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것이 마지막 계약서일 것을 정작 본인은 예상치 못했다. 기간제 보호법에 따라 2년이 지나면 정규직 전환이 된다는 것만 알았다. 최종 인사 평가를 앞두고는 있었지만, 주변에선 '일을 잘한다'고 격려했다. '마지막 계약서'를 썼을 때 즈음, 박 씨의 배 속에는 아이가 생겼다.
정규직과 출산 기대로 부풀었던 마음은 어느 날 한순간 흙빛으로 바뀌었다. 지난해 11월 중순 평일, 슬아 씨는 습관처럼 방문한 간호사 정보 교환 사이트에서 우연히 보라매 병원 수술실 간호사 구인 광고를 발견했다.
자신이 일하고 있는 바로 그 자리에 새로 사람을 뽑겠단 광고. 이것을 발견한 날 오후, 박 씨는 병원 수간호사로부터 '계약 만료' 구두 통보를 받았다.
"아무 말도 못 했어요. 수간호사님이 결정한 게 아니니 무슨 말을 하겠어요. 큰 병원인데 어떻게 이럴 수가 있나 싶었지만, 그때는 당황해서 이 말조차도 하지 못했어요."
▲ 서울대학교 병원이 운영하는 보라매병원 홍보물. ⓒ보라매병원 |
비정규직 해고한 자리엔 또 다른 비정규직
병원은 슬아 씨의 계약 연장을 거부하며, 그 이유로 인사 평가 결과를 내세웠다. 지난 8월 있었던 수술실 계약직 2명에 대한 근무 평가와 심층 면접에서 낮은 점수를 받았단 설명이었다. 평가에는 같이 일했던 상급 실무자 5명과 병원 임원들이 참여했다고 했다.
그러나 슬아 씨와 일부 동료들은 병원의 이 같은 설명을 믿지 않는다. 평소에 수간호사 등 상급 실무자들로부터 업무 능력을 인정받아온 그다. 게다가 당초 병원은 8월 평가 이후 11월 최종 평가가 있다고 공지해 놓고, 이는 아예 진행하지조차 않았다. 약속했던 평가 절차를 완수하지도 않고, 구인 광고를 먼저 한 병원. 해고는 평가에 따른 것이 아니라, 인력 통제를 위한 병원의 비정규직 정책에 따른 것이라고 슬아 씨가 생각하는 이유다.
이와 관련, 공공운수노조 의료연대 현정희 서울대병원 분회장은 "3개월 계약서를 쓰게 한 것부터 계약 연장을 하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을 것"이라며 "보통 이런 경우 평가는 부서장이 '몇 점 주라'고 하면 실무자들은 그대로 따르는 주먹구구식으로 진행된다"고 설명했다.
두 비정규직이 해고된 자리는 또 따른 비정규직 간호사로 채워졌다. 이들 역시 보라매병원에서 장수를 기대하긴 어렵다. 임신 5개월 차로 접어든 그녀는 이런 병원의 비정규직 정책을 규탄하며 매주 하루씩 병원에서 피켓 시위를 벌이고 있다. 그는 아이가 태어나면, 정든 일터로 다시 돌아가고 일하고 싶다고 말했다.
"이제 적응하고 일할 만하니 나가라는 게 너무 억울하잖아요. 공공기관인데 법을 교묘히 악용해서 해고하는 게 어떻게 정당화되는 건가. 그게 저는 물론이고 사정을 들은 가족들도 상식적으로 납득이 안 된다고 해요. 만약 지금 혼자 몸이었으면 그래도 포기하고 돌아섰을 텐데, 임신하고 나니 당당해야겠다는 마음이 들어요. 그래야 아기도 나중에 당당한 사람이 될 것 같고…."
의료사고·의료의 질 저하 부르는 막무가내 비정규직 정책
슬아 씨의 말처럼 보라매병원은 공공기관이다. 좀 더 정확하게는 국립 서울대병원이 운영하는 종합 시립병원이다. 이런 곳에서 임신 중인 수술실 간호사가 비정규직이란 이유로 1년 9개월 만에 일자리를 잃었다. 공공부문의 상시·지속적 비정규직 문제를 해결하겠다고 한 대통령 공약은 이처럼 빠른 속도로 빛바래가고 있다.
병원을 찾는 환자들은 잘 모르지만, 이 병원엔 2013년 10월 기준 28명의 비정규직 간호사가 있다. 고용이 불안하고 임금 체계도 정규직과 다르지만, "하는 일만은 정규직과 같다"고 박 씨는 설명한다. 특히 수술실 안에서 일하는 간호사는 "정규직·비정규직을 불문하고 호흡을 맞춰 수술을 진행한다"고 말했다.
병원 간호사이기도 한 현 분회장은 이와 관련, "의료사고를 항상 경계해야 하는 병원에서도 숙련된 간호사를 내심 선호한다"며 "그러나 수익성 위주의 경영과 이를 장려·강요하는 정부 정책으로 일하는 사람들은 고용 불안에 시달리고, 환자들은 의료 서비스 불안에 시달리게 된다"고 설명했다.
그의 말처럼 슬아 씨의 사례를 뒤집어 환자들의 입장에서 보면 이렇다. 병원에서 치료와 간호를 받고 몇 달 후에 병원을 다시 찾으면 나를 상대했던 간호사는 계약이 만료돼 없다. 차트에 의존한 의료 서비스, 아직 업무에 적응 중인 새 직원들, 다음 달 계약 연장을 불안하게 기다리는 간호사. 이런 환경 속에서 환자들이 받게 될 서비스는 양질일 수 있을까.
한편, 보라매병원 측은 "해당 간호사는 부주의한 태도로 실수하는 경우가 잦아 동료 간호사들이 함께 근무하는 데 있어 어려움을 호소했다"며 "여러 차례 교수나 수간호사가 조언을 했으나 개선되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고 반박했다.
국립대병원 종사자 4분의 1 이상은 비정규직 "병원 정규직 인력 통제하는 정부의 '공공기관 총정원제' 폐지해야" 민간 의료기관의 모범이어야 할 국립대병원들이 정작 비정규직 양산과 이에 따른 의료의 질 저하를 부추기고 있다는 우려의 목소리가 크다. 의료연대와 민주당 김용익 의원 등에 따르면, 국립대병원 비정규직 비율은 현재 총 고용인원 대비 26%를 넘어선 상황이다. 또한 최근 3년 사이(2009년~2012년) 늘어난 근무 인원(4730명) 가운데 절반가량(1892명)을 차지한다. 12개 국립대병원 공시자료를 분석해 봐도 그 상황의 심각성을 알 수 있다. 국립대병원 정규직 비율은 2008년 77.6%에서 2013년 73.6%로 4%포인트 감소한 한편, 직접고용 비정규직은 2008년 2355명에서 2013년 4469명으로 두 배 가까이 증가했다. 특히 이 가운데 분당서울대병원의 비정규직 비율은 41%로 12개 국립대병원 가운데 압도적으로 높다. 각종 병원 서비스를 외주화해 간접고용을 늘리는 것도 물론 문제지만, 환자를 직접 간호·관리하는 인력마저 직접고용 비정규직 형태로 사용하는 것은 의료의 질 저하에 '직격탄'이라는 지적이 적지 않다. 현정희 서울대병원 분회장은 "기획재정부 등 정부 부처를 만나 비정규직 간호사가 있다고 하면 깜짝 놀란다"며 "정부는 그간 비핵심 업무와 미상시 업무를 거론하며 비정규직 사용이 합리적인 것처럼 말해왔지만, 이는 현장을 아예 모르고 하는 소리"라고 꼬집었다. 실제 지난해 3월 민주당 은수미·우원식 의원과 공공운수노조 의료연대가 공동 주최한 '국립대병원 비정규직 증가가 환자에 미치는 영향' 토론회에서 교육부 국립대제도과 관계자는 국립대병원 비정규직 실태조사가 필요하단 지적에 공감한다고 밝혔다. 이는 아직까지 정부 차원의 이렇다 할 실태조사조차 없었다는 얘기다. 정부의 이 같은 무관심 속에서 국립대병원들은 '공공기관 총정원제' 등을 빌미로 정규직 고용에 소극적인 태도를 고수하고 있다. 일례로 재작년 12월 비정규직 노동자들 여럿을 한꺼번에 계약 만료한 칠곡경북대병원은, 해고 노동자들 반발에 "정부가 정원을 늘려주지 않아 어쩔 수 없다"는 태도로 일관했다. 정부 정책이 외려 멀쩡히 일하던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일터 밖으로 밀어낸 셈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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