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걸 글머리에 명토박아야할까 잠시 망설였다. 그래야만 합리적인 '척' 할 수 있기 때문이라면 너무 비겁하지 않은가? 그런 전제를 생략해 대선 불복으로 비쳐질까 하는 걱정이라면 자기검열 아닌가? 장 의원과 나의 의견 차이가 한강 폭만큼이라도 되나? 4800만 가지의 정치적 견해를 단 두 개로 가르려는 흑백논리의 영향권으로 나도 모르는 새 들어선 게 아닌가 하는 자각에 이르러선 자괴감까지 든다. 승복 천당, 불복 지옥! 기왕 이렇게 된 거, 남한이 북한보다 백배천배 낫다고 생각한다는 국가관도 자백한다. '조국이 어디냐'는 추궁까지 들을 수는 없는 노릇이니.
▲ 9일 오후 새누리당 의원 전원은 의총 직후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대선불복 선언을 한 민주당 장하나·양승조 의원에 대한 의원직 사퇴와 출당을 촉구 하는 규탄대회를 가졌다. ⓒ새누리당 |
이정현 청와대 홍보수석의 "침착하게 정리를 해서 개인적으로 낸 가장 긴 논평"은 섬뜩했다. 20분간의 브리핑 내내 격분한 어조부터 '침착'과 거리가 멀었다. "대통령 위해(危害)를 선동 조장하는 테러", "언어 살인이자 국기문란"이라는 말을 거침없이 토해냈다. 대통령직 사퇴를 요구한 박창신 원로신부에게 "용납하거나 묵과하지 않을 것"이라고 했던 박 대통령의 언급이 있던 터라 이 수석의 '개인 논평'으로 들리지도 않았다. 새누리당도 수위 높은 비난으로 맞장구를 쳤다. "국가 원수에 대한 저주 섞인 발언"(황우여 대표), "저주의 굿판을 당장 걷어치워야 한다"(윤상현 의원), "꼴불견 막장 드라마"(유기준 의원)라고 했다. 새누리당은 급기야 장하나, 양승조 의원에 대한 국회의원직 제명안을 제출하기로 했다.
장하나 의원의 대선 불복 성명은 민심을 먹고사는 정치인으로서의 득실을 따지면 패착이다. 민주당의 전략에 보탬이 되는 발언도 아니다. 지난 대선이 공정하지 못하게 진행된 사실이 드러나고 있지만, 박 대통령이 사퇴해야 한다는 주장은 민심과 크게 어긋나있다. 하지만 그건 장 의원과 민주당이 정치적으로 감당할 몫이다. 국민의 저항권 자체가 봉쇄된 왕권신수설의 시대가 아닌 이상, 대통령에게 물러나라고 요구할 자유는 누구에게나 있다. 그것이 '선동'이라 할지라도, 선거 부정 혐의라는 사실에 입각했으니 선동의 자유 또한 봉쇄될 이유가 없다. 정치적으로 매우 부당했음에도 노무현 전 대통령에 대한 탄핵안까지 발의했던 새누리당이 이를 모를까?
양승조 의원에 대한 여권의 과잉 반응도 마찬가지다. 논란이 된 양 의원의 발언 전문은 이렇다. "박정희 대통령은 중앙정보부라는 무기로 공안통치와 유신통치를 했지만 자신이 만든 무기에 의해 자신이 암살당하는 비극적 결과를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박근혜 대통령은 박정희 대통령의 교훈을 타산지석으로 삼아야할 텐데 국정원이라는 무기로 신공안통치와 신유신통치로 박정희 대통령의 전철을 밟을 수 있다는 국민의 경고를 새겨들어야 할 것이다. 총체적 난국을 풀어낼 수 있는 사람은 오직 박근혜 대통령뿐이며 오만과 독선, 불통을 던져버리고 국민의 곁으로 다가오기 바란다." 이 발언에서 대통령 암살을 사주한 '테러리스트'를 발견했다면, "나에게 한 문장만 달라. 그러면 누구든 범죄자로 만들 수 있다"고 했던 나치 정권의 선전장관 요제프 괴벨스가 울고 갈 판이다.
청와대와 새누리당이 대선 불복과 '최고 존엄' 모독을 힐난할 자격이 있는지도 의문이다. 새누리당의 실세 김무성 의원은 2003년 "노무현이를 대통령으로 지금까지 인정하지 않고 있다"고 했다. 청와대의 '왕실장' 김기춘 비서실장은 "노 대통령은 이미 정치적으로 하야한 만큼 즉각 대통령직에서 물러나야 한다"(2003년), "노무현 대통령은 사이코다. 자기 감정도 조절하지 못하고 자제력이 없다"(2006년)고 했다. 그랬던 사람들이 이제와 야당 의원들에게 제명을 협박하고 있으니, 정권 말기적 현상이던 박정희 정권의 김영삼 제명 사건, 전두환 정권의 유성환 제명 사건에 비유되는 것이다.
장하나, 양승조 의원을 먹잇감 삼아 쏟아낸 청와대와 새누리당의 공세가 무엇을 의도했는지는 두말할 나위 없다. 그러나 대선 불복 프레임 구축이라는 정치적 효과를 볼지는 몰라도, 과장과 비약이 과다 함유된 억압적 통치는 제 바퀴를 달고 관성의 힘을 발휘한다. 노회찬 전 의원이 트위터에 "대통령 사퇴를 요구한 장하나 의원과 생각이 다르지만 '대통령 사퇴'를 주장했다고 해서 장 의원을 제명처리 한다면 모든 것을 걸고 '대통령 하야'를 위한 투쟁에 앞장 설 것을 다짐한다"라고 썼다. 선거 결과를 인정하는 것과 마음대로 생각하고 표현할 권리가 질식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다. '대선 불복' 누르려다 '정권 불복' 만날 수 있다는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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