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남덕우 전 총리가 97년에 손광식 본지고문에게 한 이야기를 녹취한 것이다.
남덕우씨는 박정희시대에 재무장관(69.10~74.9), 경제기획원 부총리 겸 장관(74.9~78.12), 대통령 경제담당특보(79.1~79.12), 전두환시대에는 국무총리(80.9~82.1)를 지낸 한국 경제관료의 대부이다. 그는 재직기간중 10.26과 신군부 집권을 경험했다. 따라서 10.26 발발 원인 및 김대중 구명에 대한 그의 증언은 그 무엇보다 사건의 본질에 접근한 것이라 할 수 있다. 편집자
나 재무장관할 때(1969년) 마흔 다섯 살이었어. 그러니까 중앙청 앞에 있던 정부청사 건물 아래층 (경제기획원)과 위층(재무부)에서 10년 동안 장관자리 차지하고 있었던 셈이지.
재무장관 5년 남짓에 부총리 4년 넘어 했으니까.
78년말에 장관 물러나게 됐는데, 부가가치세가 문제가 됐어. 정치권 쪽에서 정국불안의 책임을 물어 박대통령에게 압력을 넣은 거지. 박대통령이 부르더니 배경 이야기를 하고 “한두 달 동안 집에서 쉬고 있으라”면서 일거리를 맡겨. 이젠 대학으로 돌아가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기다리라"는 말을 해 못 갔지.
사임한 지 18일 만에 박대통령이 불러 갔더니 경제특보를 맡으라는 거야. 나중에 신직수가 법률특보, 서종철이가 안보특보, 김경원이 외교특보로 임명되었어.
***골프장에서의 박정희와의 마지막 만남**
내가 박대통령 마지막 본 것은 경주 칸추리에서 골프칠 때야.
경북지사이던 구자춘, 그리고 누군가 또 한사람 이렇게 넷이서 라운딩을 하는데 박대통령은 골프를 치면서도 “여기는 정자가 하나 있으면 좋겠다” “저기는 나무가 있어야 되겠다” 하는 식으로 이것저것 챙겨. 그러니 구자춘이는 쪼로(홀컵 옆으로 쪼르륵 새는 형상)만 내다가 “각하, 그럼 전 가보겠습니다” 하고 슬쩍 자리를 빠지더군. 박대통령과 나는 아홉 홀만 치고 끝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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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정국은 흉흉해지고 경제도 과열 후유증이 밀어닥칠 때라 특보들도 걱정이 많았어.
'우리 늙은이들도 국가를 위해 뭣 좀 해야 할 게 아니냐. 이렇게 월급만 축내서야’ 하고들 생각 했어. 그래 한 곳씩 맡아 가지고 해외로 떠나기로 했지. 내가 미국 쪽으로, 김경원이가 구라파로 이런 식이지.
미국 가기 전에 연설원고가 있어야 하겠기에 보좌관이던 정훈목(외환은행장, 아시아개발은행 이사역임)에게 연설문 초안을 만들라고 했어. 워싱턴 설득용이지.
이걸 들고 속초에 있는 한 호텔로 들어가 타자를 치면서 정리를 했어. 그런데 해프닝이 일어났어. 웬 사람이 들어와 매일 객실 문을 잠거 놓고 뭔가 하루 종일 두드리고 있으니까 ‘아, 이건 무선교신하고 있는 거로구나’ 하고 짐작한 호텔종업원이 경찰에 간첩신고를 해서 조사까지 받았어.
미국 가서 처음 워싱턴 연설은 좋은 반응이었어. 그럴 수밖에 없지. 원고를 하도 주물렀으니 내용을 몽땅 외어버릴 정도라. 그러니 연설할 때는 원고도 보지 않고 술술 풀어 나간 거지.
끝나니까 몽땅 일어나서 박수를 쳐. “감명 깊은 연설을 들었다”고 한마디씩 하더군.
그런데 두 번째 연설 때는 엉망이 되었어. 박대통령이 ‘유고’라는 소식을 들었던 거야. 기자들이 몰려와서 인권문제 뭐 이런 걸 물고 늘어져 완전히 흐름이 엉망이 되어버렸지.
***김계원실장의 무능력이 10.26 빌미 제공**
내가 보기로 10.26은 권력최상부의 3인 경호실장 차지철, 중앙정보부장 김재규, 비서실장 김계원의 숙명적인 갈등관계에서 빚어진 것이라고 생각해.
김계원씨는 주중대사(대만) 8년인가 하다가 돌아와 비서실장 자리에 앉았기 때문에 유신이다, 정국흐름이다 하는 데 대해 현실적 감각이나 해석력이 없었어. 그러니까 온갖 보고가 그대로 유출되어 무수정 통과되어 박대통령에게 전달되었지. 김정렴씨의 경우는 안 그랬어. 취사선택이 있었고 그래서 상부 권력구조의 갈등은 최대로 억제 되었지.
그런데다 박대통령은 중정부장을 못마땅하게 생각하기 시작했어. 김부장은 회의 때마다 터졌어. 그도 그럴 것이 내무나 법무등 시국관련 국무위원들은 아침 일찍 사전보고를 할 정도로 대응력이 기민했다는 거야. 김부장은 통 그런 것이 없었다고 하더군.
차실장의 견제도 영향이 있었겠지. 하루는 국무회의인가 회의석상에서 한사람 의견을 말하는데 김부장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어. 그러니까 박대통령은 심히 불쾌한 낯빛으로 “김부장은 어떻게 생각 하시오”하고 추달을 했지. 그래도 대답을 못하다가 한참만에야 “조사후 보고하겠다”고 했어. 박대통령의 얼굴이 더욱 붉어졌어. 그러니까 박대통령은 중정부장 몫까지 차실장에게 맡기다시피 했지.
차는 유신 국회의원을 했던 고로 정치나 시국 흐름을 잘 파악하고 있다고 본 거지. 차는 회의 중이라도 뒤로 빠져 박대통령에게 귓속말을 할 정도였어. 이런 터에 안기부장 경질 소문이 나돌았지. 김부장은 자신의 후임으로 이미 서종철장군이 내정되었다는 첩보를 듣고 있었어. ‘박대통령의 제거 없이는 긴장,갈등 관계에 종지부를 찍을 수 없다’ 그는 이렇게 판단한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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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화당 당의장이 막고 나선 은행장 인사**
70년대에 박종규, 이후락의 전횡은 대단했어.
재무부 장관때 총무과장 인사를 하는데 자기 사람을 천거하고 압력을 넣어. 그래 “일국의 장관이 자기 부처 총무과장 인사 하나 마음대로 못하게 할 거냐”고 항의를 했지. 조용해지더군.
HR은 이 케이스와는 다른 인연인데, 한번 내가 신세를 진 일이 있어. 한양증권의 ‘뎃보사건(공매매 주가조작 사건)’ 때야. 이재국장 이용만이한테 애기하니까 “장관이 한 번 본때를 보여줘야 증권동네가 평온해질 것”이라고 해. 그래 HR을 찾아갔지. HR을 통해 압력을 넣어 문제를 해결한 거야. 지금도 '잘 처리했지만 못된 방법을 썼다'는 생각에 목에 가시처럼 남아있어...
지금‘빅뱅’이 한창 거론되고 있지만, 나는 금융풍토를 인사로 개선하려고 했어.
박대통령 만나서 “정치와 은행장의 유착관계를 안 끊으면 큰일납니다. 이번에 임기 돌아오는 금융계 임원을 그런 차원에서 대폭 물갈이하도록 전권을 위임해 달라”고 했어.
박 대통령은 “소신껏 하라”고 장관의 권한에 위임을 해 주었어. 그런 지시를 받아가지고 은행장 인사를 포함해 대규모로 물갈이를 했지. 잘 밀어붙이고 있는데, 당시 서울은행장이던 임석춘씨 케이스에서 걸려.
김정렴 청와대 비서실장이 전화를 걸어 “대통령이 뭐 하나 잘못 판단한 모양인데, 임석춘씨의 퇴임을 보류하라”는 전갈이야. 다시 청와대로 올라갔어. 박대통령은 “백남억(공화당 당의장)이가 그러는데 임석춘이를 자르면 안된다고 하니 재고하시오” 하는 거야.
나는 “각하, 그렇게 하면 이제까지 밀어온 것이 모두 허사가 됩니다. 금융개혁 없이는 경제풍토를 바로 잡기 힘듭니다” 하고 계속 집요하게 버텼지. 박대통령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던 걸 나는 잘 알고 있었어. 박대통령은 “나도 잘 알고 있어요. 그런데 정치를 없애면 모를까, 참” 하고 탄식하고는 “장관 소신대로 하세요” 하고 선을 긋더군. 그래 돌아와 임석춘 행장을 밀어냈어.
요즘 한보사건으로 야단인데 그 수습을 잘 못하고 있는 것 같애. 나도 박영복 사건(74년 발생한 74억원 부정대출 사건) 때 혼이 났지. 국회엘 나갔더니 “장관 물러나라. 은행감독원장 물러가라!” 하고 문책 공세가 대단해. 그래서 장관은 물러나도 수습의 책무를 다할 의무가 있다고 버티고, 또 내 자신 그럴 생각이었어. “은행감독원장의 경우는 이 사건을 고발한 사람인데 문책을 하면 다음 사람이 그런 일을 어떻게 대응 할 것이냐”고 했더니 그때도 야당의 이중재의원이 분별력이 있더군. “그건 이치가 그렇다”고 해 잘 넘어갔어. 당시 MOF(재무국)에는 최각규, 이용만, 조충훈 같은 ‘맹장들’이 있어서 난 장관하기 참 편했어.
***김대중 사형을 저지하라**
80년에 총리가 되었을 때 기억나는 게 있어. 김대중씨 처리 문제야. 하루는 유학성 안기부장이 총리실로 왔어. “내일 재판이 있는데 사형”이라고 하는 거야. ‘큰일 났다’ 싶었어. 미국 문제가 심각하게 걸릴 수밖에 없거든. 그래서 최규하 대통령을 집으로 찾아가 “큰일 났습니다”했지. 얘기를 듣더니 최통도 “그건 안 되지” 하고 부정적이었어. 당시는 5공이 막 시작될 때라, 워싱턴 쪽은 아주 민감했지.
브라운 국방이 막 서울의 정정을 시찰하고 돌아간 참이야. “한.미 관계의 돈독한 우호를 확인하여...” 뭐 이런 공식관계를 재확인한 터지. 그런데 “엿 먹어라” 하고 인권과 관련한 김대중 처리의 답을 던져버리면 어떻게 되는 건가 말야.
‘큰일 났다’ 싶어 노태우를 불렀지. 단독으로 둘이 만나 “김대중을 내일 사형 언도한다고 하는데 그러면 지극히 곤란한 사태가 발생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어. 브라운 얘기, 워싱턴의 반응, 그리고 그 후에 일어날 파장을 설명했어. 노는 자기도 금시초문이라는 반응이야.
그러나 신군부에게는 현실적이고 직접적인 문제가 걸려 있었어. 신군부의 실력자 전이 워싱턴에 가서 레이건을 만나야 하는데 이 문제로 심각한 걸림돌이 생기게 된 거야. 그래서 결국 유재흥장군을 내세워 “일단 재판날짜는 연기한다. 법적 처리는 사법기관이 알아서 처리하므로 어찌 될지 모르나 특별사면의 수순을 밟겠다”는 메시지를 워싱턴 쪽에 전달해 레이건과 전이 만나는 사안이 합의되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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