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 씨는 "아내의 4번째 기일을 앞두고 재판에서 이겼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기쁘면서 가슴이 뻥 뚫린 것처럼 아팠다"며 "4년이라는 시간이 너무 힘들었는데, 근로복지공단이 항소할 수도 있다는 얘기를 들었다"고 말했다.
강 씨는 "처가 식구들이 7살 아이가 엄마 없이 자라는 것을 보고 마음 아파한다"며 "4년 동안 (유가족들이) 충분히 힘들었던 만큼, 이제는 근로복지공단이 판결을 수용하고 항소를 안 해줬으면 한다"고 힘주어 말했다.
▲ 고 김경미 씨의 유가족과 반올림 회원들이 28일 서울 영등포 근로복지공단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근로복지공단은 항소를 포기하고, 삼성 백혈병 산재 인정 판결을 수용하라"고 촉구했다. ⓒ프레시안(김윤나영) |
19살 삼성전자 입사, 2살 아이 두고 백혈병 사망
강 씨의 아내 고(故) 김경미(사망 당시 29세) 씨는 19살이었던 1999년 삼성전자 기흥 반도체 공장에 입사했다. 4년 10개월간 일한 뒤 자주 아파서 퇴사하고 결혼한 김 씨는 첫 아이를 자연 유산했다. 이후 산부인과 진료를 받고 2007년 아들을 낳은 김 씨는 아이가 첫 돌이 되기 전인 2008년 4월 급성 골수성 백혈병을 진단받고 2009년 11월 24일 숨졌다.
유족들은 근로복지공단에 산재를 신청했지만 불승인됐고, 이에 산재를 인정해달라는 행정 소송을 냈다. 결과는 승소였다.
서울행정법원은 지난달 18일 김 씨가 "발암물질을 포함한 각종 유해화학물질에 지속적으로 노출돼 급성 골수성 백혈병이 발병했다고 추단할 수 있다"며 근로복지공단의 판정을 뒤집고 산재를 승인했다. 김 씨가 백혈병에 걸린 지 6년, 숨진 지 4년 만에 얻은 1심 판결이었다.
▲ 근로복지공단은 '삼성 백혈병' 노동자들에 대한 잦은 불승인으로 노동자와 유가족들의 비판을 받아 왔다. ⓒ프레시안(김윤나영) |
법원 "'영업 비밀' 내세운 삼성에도 책임 있어"
이번 판결은 2011년 최초로 산재 인정 판결을 받은 고(故) 이숙영·황유미 씨에 이어 삼성전자 반도체 노동자의 산재를 두 번째로 인정했다는 의미가 있다. 판결 결과도 노동자의 '입증 책임'을 완화하는 내용을 담고 있어 이전 판결보다 전향적이다. (☞관련 기사 : 법원 "'삼성 백혈병' 산재 맞다…유해물질 지속 노출 탓")
재판부는 "망인의 발암물질 노출 정도를 더 이상 규명할 수 없는 것은 망인의 근무 당시 사용된 화학물질에 대한 자료를 보존하지 않거나 영업 비밀이라는 이유로 공개하지 않는 삼성전자에도 그 원인이 있다"며 "업무 기인성에 대한 높은 정도의 증명 책임을 근로자 측에게 부담시킬 수 없다"고 판단했다.
재판부는 "삼성전자가 발암물질 이외에도 수십 종의 유해물질을 사용한 것으로 보이며, 이러한 유해물질이 상호작용을 일으켜 백혈병 발병에 영향을 미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고 판단했다. 아울러 "망인이 장시간·장기간 근무했고, 작업할 때 충분한 보호 장비를 착용하지 않았던 점으로 보아 삼성전자가 측정한 조사보다 더 많은 유해 화학물질에 노출된 것으로 보인다"고 덧붙였다. 삼성전자가 자체 측정한 결과를 배척하고, 유족들의 주장을 대부분 인정한 것이다.
노후한 2라인에서 일했던 김 씨는 2011년 최초로 산재 인정 판결을 받은 고(故) 이숙영(사망 당시 30세)·황유미(사망 당시 23세) 씨와 마찬가지로 화학물질이 담긴 수조에 반도체 원판을 넣었다 뺐다 하는 일명 '퐁당 퐁당' 업무를 했다.
"딸 죽고 6년째 재판 중…'신속한 보상' 원칙에 위배"
'반도체 노동자의 건강과 인권지킴이 반올림'의 이종란 노무사는 "이숙영·황유미 씨 때도 1심에서 승소해 산재를 인정받기까지 만 4년이 걸렸다"며 "만 4년을 기다린 늙으신 아버님을 두고 근로복지공단이 항소하리라고 믿지 않았지만, 결국 항소했다"고 비판했다. (☞관련 기사 : 근로복지공단, 삼성과 '반도체 백혈병' 협의 후 몰래 항소)
그 결과 황유미 씨의 아버지 황상기 씨는 2007년 딸을 백혈병으로 잃은 이후 2011년 1심 승소 판결을 받은 뒤에도, 현재까지 2년 4개월째 항소심 재판 중에 있다.
이종란 노무사는 "근로복지공단이 항소하고 또 3년이 지나서 이숙영·황유미 씨와 똑같은 업무를 하다가 똑같이 백혈병에 걸린 피해자가 나왔다"며 "그런데도 공단은 불승인했고, 그 판결을 법원이 뒤집은 만큼 이번만큼은 항소하지 말아달라"고 간곡히 부탁했다.
반올림은 "근로복지공단이 항소하는 것은 '신속한 보상'을 목적으로 하는 산재법 제 1조에 위배되며, 노동자 보호를 최우선 가치로 여겨야 하는 근로복지공단의 존재 이유와도 배치된다"고 지적했다.
반올림은 또 "무엇보다 산재 한 번 받기 위해 수년을 싸워야 하는 것은 피해자와 유가족들에게 너무 가혹하다"며 "공단이 항소하는 것은 국가적 낭비이자 노동자를 상대로 산재를 받을 권리를 박탈하려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재갑 근로복지공단 이사장 "항소 여부 신중히 검토할 것"
기자회견이 끝나고 유족과 반올림 대표는 이재갑 근로복지공단 이사장과 면담을 하려 했으나, 근로복지공단이 문을 걸어 잠그고 기자들의 출입을 막아서면서 실랑이가 벌어졌다. 유족들의 항의 끝에 공단 직원들이 철문을 열었고, 면담은 비공개로 진행됐다.
유족과의 면담에서 이재갑 이사장은 "항소 여부는 아직 결정되지 않았으며 근로복지공단 경기지역본부와 함께 신중하게 검토하겠다"고 답한 것으로 전해졌다.
▲ 28일 근로복지공단 직원과 반올림 회원 및 유가족들이 이사장 면담에 들어갈 인원을 두고 대치하고 있다. ⓒ프레시안(김윤나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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