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학민 교장선생님은 유명한 음식칼럼니스트로, <한겨레21>에 음식 칼럼 '김학민의 음식이야기'와 술 칼럼 '김학민의 주류인생'을 연재한 바 있습니다. 음식 칼럼집으로 <맛에 끌리고 사람에 취하다>가 있으며, 최근에 술 칼럼집 <태초에 술이 있었네>를 펴냈습니다.
음식문화학교 제23강은 오는 8월 18일(토) 전북 무주구천동 일대와 적상산으로 떠납니다. 아침에 서울에서 떠나는 스쿨버스를 마련하였습니다.
▲ 덕유산의 여름 ⓒ덕유산국립공원 |
제23강의 요점은 이렇게 정리됩니다. (수업 일정은 현지 사정에 따라 일부 조정될 수 있습니다)
* 무주행 버스 안에서 교장선생님의 음식문화 강의
* 구천동 계곡길 걷기 - 구천동 옛 사람들이 다니던 옛길 트레킹
* 구천동 상류 청정 계곡물에서 양식한 송어회로 점심식사
* 천하비경 적상산 구경하기 - <조선왕조실록> 사고지, 안국사
* 무주 머루와인 동굴에서의 와인 파티
8월 18일 아침 7시 30분 서울에서 출발합니다. 7시 20분까지 서울 강남구 압구정동 현대백화점 옆 공영주차장에서 <음식문화학교> 스쿨버스에 탑승바랍니다. 김밥과 식수가 준비돼 있습니다.
10시 30분. 버스는 무주군 설천면의 구천동 골짜기 주차장에 도착합니다. 여기서 출발하여 구천동 옛 마을사람들이 왕래하던 옛길을 느릿느릿 걷습니다. 청정계곡 따라 굽이굽이 2km의 오솔길이 1시간여 이어집니다.
[무주구천동(茂朱九千洞)] 전북 무주군 무주읍에서 40리쯤 되는 곳에 나제통문(羅濟通門)이 있고, 그 앞으로 내가 흐르는데, 그 위의 다리가 바로 덕유산으로 진입하는 구천동 입구이다. 구천동은 여기서 시작하여 남으로 덕유산까지 갈지(之)자로 이어지는 70리 긴 골짜기이다. 구절양장(九折羊腸)처럼 굽이굽이 펼쳐진 계곡엔 사시사철 맑은 물소리가 울리고, 울창한 숲과 기암 등이 선경을 이룬다. 구천동은 북한의 삼수갑산과 더불어 심산유곡의 대명사로 쓰였다.
그만큼 재미있는 이야기도 많이 전한다. 암행어사 박문수의 설화에 의하면, 구씨와 천씨 성을 가진 집안의 집단 주거지라고 해서 두 성씨를 따 구천동이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구천동에서의 '구'를 아홉 구(九)자와 관련지어 여러 가지 설들을 내고 있지만, 아홉과는 별 관련이 없는 것 같다. 구(九)는 아홉 외에 크다, 길다의 뜻을 갖고 있는데, 구천동의 '구'는 이 뜻이다.
기이한 바위들이 9천 개가 널려 있는 곳이라서 구천동이라는 이름이 붙었다고도 하며, 예전에 절이 많이 있어서 성불자(成佛子) 9천명이 다녀갔다고 해서 구천동이라는 이름이 생겨났다는 설도 있다.
숙종 때 소론의 거두 윤명제는 구천동이 들어있는 덕유산은 불교의 소국이라 일컬을 만큼 덕유산에는 14개의 사찰이 있었다고 전한다. 조선 명종 때 광주목사 갈천 임훈의 <등덕유산 향적봉기>에는 구천동을 불공을 이룬 자 9천명이 머문 둔소(屯所)라는 뜻에서 구천둔(九千屯)이라 했다 한다.
당시 이웃 고을 금산의 한 여인이 수도하기 위해 구천둔에 입산한 남편과 약속한 3년이 되어도 안 돌아와 찾아 헤맸으나 워낙 계곡이 깊어 찾지 못하고 되돌아갔다. 이때부터 구천둔이라는 지명이 구천동으로 바뀌어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 무주구천동의 계곡미 ⓒ무주군 |
12시. 덕유산 산행이 시작되는 지점의 마지막 식당에 도착합니다. 이런 저런 메뉴가 있지만 청정 구천동 계곡에서 양식된 송어회가 일미입니다. 야외 나무 그늘 아래 차려진 식탁에 앉아 느긋하게 점심을 즐기겠습니다. 식당 바로 옆이 계곡이므로 식사 후 차디찬 계곡물에 발 담그고 담소를 나누셔도 좋습니다.
오후 2시, 버스는 꼬불꼬불 적상산을 돌아 힘겹게 정상에 오릅니다. 천하절경 안국사를 구경하고 적상산 사고(史庫) 유적지에서 무주 문화지킴이 권중헌 선생의 <조선왕조실록> 이야기를 듣습니다. 권 선생이 강의 후 들려주는 대금 한 곡조는 적상산 절경과 함께 속진에 물든 우리들의 가슴을 깨끗하게 씻어 줍니다.
[안국사(安國寺)] 고려 충렬왕 3년(1277) 월인 스님이 창건하였으며, 조선 때 태조 이성계의 명을 받아 무학대사가 중창한 절이다. 임진왜란이 끝나고 적상산에 사고가 들어선 다음부터 호국사와 더불어 사고를 지키는 수호사찰이 되어 조선왕조가 끝나는 날까지 그 임무를 수행했다. 안국사는 1989년 적상산 양수발전소 건설로 수몰되어 본래의 터에서 남쪽으로 1km 떨어진 지금의 자리로 옮겨 왔으며 이 자리는 원래 호국사 옛터이다. 안국사 계단을 올라 청하루를 지나면 듬성듬성 전각들이 자리 잡고 있는데, 새로 지어 옛 정취는 잃어버린 느낌이지만 천불전만은 눈여겨 볼만하다. 적상산 사고의 선원각을 옮겨온 것이 바로 이 건물인데, 옆면과 뒷면에 두른 널벽, 앞뒤로 붙인 여러 개의 교창, 위층과 아래층이 분리된 중층구조 등에서 사고 건물의 잔영을 살필 수 있다. 절 뒤편 언덕배기에서 내려다보이는 경내 전경과 그 아래로 펼쳐지는 경관이 무척 아름답다.
[적상산 사고(赤裳山 史庫)] 임진왜란이 끝난 뒤 <조선왕조실록>을 정리·편찬하여 5부를 완성하고, 춘추관·마니산·태백산·묘향산·오대산에 각 1부씩 보관했다. 이 가운데 북쪽에 위치한 묘향산 사고를 만주에서 일어난 후금(淸)과의 관계가 악화되자 다른 곳으로 옮겨야 한다는 의견이 대두되어 1610년(광해군 2) 무주군에 있던 적상산성을 수리하고 1614년 실록전을 건립해 1633년(인조 11)까지 묘향산 사고의 <실록>을 모두 옮겼다. 1643년에는 사고를 지키고 산성 수비를 강화하기 위해 산성 안에 수호사찰 호국사(護國寺)를 창건했으며, 1872년(고종 9) 실록전과 왕실의 족보를 보관하던 선원각을 개수하여 조선 말기까지 <실록>이 완전히 보관되어 있었다. 1910년 일제에 의해 적상산 <실록>은 창덕궁 장서각으로 이관되었고 8·15해방 후 <실록> 도난사건이 발생하여 여러 권이 없어졌으며, 나머지도 6·25전쟁으로 멸실되었는데, 현재 북한의 묘향산에 보관되어 있다. 산성에 있던 실록전 등의 건물도 언제 어떻게 없어졌는지 알 수 없으며, 선원각만 근처의 안국사에 남아 있다.
▲ 적상산 사고 ⓒ무주군 |
오후 3시 30분. 버스는 꼬불꼬불 적상산 산길을 내려와 와인동굴에 닿습니다. 동굴에 들어서면 갑자기 싸아 하는 바람기를 느낍니다. 추위를 타는 분은 여분으로 긴 소매 옷을 준비해야 합니다. 300여m 들어가면 동굴 선술집 와인 카페가 나옵니다. 여기서 세계 어디서도 맛보지 못할 와인 한잔!을 음미합니다.
[머루와인동굴] 적상산 중턱 450m 지점에 자리하고 있다. 이 와인동굴은 1988~95년 무주양수발전소 건설 때 작업 터널로 사용하던 곳을 발전소 공사가 끝난 뒤 폐쇄된 것을 2005년 무주군산림조합이 한국전력에서 임대해 와인보관소로 쓰기 시작했으며, 그 뒤엔 무주군에서 직접 운영하고 있다. 산지가 많고 날씨가 추운 무주에서는 예로부터 산머루가 많이 생산되어 현재 117곳의 농가에서 연 400여 톤의 머루를 생산해 내는데, 이렇게 고랭지에서 생산된 질 좋은 머루를 4개 회사가 사들여 와인을 만들고, 이 와인들은 모두 와인동굴에 보관하고 있다.
연 평균 14~16°C의 기온을 유지하고 있는 와인동굴에 들어서면 머루와인 2만여 병이 너비 4.5m, 높이 4.7m, 길이 579m 규모의 동굴 양쪽 나무 창고에 가득 쌓여 있다. 머루와인 병들의 행렬을 뒤로 하고 안으로 쭉 들어가면 와인 카페가 나온다. 드넓은 면적(약 200㎡)에 판매대와 탁자 10개가 놓여 있는데 발전소 건설 당시 작업 차량이 드나들기 위해 일부러 넓힌 공간이 관광객을 위한 와인 카페로 변신한 것이다. 이곳에서 파는 머루와인은 1병에 1만 5천~2만원 수준으로 시중보다 20% 정도 싸다.
▲ 머루와인동굴 ⓒ무주군 |
오후 5시, 바쁜 일정을 마친 음식문화학교는 서둘러 서울로 향합니다. 길이 막히지 않으면 7시 30분 전후면 도착할 수 있습니다.
음식문화학교 8월 참가비는 10만원입니다 (교통비와 식사대, 와인 시음료, 강의비, 여행보험료, 운영비 등 포함). 버스 좌석은 참가 접수순으로 지정해드립니다. 참가신청과 문의는 사이트 www.huschool.com 전화 050-5609-5609 이메일master@huschool.com 으로 해주세요.
☞참가신청 바로가기
김학민 교장선생님은 <음식문화학교를 열며> 이렇게 취지를 설명했습니다.
<인간은 요리하는 동물>
최초의 인간은 다른 동물과 마찬가지로 자연 상태 그대로 먹었습니다. 그러다가 불의 발견을 계기로, 인간은 환경에 적응하는 슬기를 발휘하여 서서히, 또한 독특하게 식생활 체계를 세웠으니, 이것이 음식문화입니다. 이로써 인간은 '요리하는 동물'로 진화되어, 각기 살고 있는 곳의 기후와 풍토에 따라 제각각의 음식문화권을 형성하게 됩니다.
이러한 음식문화의 자연스런 분화와 발전이 있었으므로, 인류의 보편적 정서와 규범을 흐트러트리지 않는 한, 한 인간이 무엇을 어떻게 먹든 그것은 그의 자유입니다. 또 특정한 먹을거리를 특별하게 먹게 된 것도 그 공동체 고유의 살아온 환경과 문화, 역사의 소산이므로 자기만의 잣대를 들이밀어 왈가왈부할 일도 아닙니다.
흔히 "모두가 먹고 살자고 하는 일인데…"라고 말합니다. 인간의 원초적 과제들을 의·식·주로 나누어 그럴 듯하게 분화하였지만, 그건 어느 정도 문명화된 시기의 이야기이고, 사실은 식(食)의 문제, 곧 먹을거리 문제가 인간 실존의 근원입니다.
먹을거리 문제는 질서와 규범 속에서 평화롭게 조절돼 가는 것 같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그렇지도 않습니다. 매일 매일의 사회면 기사의 행간을 뜯어보면 그 이면에는 모두 먹는 문제가 개재되어 있고, 국가 사이의 전쟁, 민족 사이의 분쟁도 땅과 자원의 문제가 대부분을 차지하니, 그 끝을 파보면 결국 먹는 문제라 할 수 있습니다.
<아는 만큼 맛있다>
우리 사회는 이제 먹을거리 문제의 극단에서는 벗어나 있습니다. 그러나 먹을거리의 질과 독점을 둘러싸고는 계속 갈등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또 거대 식품산업이나 외식사업 등에서 양산되는 각종 인스턴트 식품들이 우리 식탁에 도전해 오고 있고, 세계 각국의 먹을거리들도 그 나라의 문화요소들과 함께 물밀듯이 들어오고 있습니다.
이러한 먹을거리의 홍수 속에서 음식문화학교는 우리 전통 먹을거리를 낳게 한 사회문화적 배경, 그리고 특정 먹을거리와 그를 갈무리하는 맛깔스런 음식점, 그리고 그 주인과 공동체에 얽힌 이야기를 탐구하고자 합니다.
곧 '먹을거리 이야기'를 넘어 '이야기가 있는 먹을거리'를 찾는 여정이 음식문화학교가 가고자 하는 방향입니다. 문화유산 답사의 개척자 유홍준 교수는 "아는 만큼 보인다"고 했습니다. 유 교수의 어법을 빌려 말한다면, 음식도 아는 만큼 맛있습니다.
<음식문화학교는...>
음식문화학교는 요리법을 가르치는 곳이 아닙니다. 음식문화학교는 문화 속의 음식, 음식 속의 문화를 탐구하고자 합니다. 따라서 음식문화학교는 음식의 현장을 찾아가 문화를 즐기거나, 문화의 현장을 찾아가 음식을 즐기는 기행의 형식으로 진행합니다. 곧 '금강산과 식후경의 조화'가 저희 음식문화학교의 교훈입니다.
앞으로 김치, 젓갈, 된장, 두부, 등심, 갈비, 불고기, 육회, 토종닭, 홍어, 비빔밥, 산나물, 막걸리 등 숱한 우리 전통 먹을거리의 명품, 명소를 찾는 기행이 쭉 이어집니다. 전문가 또는 교장의 음식문화 강의 후 맛있는 음식을 즐기게 되며, 재래시장 장보기, 산나물 뜯기, 쭈꾸미 잡기, 콩 털기 등의 체험행사도 함께 하며 유명 음식축제 여행으로 변화를 꾀하기도 하겠습니다.
음식문화학교는 월 1회, 매월 셋째 토요일에 여는 것을 원칙으로 하되, 사정(명절, 연휴, 장날, 음식축제 등)에 따라 날짜를 옮길 수도 있습니다. 수도권은 웬만하면 대중교통을 이용하며 당분간은 당일 코스로 한정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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