 서술되지만, 실제로 이집트의 Ikhwan al Muslimoon (『이슬란 형제의 공동체』)이나 파키스탄의Jamat-i-Islami (『이슬람 정당』)와 같은 굴지의 이슬람 정치 단체들이 의회 활동을 적극적으로 지향하면서 주로 민초들에 대한 갖가지 구휼(求恤) 사업―빈민에게의 식량품 조달이나 의료, 교육 봉사 등―을 전개합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그들은 이슬람이 요구하는 Zakat (빈민 구휼)의 의무를 다하는 겁니다. 즉, 기독교 근본주의가 현재의 "주류적" 온건 기독교와 이론이나 실천에서 대단히 달라 "별종"으로 취급되지만, "근본주의자"라고 잘못 불려지는 이슬람 단체들의 활동이 이슬람의 주류적 범주를 크게 벗어나지 않습니다. 다들 이론상으로 믿는 바들을, 그들이 몸으로 제대로 실천하는 것이 차이라면 차이지요. 그들이 정부의 부당한 탄압이나 외국의 침략을 당한다고 생각할 때에 응전(應戰)하는 것이 사실입니다.

예컨대, 빈 라덴이 "성전"을 선포한 동기는, 그가 침략으로 간주한 사우디 아라비아에서의 미군의 주둔이었습니다. 그러나, 전통 사회의 기둥이 되는 주류적 이데올로기에 충실하려는 이들이, 이질적 외래 문명의 불법적 침해를 좌시할 수 없는 도전으로 인식한 국면을, 우리가 우리 역사에서 과연 일찍 본 것이 아닙니까? 대원군 시대의 그 유명한 "洋夷侵犯(양이침범) 非戰則和(비전즉화) 主和賣國(주화매국)"이라는 말이 연상되지 않습니까?

<사진 2> 흥선 대원군 이하응(李昰應, 1867-1907) <2(대원군).jpg> 프레시안 사진

사실, 한국 역사를 공부하는 사람에게 빈 라덴의 문건이 굉장히 친숙한 무엇인가를 연상시키는 것 같지 않습니까? 저 같으면, 무엇보다 먼저 위정척사를 주장했던 선비들의 상소문이나 통문들이 생각납니다. 첫째, 헐값으로 석유를 파는 것이 아랍권의 자원 고갈과 빈곤을 가져다 준다고 보고 있는 빈 라덴처럼, 그들도 자원 고갈을 초래한다는 이유로 자본주의 열강들과의 통상을 반대하지 않았습니까?

<사진 3> 면암(勉菴) 최익현(崔益鉉, 1833-1906)<3(최익현).jpg> 한국역사정보종합시스템 사진

예컨대, 면암(勉菴) 최익현(崔益鉉, 1833-1906)이 도끼를 들고 백척 간두 일진보의 각오로 고종에게 1876년에 바쳤던 강화 조약 체결 반대 상소문 (소위 持斧伏闕斥和議疎: <면암집>, 제3권)에서 빈라덴의 주장과 놀라울 정도로 흡사한 언설이 보입니다.

"그들의 수공(手工) 생산품의 양이 무궁한 데에 반(反)하여 땅에서 나오는 우리 물화는 한(限)이 있는 것이다. 우리의 유한한 물화를 가지고 무한한 그들의 사치품과 바꾼다면, (…)우리 땅과 집들이 모두 황폐화돼 보존할 길이 없을 것이다."

<사진 4>『면암집』제3권<4(면암집).jpg> 한국역사정보종합시스템 사진

과연 틀린 말인가요? 1876년 이후의 곡물 수출이 쌀값 등귀와 봉건적 착취의 가중화를 초래해 조선 농민층의 분열, 빈곤화, 불만 누적, 그리고 결과적으로 동학 농민 운동의 하나의 원인이 됐습니다. 빈 라덴의 고국인 사우디 아라비아의 경우에는, 무제한적 석유 수출과 지배층의 석유 대금의 해외 은닉 등이, 증가된 인구에게 일자리를 제공해주지 못하는 석유 일변도의 기형적인 경제를 만들고, 결국 현재로서 석유 자원의 점차적 고갈과 20년 간의 일인당 국민 소득이 3분의 1로 저하되는 등의 빈곤화를 초래했습니다. 과정이야 다르지만, 자본주의가 발전되지 못한 주변부의 사회가 핵심부와의 불평등한 자원 무역으로 인해서 황폐화됐다는 필연적인 역사적 결과가 같은 셈입니다. 이 국가적인 비극을 앞두고 최익현과 빈 라덴이라는 두 명의 전통적 엘리트의 대표자가 보수적인 자구책을 강구하는 것이 과연 자연스러운 모습이 아닌가요?

그들의 두번째의 흡사한 점이라면, 두 사람이 거의 똑같은 말로 자본주의 핵심부의 비윤리성, 비도덕성을 질타하는 것입니다. 세번째로는, 그들이 미국인(빈 라덴) 내지 일본인(구한말 의병)의 섬멸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라기보다는, 반대편이 그들의 윤리적인 가치에 귀의하여 예의, 염치, 청결(빈 라덴)이나 인의예지(구한말 의병)의 정신을 되찾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대표적으로, 경남의 유병한 의병장 서병희(徐丙熙)가 1909년에 한국 주재의 일본 상인들에게 보낸 포고문을 보면, 동양의 돈후한 정의(正義)로 돌아와 침략성을 버리고 자기 나라를 지키고 동양의 친목을 도모하라는 호소가 담겨져 있지 않았습니까? 전통 사회의 구성원다운 빈 라덴의 이슬람적인 종교적 보편주의와 위정척사 운동의 유교적인 윤리적 인류 보편주의가 서로 그렇게 먼 사이에 있지 않는 것 같습니다.

<사진 5> 전국의 유생과 농민 등이 참여한 1900년대의 의병 모습<5(의병).jpg> 한국역사정보종합시스템 사진

서로 그토록 비슷한 빈 라덴과 의병 지도자들의 고민들도 다 이해할 수 있을 것 같고, 일단 귀의한 적대자를 우리의 일부분으로 대접하려는 그들의 너그러운 마음가짐도 인간적으로 동감을 불러일으킵니다. 그러나, 우리의 것을 무조건 지키자는―100년 전의 조선 같으면 별 승산이 없었던―그들의 방침은, 지금 같은 경우에 과연 현실적으로 어느 정도 승산이 있는가요? 그리고 현대 자본주의의 도전과의 비타협적인 그들의 투쟁은, 과연 그들의 사회 내부에서 또 다른 억압과 배제를 의미하지 않는가요? 그들의 동기를 이해하면서도, 그들의 행동에 전폭적인 지지를 웬지 보내기가 힘들지 않습니까?

그러한 물음들을 떨쳐낼 수 없지만, 그들의 살신성의(殺身成義)의 정신에 그들과 다른 의견을 가진 사람들이 자주 감복됩니다.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에피소드이지만, 최익현이 1905년3월에 상경하여 상소로 탐관오리와 역적의 토죄(討罪)를 요구했을 때, 위정척사와 애당초 무관한 윤치호 같은 근대주의자도 그의 정직함과 용감한 행실에 감탄을 금치 못했습니다. 이념적으로 자신과 완전히 이질적이었던 최익현에 대해서 윤치호가 그 때 『일기』에서 다음과 같이 적었습니다.

"최익현이라는 위대한 원로가 황제에게 (…) 그 잘못된 정책을 바로 잡으라 상소하였다. 황제는 갖은 방법으로 직언을 하는 그에게 귀향을 권고, 유도하였다. 그러나 최익현은, 자신의 충고대로 실천하지 않는 한 서울을 떠나지 않겠다고 무조건 거절하였다. 황제는 그에게 경기 관찰사의 관직을 제안했지만, 최익현이 그것을 받아들이는 대신에 황제에게 가혹하리만큼 솔직한 상소를 올려 (…) 국정을 바로 잡지 않으면 이웃의 적국이 곧 나라를 삼키겠다는 사실을 밝혔다.(…) 결국 일본 공사관이 3월10일에 이 원로의 처벌을 요구하여 한국 정부가 처벌하지 않으면 자신들이 벌을 내리겠다고 위협했다. 의도적으로 시간적 여유를 주지 않았던 셈이었다. 황제는 물론 이 요구에 반응하지 않았기에, 일본 헌병들이 11일에 최익현을 체포하여 그 본관에 입송했다. 그 위대한 원로가 일본 공사 하야시 곤스케(林權助)나 주한 일본 사령관 하세가와(長谷川好道)에 대해서 '하야시란 놈, 하세가와란 놈 보자'라고 면회를 요구했다. 50년 동안의 충직한 관직 경력이 뒷받침해주는 그의 용감함은 그를 체포한 일본인들마저 감복시켰다. 그는 일본인으로부터 음식을 받아먹기를 거부하였다. 결국 13일에 일본인들이 그를 고향으로 호송하여 보내야만 했다. (…) 헌병의 다카야마(高山) 소령이 감동을 받아 한국에 그러한 사람이 50명이라도 있었으면 그 독립이 공연한 말 이상의 무엇인가를 의미했을 것이다라고 이야기했다 (…) (『윤치호 일기』, 권6, 1905년 3월 21일)."

윤치호에게는 최익현의 용감한 행동도 감동스러웠지만, 탐관오리를 처벌하기를 요구하는 그의 생각도―비록 완전히 이질적인 다른 이데올로기에 바탕을 두는 생각이었지만―합리적으로 보였던 모양입니다. 보수라는 말은, 기득권의 보존과 기존 가치 체제의 보존이라는 두 개의 상당히 다른 의미를 가질 수 있지만, 최익현의 보수는 사회적 공감을 일으킬 수 있는 가치에 집중됐기에, 윤치호와 같은 사람으로부터조차 존경을 받을 수 있지 않았습니까? 현재의 이슬람의 열성적 보수주의자들에게도 이와 같은 가치 보수의 색깔이 보이는데, 현재 한국에서 보수를 자칭하는 사람들 중에서 자신의 가치를 위해서 목숨을 바칠 사람이 몇 명이나 되겠습니까? 가치보다 기득권을 중심으로 한다는 것이, 한국의 소위 보수의 최대의 약점이 아닌가 싶습니다.

안개가 짙은 오슬로에서 박노자 드림

***"그들이 지키려 했던 것은 시대착오적 구체제가 아니었을까요?"/허동현**

반갑습니다. 박노자 선생님

저도 빈 라덴과 의병지도자들의 도덕주의와 지사 정신에 공감합니다. 그러나 저는 조선시대의 의병과 오늘날의 빈라덴을 동일선상에 놓고 평가할 수는 없다고 봅니다. 총칼을 앞세운 서구 근대가 잔혹하다 하여 그 방법의 여하에 관계없이 폭압적 근대에 저항한 세력 모두에게 동감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적국 사람이라 해서 적들이 그렇게 했다 해서 민간인과 민간 시설을 공격대상으로 삼은 빈라덴과 우리의 의병과 독립운동가들을 동일시할 수는 없다고 봅니다.

<사진 6> 윤봉길(尹奉吉, 1908~1932)이 1932년 자필로 쓴 애국단 입단 시 선서문<6(윤봉길자필애국단선서문).jpg> 한국역사정보종합시스템 사진

적어도 의병은 고립무원(孤立無援)의 상황 속에서 절대 강자에 대한 승산 없는 투쟁을 감행하면서도 적국의 인민 전체를 겨냥하지는 않았지요. 그리고 한국 독립운동 시기의 의열(義烈)투쟁도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자면 테러리즘의 범주에 속하겠지만, 한번도 민간인을 공격 대상으로 삼은 적은 없었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습니다. 그 때 그들은 일제의 군경과 군사시설물, 그리고 침략에 책임이 있는 자들만 응징했다는 점에서 인류 공통의 양심과 보편적 도덕을 헤치지 않았다고 봅니다.

<사진 7> 황현(黃玹, 1855~1910)<7(황현).jpg> 한국역사정보종합시스템 사진

조선왕조가 종언을 고하던 무렵 뜻 있는 선비들은 두 가지 길을 택했습니다. 하나는 "나라가 망하면 [유교의] 도 또한 망한다(國亡而道亦亡)"는 생각에서 의병을 일으켜 일본에 저항하거나 자결하여 지조를 지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나라가 망해도 도는 망하지 않는다(國亡而道不亡)"는 생각에서 숨어살며 공자와 맹자의 가르침을 지키거나 것이었습니다. 전자의 입장을 택한 황현(黃玹, 1855~1910)이 국망의 비보를 접하고 자결하며 남긴 절명시(絶命詩)를 읽어보면 그들의 고뇌를 조금은 짐작할 수 있습니다.

"새와 짐승은 슬피 울고 바다와 산도 찌푸리네(鳥獸哀鳴海岳嚬)
무궁화 피는 세상은 이미 사라졌는가(槿花世界已沈淪).
가을 등불 아래 책을 덮고 옛일을 회상하니(秋燈掩卷懷千古)
인간 세상에 지식인 노릇이 정녕 어려워라(難作人間識字人)."

<사진 8> 황현이 남긴 절명시<8(절명시).jpg> 한국역사정보종합시스템 사진

***지행합일(知行合一)과 멸사봉공(滅私奉公).**

그가 어렵다고 토로한 지식인 노릇은 어떤 것일까요? 초야에 묻혀 살았던 그는 사실 국망에 대한 책임을 지고 자결할 만큼 왕조의 혜택을 입은 바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왜 그는 죽음을 택했는지, 그가 자식들에게 남긴 유서를 볼까요.

"나는 죽어야 할 의리는 없지만, 다만 국가가 선비를 기른 지 5백 년이 되어 나라가 망하는 날 한 사람도 난국에 죽지 않는다면 오히려 애통하지 않겠는가. 나는 위로 황천(皇天)이 내려준 아름다움을 저버리지 않고 아래로 평소에 독서한 바를 저버리지 않기 위해 기리 잠들고자 하니 진실로 통쾌한 줄 알겠다."

자신이 평생 닦은 학문과 신념을 죽음으로 지킨 유교적 지식인 황현의 삶과 정신은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귀감으로 다가옵니다. "천자라 하더라도 선비의 몸은 죽일 수 있지만 선비의 뜻을 빼앗을 수 없다(省齋集』권 34-10)"는 유중교(柳重敎)의 말은 선비들의 드높은 기개가 어떠했는지 잘 알려주는 것 같습니다.

사실 암울한 군사독재의 시절 한국사회의 민주화를 꿈꾸며 문자 그대로 몸과 목숨(身命)을 바친 학생운동가나 사회운동가들이 보여준 선구자적 사명의식과 순교자적 지사정신은 조선시대 선비들의 도덕주의적 지사ㆍ선구자 정신을 이어받은 것이기도 합니다. 자신이 사회에서 누린 기득권의 크기에 상응하는 도덕적 책무를 다하는 소위 "노블리스 오블리제(noblesse oblige)"를 굳이 언급하지 않아도 선비들의 올곧은 지사 정신은 오늘날까지도 보수를 자처하는 많은 사람들에게 진정한 보수가 무엇인가를 보여주는 거울로 빛나고 있다고 봅니다. 저 또한 우리의 의병들이 보인 고결한 기개와 자긍심, 약자와 패자임에도 불구하고 적에게 굽히지 않는 불굴의 지조, 자신의 삶을 사적인 데 국한하지 않고 공적인 영역으로 확대하여 임하는 멸사봉공의 정신 등이 천민자본주의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의 이기심과 탐욕을 정화해 줄 소금으로 기능한다는 데 선생님과 생각을 같이합니다.

그러나 자신들의 명분과 가치만을 배타적으로 높이려 하는 이들의 태도가 자신들 사회 내부에서 억압의 기제로 작동하고 있다면, 동기가 아무리 순수하다 해도 그들의 행동까지 지지할 수는 없겠지요. 선생님 말씀대로 개화기에 농민들의 빈곤과 피폐는 제국주의 열강의 침탈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 보다는 내부의 봉건적 요인, 즉 조선왕조의 양반 지배체제가 갖고 있던 모순에 기인하는 바 더 컸지요. 왜냐하면 제국주의 열강들이 침략해 들어오기 이전인 세도정권기에 이미 민란이 빈발하고 있었던 데서 알 수 있듯이, 양반 지주들의 전횡과 착취가 동학농민봉기와 같은 농민 저항을 일으킨 주된 원인이었기 때문이지요. 1890년 후반 조선의 이곳저곳과 연해주로 넘어 간 월경민 마을까지 돌아 본 이사벨라 버드 비숍 여사의 다음과 같은 목격담은 많은 것을 이야기 해 줍니다.

"토착 한국인들의 특징인 의심과 나태한 자부심, 자기보다 나은 사람들에 대한 노예근성이, 주체성과 독립성, 아시아인의 것이라기보다는 영국인의 것에 가까운 터프한 남자다움으로 변했다. 활발한 움직임이 우쭐대는 양반의 거만함과 농부의 낙담한 빈둥거림을 대체했다. 돈을 벌수 있는 많은 기회가 있었고 만다린이나 양반의 착취는 없었다. 안락과 어떤 형태의 부도 더 이상 관리들의 수탈의 대상이 되지는 않았다. 이 곳 사람들에게 의미있는 것은 불안함의 원천인 부보다는 명예였다. 이곳에서 일하는 모든 사람은 평온할 수 있었다. …한국에 있을 때 나는 한국인들을 세계에서 제일 열등한 민족이 아닌가 의심한 적이 있고 그들의 상황을 가망없는 것으로 여겼다. 그러나 이곳 프리모르스크에서 내 견해를 수정할 상당한 이유를 발견했다. 이 곳에서 한국인들은 번창하는 부농이 되었고 근면하고 훌륭한 행실을 하고 우수한 성품을 가진 사람들로 변해갔다. 이들 역시 한국에 있었으면 똑같이 근면하지 않고 절약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들은 대부분 기근으로부터 도망쳐 나온 배고픈 난민들에 불과했었다. 이들의 번영과 보편적인 행동은 한국에 남아있는 민중들이 정직한 정부 밑에서 그들의 생계를 보호받을 수만 있다면 천천히 진정한 의미의 '시민'으로 발전할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을 나에게 주었다.(『한국과 그 이웃나라들』, 277쪽)"

<사진 9> 시베리아의 한국 이주민<9(이주민).jpg> 프레시안 사진

저는 유교 지식인들이 자신들의 신념과 도만이 아닌, 나라와 백성 전체를 지켜내야 할 방법을 생각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당시 지식인들은 자신의 어깨 위에 제국주의 열강의 침입을 막아야하는 반침략의 과제 외에도 자체 내의 봉건적 모순을 해결하려는 반봉건의 책무도 짊어졌어야 마땅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이 과연 자신들의 형제이자 동포인 농민들과 같이 살려했나요. 선비들은 농민들을 부보다 명예를 소중히 여기는 "시민"으로 만들 생각은 애초에 없었지요.

그렇다면 당시 선비들이 죽음으로 지키려 한 나라는 어떤 나라였을까요? 혹시 양반들만의 세상은 아니었을까요? 임금에게 올린 상소에서 그들은 항상 삼사(三司, 홍문관ㆍ사헌부ㆍ사간원)의 간관(諫官, 지식인)의 말을 경청할 것을 요구하곤 했지요. 이는 유생들의 권한 확대를 이야기 한 것이지요.

내수외양(內修外攘). 그들은 서양을 막는 구체적인 방안--무기 개발이나 군사력 증강--을 강구하기보다는, 이상적인 왕도정치를 펼치기만 하면 서양의 침략은 저절로 막을 수 있다고 보았지요. 그러나 이들이 "외양"을 핑계로 지키려 한 것은 흔들리는 양반지배 체제는 아니었을까요? 혹 이상적인 왕도정치란 양반만이 정치적ㆍ경제적 이익을 독점하는 세상, 남녀유별로 상징되듯이 남성이 지배하는 세상은 아니었을까요? "사람 위에 사람 없고 사람 밑에 사람 없다"는 평등과 인권 사상을 존중하는 오늘날 우리들이 그들과 생각을 같이 할 수는 없겠지요.

공자와 맹자의 가르침을 따르는 것이 인간세계가 추구할 목표라고 여겼던 선비들은, 중국에 청조가 들어선 이후 이제 나라다운 문명국은 조선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1881년 정부의 개화정책에 반대하다 처형된 홍재학(洪在鶴, 1848~1881)의 말을 들어볼까요.

"중국이 시궁창에 빠지자 온 세상에 짐승냄새가 풍긴 지 3백년이나 되었습니다. 한 줄기의 왕통이 우리 나라에만 붙어있는 것이 비유하면 온 세상에 겨울이 찾아왔을 때 큰 과일 한 개가 높이 달려서 생기가 나무 끝에 남아있는 것과 같으니 이것은 하늘땅이 애호하는 것이고 사람들이 소중히 여기는 것입니다. (…)어찌 삼천리 우리 옛 강토가 오늘에 와서 개돼지가 사는 곳으로 되고 5백년 공자ㆍ주자의 예의가 오늘에 와서 똥물에 빠질 줄을 생각했겠습니까?"

소중화(小中華). 어떤 사람들은 제국주의 열강의 침입에 맞서 싸울 것을 주장한 선비들을 주체성 있는 원(原) 민족주의자로 보아야 한다고 이야기합니다. 과연 그들이 지키고자 한 것이 "민족" 전체의 생존이었을까요? 조선의 선비들은 임진왜란 당시 조선왕조를 도와준 명을 중화의 진정한 계승자로 보았기에 명 천자를 모시는 만동묘(萬東廟)를 복구하자는 상소를 올리기도 했습니다. 이처럼 명 나라를 흠모하였다는 점에서 이들은 외세 의존적이었던 개화사상가들과 마찬가지로 사대적(事大的)이었고, 더구나 명은 현실 세계에 존재하지도 않았으니 관념적이기까지 했습니다. 설사 그들이 양반 지배질서만이 아닌 "민족"의 생존 터전을 지키려 했다한들, 타자와 함께 지구마을 시대를 살아가야 할 우리들이, 자기 문화만을 배타적으로 높이는 이들의 자존의식에서 무엇을 배울 수 있겠습니까?

오늘을 사는 우리들에게 자문해봅시다. "나물 먹고 물 마시고 팔을 베고 누워" 행복할 수 있겠습니까?" 안빈낙도(安貧樂道). 빈한함 속에서 도를 즐긴다는 선비들의 경제관은 검약을 미덕으로 삼는 질박한 자급자족의 경제체제에서 가능한 것이겠지요. 이러한 경제관은 상공업을 천시하고 농업을 중시하는 조선왕조의 전통적 경제관을 대변하는 것이자, 개화사상가들이 도입하려 한 자본주의 시장경제 체제와 정면으로 배치되는 것입니다.

저는 개항 이후 한국이 세계자본주의 체제의 주변부로 예속된 것이 숙명적인 과정이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거북이가 토끼를 이기는 일이 우화에서만 가능한 것은 아니니까요. 해방 후 한국이 산업사회에 진입할 수 있었듯, 개화기의 우리 선조에게도 기회는 있지 않았을까요? 저는 그때 우리 선조가 "시간의 경쟁"에서 뒤쳐졌을 뿐이라고 생각합니다.

선생님께서는 카터 에커트(Carter J. Eckert)나 브루스 커밍스(Bruce Cumings) 같은 미국학자들과 생각을 같이 하시나요. 조선후기의 사회ㆍ경제는 정체되어 있었기 때문에 자생적으로 근대로 갈 동력이 없었고, 해방 이후 한국의 산업화는 식민지 시대 일본에 의해 이루어진 물적ㆍ인적 토대를 바탕으로 해방 후 미국의 원조에 의해 종속적으로 이루어진 예기치 못한 성공이라고 말이지요.

<사진 10> Carter Eckert, Offspring of Empire: The Koch'Ang Kims and the Colonial Origins of Korean Capitalism, 1876-1945<10(제국의후예)> 프레시안 사진

<사진 11> Bruce Cumings, Korea's Place in the Sun: A Modern History<11(양지의한국사).jpg> 프레시안 사진

물론 저 역시 겉으로 표방한 명분과는 달리 석유와 영토를 탐한 미국 우파나 일본 제국주의자들에게 면죄부를 주려는 생각은 추호도 없습니다. 다만 빈 라덴과 의병지도자들이 그들의 상대보다 도덕적이라 해서, 혹은 약자나 패자라는 이유로 그들의 잘못까지 모두 감싸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들 역시 자신들이 중요하게 여기는 가치(알라/공자와 맹자)만을 고집해 상대를 배척한다는 점에서, 신에 대한 믿음이나 사람들의 의지가 무기보다 더 중요하다고 보는 전쟁관을 갖고 있다는 점에서, 그리고 자급자족 경제체제 유지와 지식인들만의 권력 독점을 꿈꾼다는 점에서 시대착오적인 몽상가들일 수도 있지 않을까요?

***더 읽을 만한 책**

1. 금장태. 『한국의 선비와 선비정신』. 서울대학교 출판부, 2000.
2. ―――. 『(증보판)한국근대의 유학사상』. 서울대 출판부, 1999.
3. 김도형. 『대한제국기의 정치사상연구』, 지식산업사, 1994.
4. 오영섭. 『화서학파의 사상과 민족운동』, 국학자료원, 1999.
5. 이사벨라 버드 비숍, 이인화 역. 『한국과 그 이웃나라들』, 살림, 1994.
6. 기전외(旗田巍: 하타다 타카시). 「의병장 최익현의 생애(일문)」. 『현암 신국주박사 화갑기념 한국학논총』. 동국대학교 출판국, 1985.
7. 이진표. 「면암 최익현의 위정척사론」. 『진산 한기두박사 화갑기념 한국종교사상의 재조명』하, 1993.
8. 김호성. 「면암 최익현 연구-창의와 평가-」. 『정치외교사논총』14. 한국정치외교사학회, 1996.
9. 오영섭. 「갑오경장~독립협회기 면암 최익현의 상소운동」. 『한국민족운동사연구』. 18. 한국민족운동사연구회, 1998.
10. 금장태. 「면암 최익현의 성리설과 수양론」. 『대동문화연구』 34. 성균관대학교 대동문화연구원, 1999.
11. 김석근. 「김옥균과 최익현: 19세기말 '개국'을 바라보는 두 시선」. 『한국정치사상의 비교연구』. 정신문화연구원, 1999.
12. Ahmad S. Moussalli. Historical dictionary of Islamic fundamentalist movements in the Arab world, Iran, and Turkey, Scarecrow Press, 1999.
13. Ahmed Rashid. Jihad : the rise of militant Islam in Central Asia, Yale University Press, 2002.
14. Tariq. The clash of fundamentalisms : crusades, jihads and modernity, Ali.: Verso, 2002.
15. Carter J. Eckert. Offspring of Empire: The Koch'ang Kims and the Colonial Origins of Korean Capitalism, 1876-1945. Seattle: University of Washington Press, 1991.
16. Bruce Cumings. Korea's Place in the Sun: A Modern History. New York: W. W. Norton, 19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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