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영 위기를 내세우며 대량 해고를 단행했던 한진중공업에서 또 한 명의 노동자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2010년 시작된 '한진중공업 사태'가 여전히 현재 진행형임을 보여주는 사건이다.
부산진구경찰서와 전국금속노동조합 부산양산지부 한진중공업지회(이하 지회) 등에 따르면, 지난달 29일 밤 10시 30분께 부산진구의 한 아파트 베란다에서 목을 매 숨져 있는 김모(53) 씨를 가족이 발견해 경찰에 신고했다.
고인이 된 김 씨는 지난 1980년 한진중공업에 입사해, 31년 차가 되던 2010년 정리 해고됐다. 이후 금속노조와 지회는 1년 가까이 격렬한 해고 철회 투쟁을 벌였다. 그 과정에서 김진숙 민주노총 부산본부 지도위원이 309일간 85호 크레인 고공 농성을 진행했고, 이를 응원하는 다섯 차례의 희망 버스 등이 커다란 사회적 주목을 받았다.
장기간의 대립 끝에 노사는 2011년 11월 '정리 해고자 1년 내 재취업'에 합의하고 김 지도위원은 고공 농성을 해제했다. 그러나 고인을 비롯한 100여 명은 아직 현장에 복귀하지 못한 채 '휴직' 상태로 대기 중이다.
"정리 해고와 노조 탄압이 죽였다"
지회는 김 씨의 죽음이 이런 상황과 무관하지 않다며 반발하고 있다. 지회는 지난달 30일 보도 자료를 내고 "김 씨가 정리 해고 투쟁 이후 심리적 고통이 심했으며, 휴업 상태로 지내며 힘들어했다"고 전했다. 유족 또한 고인이 정리 해고 후 우울증으로 5개월 동안 입원 치료를 받았다고 경찰에 진술했다.
사측의 노조 탄압도 김 씨를 죽음으로 몰고 간 이유로 거론된다. 한진중공업에는 지난해 3월 '노사 문화 혁신'을 내세우며 새로 출범한 기업 노조(한진중공업노동조합)가 있으며, 이 노조가 교섭 대표권을 획득함에 따라 금속노조가 설 자리는 계속해서 좁아졌다.
지회는 사측이 복수 노조를 이용해 금속노조를 줄곧 탄압해 왔고, 그 대표적인 것이 바로 김 씨와 같은 금속노조 소속 휴직자의 복귀 지연 문제라고 주장했다. 지회에 따르면, 현재 기업노조 조합원 522명 가운데 321명(61%)이 현장에서 일하고 있으나, 금속노조 조합원 186명 가운데 일하고 있는 사람은 29명(15%)에 불과하다.
이는 한진중공업이 지난 2월 금속노조와 추가로 도출한 합의안을 사실상 파기한 것이다. 양쪽은 지난해 12월 고(故) 최강서 씨의 자결 이후 "노동조합이 다르다는 이유로 휴업자를 차별하지 않는다"는 내용의 합의를 도출한 바 있다.
한편, 한진중공업 측은 김 씨가 회사로부터 통상 임금을 받아온 만큼, 이번 죽음이 회사와는 관련이 없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박성호 지회장은 30일 통화에서 "기본급의 820%에 이르는 상여금을 뺀 급여를 이야기하는 것"이라며 "무엇보다 여러 상황을 종합해서 해석하지 않고, 돈 문제만 얘기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고 비판했다.
김 씨의 장례는 노동조합 장으로 치러진다. 금속노조는 김 씨를 '정리 해고의 희생자'로 규정하고 그에 걸맞은 후속 절차를 진행하겠다고 밝혔으며, 그 일환으로 1일 저녁 6시에 고인이 안치된 부산의료원 장례식장에서 '추모의 밤'을 열 예정이다.
잇따른 '죽음의 행진', 어떻게 끊나?
한진중공업에서는 김 씨 이전에도 여러 노동자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지난 1월에는 사내 하청 업체에서 일하며 비정규직 노조 설립 활동을 하다가 해고된 최모 씨가 자택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그 이전에는 지회 조합원 최강서 씨가 "태어나 듣도 보도 못한 (손해 배상·가압류) 158억"이란 유서를 남기고 노조 사무실에서 목을 맸다.
2004년에는 마산 공장에서 일했던 김춘봉 씨가 비정규직 처우 개선을 촉구하며 자결했고, 2003년에는 김주익 당시 노조 위원장이 구조 조정과 손배 철회를 요구하며 고공 농성을 벌이던 85호 크레인 위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로부터 13일 후 곽재규 조합원이 도크에 몸을 던져 세상을 떠났다.
잇따른 '열사' 행렬에 한진중공업 노동자들은 트라우마를 안고 살고 있다. 지회는 고인이 된 김 씨 역시 "김주익·곽재규 열사 죽음 이후 벌어진 투쟁 때 누구보다 열심히 했던 사람"이라며, "특히 김주익 열사를 아껴 당시 큰 충격을 받았었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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