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인화면으로
김태규 명리학 <20>
  • 페이스북 공유하기
  • 트위터 공유하기
  • 카카오스토리 공유하기
  • 밴드 공유하기
  • 인쇄하기
  • 본문 글씨 크게
  • 본문 글씨 작게
정기후원

김태규 명리학 <20>

위를 보아 아래를 살폈던 사람들 - 천문ㆍ역법 (1)

오늘은 동아시아 문화 중에서 천문(天文)과 역법(曆法)에 관한 얘기를 하고자 한다. 저번 글(醫易同源)에서 얘기했듯이 이번 글도 동아시아 문화의 기층에 음양 오행이 어떤 식으로 놓여 있는지를 밝혀보는 작업의 연장선상에 있다.

사기(史記)로 유명한 사마천의 얘기로 시작해보자. 사마천의 집안은 대대로 태사령(太司令)이라는 직책을 이어왔다. 태사령이란 직책은 ‘천문을 관장하고, 한해가 저물면 새 달력을 바친다. 국가의 제사나 장례, 결혼 등이 있을 때 길일을 택하거나 피해야 할 날을 임금에게 아뢴다. 그리고 국가에 좋은 징조나 나쁜 징조가 있을 때 이를 기록(掌天時星曆. 凡歲時將終, 奏新生曆; 凡國祭祀喪娶之事, 掌奏良日及時節禁忌; 國有瑞應災異, 掌記之)’하는 일이다. 여기에 나와있지는 않지만 태사령은 왕실 도서관도 관장했다.

태사령의 일을 좀 더 세분해서 살펴보자. 먼저, 천문과 역법에 관한 직책이다. 둘째, 국가의 중대사에 있어 택일을 한다. 셋째, 나라에 좋은 징조나 나쁜 징조가 있을 때, 이를 기록한다. 마지막으로 각종 서적을 관리하는 일이다.

약간 이상하지 않은가? 천문과 역법을 담당하는 직책이 국가의 중대사에 있어 날을 잡는 것과는 무슨 상관이 있는 것일까? 또 국가에 좋은 징조나 나쁜 징조를 기록하는 일은 천문이나 역법과 무슨 관련이 있는 것일까? 또 그런 직책의 사람이 무슨 도서관장 노릇을 하는 것일까? 그러나 이처럼 얼핏 일관성이 없어 보이는 일들이 사실은 하나의 일로 연관된다는 것을 이해하게 되면, 중국 문화와 동아시아 문화를 이해하는 데 있어 좋은 출발점이 될 수 있다.

이런 일들이 하나라는 것은 다음과 같은 연유에서다. 천문, 즉 하늘을 살피는 것은 오늘날과 같이 우주를 연구하고자 하는 목적보다 그것의 해석을 통해 인간 세상에 일어날 각종 상서로운 일들과 재해를 예측하고 대비하기 위함이었다. 재해에는 일식과 월식, 혜성의 출현, 홍수와 가뭄, 지진 등이 포함된다. 나아가서 가령 혜성이 어느 별 자리를 침범하면 세상에 변란이 일어날 징조로 해석되었다.

역법, 역시 일년의 시작과 끝을 측정하고, 일년의 순환이 확정되면 그에 따라 농사에 필요한 정보-파종하는 시기와 김매는 시기, 수확하는 시기 등등-를 제공할 뿐 아니라, 왕조의 일들을 기록하는 토대가 되기 때문이었다. 여기서 왕조의 일들을 기록한다는 것은 바로 역사의 영역이 된다. 그러기에 태사령의 직책에 있었던 사마천이 사기를 저술한 것은 우연이 아닌 것이다.

따라서 천문을 살피고 달력을 제정하다 보면, 거기에는 당연히 어떤 행사에 좋은 날과 기피해야 할 날들이 주어지게 된다. 소위 말해서 택일하는 일 역시 태사령의 직책이었다. 그런데 어떻게 해서 하늘의 일을 살피는 것이 인간의 일을 아는 단서가 될 수 있었던 것일까?

이는 임금이 정사를 바로 밝히면 하늘이 상서로운 징조를 보이고, 반대로 정사를 망치면 하늘이 그에 따른 재해를 내린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관념은 오늘날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흔히 장마나 가뭄이 오래 가면 농부들이 “이 모두, 대통령을 잘못 선출해서 그런 것이여”하는 넋두리를 늘어놓곤 하는데 바로 그같은 관념이다. 그래서 가뭄이 오래 계속되면 옛날 임금된 자는 “모두 내 부덕의 소치”라고 자탄하는 것이다. 이것이 미신이라고 단정짓기 전에 어떻게 해서 이런 관념이 대두되었는가를 살펴보자.

이러한 관념을 천인감응설(天人感應說)이라고 한다. 중국 한대의 대표적인 유학자였던 동중서(董仲舒)의 춘추번로(春秋繁露)라는 책에 잘 나타나 있다. 여기서 잠깐 동중서에 대해 언급할 필요가 있다. 공자나 맹자의 가르침은 춘추전국과 같은 경쟁의 시대에는 사실 아무런 소용이 없었고 인기도 없었다.

그런데 세상이 유방에 의해 통일되자 이를 음양 오행과 결합시켜 치세의 학문으로서 군주의 입맛에 딱 맞게 제시함으로써, 유학을 국가의 학문, 즉 관학(官學)으로 만들고 나아가서 유교라는 종교의 경지로까지 끌어올린 인물이 바로 동중서였다.

이때부터 공자는 별 볼일 없던 옛날의 학자에서 성인의 자리에 올라섰다. 동중서의 역할은 마치 이상한 사내 예수를 예수 그리스도로 만든 사도 바울의 그것이었다. 특히 동중서는 전국 말기에 지어진 것으로 생각되는 ‘춘추공양전’에 제시된 대일통(大一統) 사상을 크게 부각시켰고, 그로 인해 중국은 2천년 넘는 오늘날까지 하나의 중국일 수 있었다.

다시 돌아와서, 천인감응설은 음양 오행 사상이 동류감응(同類感應)의 원리에 근거하고 있기에 가능한 것이다. 같은 상(象)을 지닌 사물들은 서로 느끼고 반응하게 된다는 것인데, 하늘(天)과 인간의 하늘인 천자(天子)는 동류이니 서로 감응한다고 본 것이다.

그러니 천자의 행동거지에 하늘이 반응하게 되는 것은 당연한 이치라고 보았다. 천자가 부덕하면 하늘은 재해를 내리는 것이다. 김영삼 대통령이 아무리 잘 했어도 IMF사태를 통해 부덕 판정을 받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그래서 여전히 많은 것이다.

따라서 태사령이 하늘을 살피고 일식이나 월식, 홍수와 한해 등의 재이현상을 관찰하고 예측하는 것은 사실 하늘을 살핌으로써 천자의 정사가 잘 되었는지를 살피고, 여타 다른 불순세력에 의한 변란은 없겠는지 등등의 일을 내다보기 위함이었다. 동중서와 같은 시대를 살았던 사마천 역시 사기의 저술 동기를 '하늘과 인간의 관계를 구명하기 위한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그리고 하늘의 일을 살피는 것은 오랜 관측과 전문적인 지식을 필요로 했기에, 가전의 학술을 바탕으로 하는 전문직이었고 따라서 사마천의 집안은 한 왕조 이전인 진 나라 때부터 가업을 이어왔다. 사마천은 자신의 저술인 ‘사기’중의 ‘천관서’와 ‘역서’에서 천문과 역법의 원리를 체계적으로 저술하고 있으며, 그 이후 천문과 역법은 발전을 거듭하여, 전통시대 중국천문학의 가장 모범적인 체계라고 평가받는 진서(晉書) 천문지에 의해 정리되고 있다. 동시에 천문과 역법은 그 형성 과정이 황제를 정점으로 하는 중앙관료지배체제의 출현과 밀접한 연관을 맺는다는 것도 당연한 일이다.

따라서 천문과 역법을 담당하는 이가 국가의 중대사에 택일을 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 된다. 어찌 보면 이것이 더 본업에 해당된다. 또 왕조의 좋은 일과 나쁜 일을 기록하다 보면 그것이 바로 역사가 된다. 역사를 기록한다는 것은 결국 시간과 날짜를 벗어날 수 없는 것이고, 시간과 날짜를 다루는 일은 바로 역법에 관련된 일이다.

사마천의 아버지 사마담은 한 무제가 태산에 봉선 의식을 치르러 갈 때, 그 날짜를 정했다. 당시 봉선 의식이라는 것은 황제가 하늘과 땅으로부터 황제의 권위를 인정받는 의식으로서 어마어마한 비용이 드는 국가의 막중 대사였다. 수도였던 장안에서 태산까지의 길을 새롭게 보수하고, 곳곳에 임시거처인 행궁(行宮)을 세우고, 태산의 정상까지 돌계단을 새로 보수하는 등 대단히 많은 물자와 인력이 동원되는 거창한 일이고, 그를 통해 황제의 권위를 천하에 알리는 국가적 사업이었다. 그런데도 정작 봉선 의식에 참가하지 못한 사마담은 울화병이 생겨 세상을 떠났고, 그 자리는 당시 천하를 주유하던 아들 사마천이 이어가게 된다.

사마천이 맡은 태사령이란 자리는 어쨌든 상당한 권위가 있었기에, 흉노 전쟁에서 패장이 된 이릉(李陵)을 젊은 혈기로 감히 변호하고 나섰다가, 한 무제의 역린(逆鱗)을 건드리게 된다. 전설에 의하면 용의 목 부근에 나 있는 비늘 하나가 결이 반대로 나있어 이를 역린이라 하는데, 거기를 건드리면 용이 대노한다고 한다. 그리고 황제는 용에 비유되므로 이런 말이 유래되었다. 결국 죽음이냐 궁형이냐의 선택을 강요받은 사마천은 필생의 사업인 사기를 쓰기 위해 거세당하는 치욕을 견뎌내야 했다.

사기는 열전 부분이 더 많이 읽혀지고 있지만, 실은 사기 열전 이외의 부분들, 그중에서도 서(書)는 아주 중요한 자료들이다. 예를 다룬 예서, 음악을 다룬 악서, 군사와 법률을 다룬 율서, 역법을 다룬 역서, 천문을 다룬 천관서, 봉선 의식을 다룬 봉선서, 치수와 수리를 다룬 하거서(河渠書), 재정과 경제를 다룬 평준서(平準書)가 그것이다.

여기서 예란 단순한 예절이 아니라, 사실 그 본질은 오늘날의 법률에 해당된다. 악이란 우리가 아는 음악, 즉 music 이 아니다. 음악을 포함하여 사람들의 정서와 문화 전반에 관한 것이다. 봉선서는 왕조의 정통성을 확보하는 의전과 권위에 관한 것이고, 농사가 근본이었던 사회에 있어 수리와 치수에 관한 기술과 전략을 다룬 하거서, 물가의 안정과 재정의 원칙에 관한 것을 다룬 것이 평준서이다. 여기에 사마천 자신의 전문직에 관한 것을 다룬 천관서와 역서를 더한 것이 서(書)다.

따라서 사기란 당시의 인물뿐 아니라, 정치, 경제, 법률, 문화, 과학 등등 모든 분야를 망라한 전례 없던 기록으로서, 이는 황실 도서관장이라는 직책에서 오는 방대한 정보와 오랜 여행을 통한 과거 일에 대한 현장 고증, 자신의 전문직에 기초하여 저술한 고대 중국 사회를 알 수 있는 거대한 백과사전이다. 이리하여 사마천은 거세형이라는 치욕을 참고 마침내 그의 뜻대로 세상 전체를 기술하고, 나아가서 중국 역사와 천문학의 아버지로서 기록되었던 것이다.

그러면 다음 번에는 동아시아의 천문과 역법이 어떤 기능을 수행했는가에 대해 좀 더 알아보기로 하자.








이 기사의 구독료를 내고 싶습니다.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매번 결제가 번거롭다면 CMS 정기후원하기
10,000
결제하기
일부 인터넷 환경에서는 결제가 원활히 진행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kb국민은행343601-04-082252 [예금주 프레시안협동조합(후원금)]으로 계좌이체도 가능합니다.
프레시안에 제보하기제보하기
프레시안에 CMS 정기후원하기정기후원하기

전체댓글 0

등록
  • 최신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