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일보> 김대중 고문은 "가히 100년 전 상황을 연상시킨다"고 했다. 북한·일본·중국·미국의 변수 앞에서 "우리가 사면초가에 둘러싸일, 불리한 국면에 처할 수도 있다"고 했다. 그리고 물었다. "이 정부가 이런 심각하고 무섭고 무서운 조짐들을 능히 읽어내고 바람의 방향을 바르게 예견하는 예지를 발휘할 수 있을 것인가." 그 칼럼의 제목은 '박근혜, '내 무덤에 침 뱉어라' 할 수 있는가'이다.
암울한 전제가 비슷하지만, 두 보수 논객의 논지는 (제목이 그러하듯) 생판 다르다. 특히 김대중 고문이 "다음 정권도 현 정권의 정체성을 이어갈 수 있는 동질, 동종의 보수 성향일 때 선행자로서 박 정권의 존재는 의미가 있다"며 전개하는 편협한 진영 논리엔 전혀 동의하지 않는다. 다만, 2013년의 현실에서 감지되는 시공감이 대체로 암울하다는 것만은 부인하기 어렵다. '구한말'이나 '100년 전 조선'의 비유가 갖는 함의를 외세의 동향과 내치의 긴밀한 연관의 시기로 본다면, 취임 직전 북한의 3차 핵실험으로 시작해 미국의 아시아로의 귀환, 그에 맞서 '주동작위(主動作爲 : 할 일은 주도적으로 한다)'로 노선 변경한 중국, 우경화의 길로 치닫는 일본을 동시다발로 맞고 있는 박근혜 정부의 명운을 그 언저리에서 찾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하다.
그럼에도 요즘 '구한말식 개탄'이 격조 있는 유행이 된 건 아이러니다. 1년 전과 비교해 현실은 조금 더 구체화됐을 뿐이다. 이미 다 알고 있었다. 느닷없이 나라 안팎으로 태평성대가 올 거란 생각은 아무도 안했다. 처한 조건은 불안했지만 그래서 기대가 조금 더 컸다. 보수·진보 가를 것 없이 1년 전 박근혜 시대를 맞이하는 기대의 교집합은 외치와 내치의 조화였다. 바깥의 마찰을 최소화하며 한반도 주변 상황에 대응하고, 내부적인 저항을 피해 경제 민주화와 복지 등 국내적 과제에서 성과를 낼 것 같은 기대. 기득권을 누려온 보수의 오랜 노하우가 박근혜를 통해 좋은 방향으로 발현된다면 그 역시 진전이니까. '한 걸음은 못가도 반걸음은 가겠지'이자, 속된 말로 풀면 '이명박보단 낫겠지'였다.
보수도 속고 비(非)보수도 속았다. 북한 발(發) 급변 사태를 운운하며 미국과 중국과 일본의 제 갈 길을 몰랐던 양, 이제와 국가와 국민의 안위를 호들갑스레 걱정하는 박근혜 정부의 요즘 행태는, 동아시아의 격변을 외려 불가항력의 영역으로 왜소화하고 내치의 실패를 희석하는 기회로 활용하려는 듯한 인상마저 든다. 바깥으로부터 불어오는 바람을 지렛대 삼은 위기감의 극대화와 공안 통치는, 그 1년 동안 외치와 내치에서 무엇을 (하려) 했는가에 대한 물음에 낙제점 답안지를 내민 꼴이다.
'과반 대통령', '최초의 여성대통령'도 수식어 기능을 뛰어넘는 함의가 컸다. 그러나 격렬했던 선거의 뒤끝 역시 다른 파장을 그리기 마련이었다. 그래서 더욱 과반 당선의 힘을 가진 여성 대통령의 섬세한 리더십이 필요했다. 승자들의 향유가 적어도 자기들만의 파티에 그치지 않았다면 패자들의 상처도 더불어 아물어가는 1년이 되었을 것이다. 먹고 살기 바쁜 대다수 서민들은 그저 본분에 충실하면 취직도 되고, 벌이도 나아지고, 부모 자식 부양할 시름도 좀 덜어내는 1년이 되었을 것이다. 그렇게 하지 않았다. "100% 국민 통합"이 실현 불가능한 구호인 줄은 알았지만, 48%의 반대편을 갈라내고 거기에 '종북'이니 '대선 불복'이니 하는 딱지를 붙여댈 줄은 몰랐다.
시절이 하 수상하다 보니 어느 대학생이 "안녕들 하십니까"라고 세상에 던진 소박한 물음이 파장을 일으킨다. 나라님 하는 일이 못마땅해 방을 하나 써 붙인 셈인데, 많은 사람들이 이심전심으로 웅성웅성한다. 이게 다 국가정보원의 못난 짓을 깨끗하게 사과하고, 철도 운영을 자회사와 경쟁시키려는 해괴한 짓을 거두고, 병원을 장삿속으로 여기지 않았으면 벌어지지 않았을 일들이었다. 공약대로 복지 정책을 펴고, 공약대로 대학 등록금도 낮추고, 공약대로 재벌들 횡포를 막았다면 평범한 사람들이 '안녕'을 자조하진 않았을 것이다.
내일이면 박 대통령이 당선된 지 꼭 1년이다. 박 대통령의 당선 인사는 이랬다. "저에 대한 찬반을 떠나 국민여러분의 다양한 의견을 수렴해 나가겠습니다. 과거 반세기동안 극한 분열과 갈등을 빚어 왔던 역사의 고리를 화해와 대탕평책으로 끊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모든 지역과 성별과 세대의 사람들을 골고루 등용하여 대한민국의 숨은 능력을 최대한 올려서 국민 한 분 한 분의 행복과 100퍼센트 대한민국을 만드는 것이 저의 꿈이자 소망입니다."
보수 논객들조차 시절을 구한말에 빗대고 서민들은 하루하루의 안녕이 걱정인 걸 보면, 우린 모두 속은 게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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