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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임금', 300년 전 애덤 스미스가 먼저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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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임금', 300년 전 애덤 스미스가 먼저 말했다

[시민정치시평] 임금이 노동자의 생활을 보장해야 하는 이유

서울 노원구청과 성북구청은 각각 해당 지역 내 서비스공단, 도시관리공단 등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에게 노동자 평균임금의 58% 수준의 임금을 보장하고 있다. 2014년 이 제도는 양 구청의 노동자들에게 143만 원의 임금을 보장한다고 한다. 얼마 전 부천시에서도 자신들이 고용한 노동자들에 대해서 최저임금 이상의 임금을 보장하는 조례를 통과시켰다고 하며, 경기도의회와 서울 강남구의회에서도 최저임금 이상의 임금을 보장하는 조례를 발의했다는 소식이 들린다. 제도와 조례의 이름은 '생활임금'이다.

'생활임금'이란 말이 생소할 수도 있다. 생활임금은 최저임금을 일정한 수준의 생활을 보장할 수준으로 인상시키자는 구호일 수도 있고, 공공기관이 민간기업과 조달, 용역 계약을 맺을 때 민간기업에 고용된 노동자들의 임금수준을 계약조건에 포함시켜 민간기업에 고용된 노동자들의 임금수준을 일정한 수준으로 보장하는 제도인 'Living Wage'의 번역어일 수도 있다. 필자가 보기에 두 가지 생활임금은 모두 "임금은 노동자의 삶을 실질적으로 보장해야 한다"는 주장을 하고 있는 듯하다. 1981년생인 필자에게는 요즘이 하루하루가 새로운, 소위 '엄혹한' 시절이므로, 필자는 노동자들에게 더 많은 임금을 보장하자고 주장하지 않는다.

"국민 전체의 의식주를 공급하는 노동자들이 자기 자신의 노동생산물 중 자신의 몫으로 그런대로 잘 먹고, 잘 입고, 좋은 집에서 살 수 있어야 또한 공평하다고 할 수 있다."

약 300년 전 스코틀랜드의 글래스코 대학 총장의 주장이다. 도덕철학자였던 이 사람은 노동자가 잘 먹고, 잘 사는 것이 '공평'이라고 생각한 모양이다. 복잡한 경제는 합리적 개인의 선택에 의해 작동하기 때문에, 여기에 도덕을 들이밀면 안 된다. 그러나 그저 착한 도덕철학자는 임금에 대해서 이렇게 주장한다.

"사람이 항상 자신의 노동에 의해 생활을 유지해야 한다면, 그의 임금은 적어도 그의 생활을 유지하는데 충분해야 한다. 대부분의 경우 임금은 이것보다 좀 더 많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는 자기 가족을 부양할 수 없을 것이며……."

임금이 노동자의 생활을 보장해야 한다? 최저임금을 올리면 중소기업은 망한다. 일단 기업과 부자가 잘살아야 나라 모두가 잘살 수 있다는 논리의 '낙수효과'는 2013년 대한민국 국민이면 모두가 알고 있는 상식 중의 상식이 아니던가.

노동자들에게 그들과 그들 가족의 생활을 영위할 수 있는 수준의 임금을 보장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이것을 '공평'이라고 생각한 18세기 스코틀랜드 도덕철학자의 이름은 애덤 스미스다. 동명이인이 아니다. <국부론>의 저자 애덤 스미스는 심지어 "노동의 후한 보수는 인구 증가를 장려하면서 보통 사람의 근면을 증대시킨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지금까지 인용한 모든 구절은 <국부론> 제1편 제8장 '노동의 임금'의 내용이다.

임금이 노동자의 생활을 보장해야 한다는 생활임금이라는 주장, 필자의 의견이 아니다. 애덤 스미스가 <국부론>에 적어놓은 내용이다.

※ 시민정치시평은 참여연대 부설 참여사회연구소와 프레시안이 공동기획·연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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