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재 옹호…전두환 소장은 쿠데타에 '성공'했다?
①'반공 정책과 경제 성장' (324쪽, 소제목)
'반공 정책'과 '경제 성장'을 대등한 관계로 묶어 소제목으로 제시했다. 큰 제목은 '5·16 군사 정변과 반공 체제의 확립'이다. 5·16 군사 쿠데타가, 반공 체제를 확립해 경제 성장을 이끈 기제로 보일 여지가 있다.
②"5·16 군사 정변은 헌정을 중단시킨 쿠데타였다. 하지만 반공과 함께 자유 우방과의 유대를 강조하였다. 대통령 윤보선은 쿠데타를 인정하였다. 육사 생도도 지지 시위를 하였다. 미국은 곧바로 정권을 인정하였다." (324쪽)
연구소는 "5·16 군사 쿠데타를 미화하는 표현이다. 미국이 곧바로 승인했다는 것도 사실과 다르다"고 지적했다. 특히 "반공과 동맹국과의 유대를 위해서는 민주주의의 희생도 불가피하다는 것인데, 이런 서술은 학생들의 가치관에 큰 혼란을 줄 수 있다"고 우려했다.
③"10·26 사태를 조사하는 것을 기회로 하여 보안 사령관 전두환 소장은 쿠데타에 성공하였다(12·12 사태) (326쪽)
"박정희는 쿠데타에 성공한 후"(324쪽)라고 쓰는 등, '쿠데타 성공'이라는 표현을 반복적으로 사용했다. 교학사 교과서가 쿠데타에 대해 긍정적인 인식을 갖고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 지난 5월 15일 오후, 5·18 민주화운동 33주년 기념식을 3일 앞두고 광주 북구 운정동 국립 5·18 민주묘지에서 친형의 묘역앞에서 동생이 휠체어를 탄채 술을 올리고 있다. ⓒ연합뉴스 |
5·18 민주화운동, 광주 시민군 때문에 유혈사태?
①"제주도에서는 1947년 좌익들의 3·1절 기념 대회에 남로당 제주 도위원회가 조직 총동원령을 내려, 정권을 인민 위원회로 넘기라는 등의 구호를 외치게 하였다. 대회 당일, 모르고 아이를 친 기마경찰을 뒤쫓아 시위를 구경하던 군중이 경찰서로 몰려갔고, 경찰이 발표하여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중략) 당시 사건을 수습하는 과정에서 무고한 민간인의 많은 희생이 있었고, 많은 경찰과 우익 인사가 살해당하였다." (305쪽)
연구소는 "1947년 3·1절 기념대회는 제주도민의 자치 투쟁과 생존권 투쟁으로서의 성격이 강하며, 경찰의 발포에 의한 민간인 사망사건이 발생하자 외부 세력의 권력 남용에 대한 반감과 탄압에 대한 저항이 총파업으로 이어졌다"고 밝혔다. 연구소는 "기념대회의 성격을 제대로 설명하지 않은 채 남로당 주도, 군중의 경찰서 습격으로 묘사되는 서술은 매우 편파적"이라고 문제를 제기했다.
이어서 "이미 정부에 의한 진상 보고서와 학계의 기존 연구에서, 미 군정과 경찰, 우익 세력의 대응 방식이 주요 요인이었으며 그 결과 수 만 명의 제주도민들이 희생됐다고 드러난 바 있다"고 비판했다. '제주 4·3사건 진상조사보고서'는 4·3사건 인명 피해를 2만 5000~3만 명으로 추정했다. 또 보훈처에 등록된 4·3사건 관련 민간인 국가유공자는 모두 639명이다.
②"북한군은 북한에서도 학살을 자행하였다. (중략) 남한에서도 민간인들에 대하여 살상이 일어났다. 대표적인 사례가 보도 연맹 사건이다. 보도 연맹은 좌익에 가담했던 사람들을 보호하고 지도하기 위하여 조직한 단체이다. 그러나 북한군이 남침하자 이들이 북한에 협조할지 모른다는 의구심 때문에 이들을 처형하였다." (314쪽)
연구소는 "남한의 사례는 주체를 명시하지 않고 모호하게 표현하여, 누구에 의해 보도연맹원이 처형되었는지 알 수 없다"며 "보도연맹 사건은 최소 20만 명의 대한민국 국민들이 '빨갱이'일지 모른다는 이유로 아무런 법적 절차 없이 '예방 학살'된 사건"이라고 비판했다.
④"신군부는 공수 부대를 투입하여 시위를 진압하고 학생과 시민들을 체포하였다. 계엄군이 시민들을 무자비하게 진압하자 시위는 대규모로 번지게 되었다. 신군부는 언론을 통제하고 교통을 차단하였고, 광주 시민들을 폭도로 몰았다. 광주 시민들은 계엄군의 발포에 대항하여 시민군을 결성하여 총을 들고 저항하였다. 이 과정에서 수많은 시민들이 희생되었다.(5.18 민주화운동)" (326쪽)
계엄군이 시민을 어떻게 무자비하게 진압했는지에 대해 구체적으로 서술하지 않고 어물쩍 넘어갔다. '수많은 시민이 희생'되었다고 모호하게 표현해 학생들이 피해 규모를 짐작하기 어렵다.
연구소는 "유혈 사태의 원인이 시민에게 있는 것으로 오해할 소지가 있으므로 수정하라는 수정 권고가 있었는데도, 이 상태로 심의를 통과했다는 것은 형식적 심의 과정이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고 우려했다. 또한 "민간인 피해, 의의 등에 대해 객관적 사실에 입각해 정확한 서술을 하라고 수정 권고했으나, 여전히 피해 사실에 대해 모호하게 표현했다"고 꼬집었다.
⑤"그 과정에서 연세대 학생 이한열이 시위 중 경찰이 쏜 최루탄에 맞아 사경에 빠지게 되었고, 이는 국민적 항쟁을 불러 일으켰다."(6월 민주 항쟁) (327쪽)
교육부의 수정 권고에 따라 오히려 더 역사 왜곡이 일어난 사례다. 연구소는 "'시위 중 경찰이 쏜 최루탄에 의하여 사망하는 사고까지 일어나 국민적 항쟁을 불러 일으켰다'를, 교육부의 수정 권고 후 위와 같이 고쳤다"며 "경찰의 최루탄에 맞아 뇌사에 빠진 후 결국 사망에 이르게 된 것이 사실이다. 그런데도 '사경'이란 표현을 사용했다"고 문제를 제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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