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용(無用)의 힘으로 그 어떤 실용보다 권능을 발휘하는 철학의 가치를 알고 싶은 젊은이들, 현실의 모순을 고민하며 삶의 의미를 찾기 위해 분투하는 시민 등 50여 명이 지난 10일 저녁 프레시안 강의실에 모였다. 한국철학사상연구회와 프레시안이 함께 연 서양근대철학사 강좌를 참여하기 위해서였다. 모두 12차례에 걸쳐 매주 목요일 저녁 7시 30분에 열리는 이 강좌의 강연 내용을 한철연 조배준 간사의 글을 통해 소개한다. 편집자
오늘날의 철학은 분과된 학문체계 속에서 아직 혼수상태에 빠져 있지만, 다소 심하게 말하면 대학에서는 박제화된 채로 관련 업계 종사자들의 밥벌이를 위해 여전히 열심히 사상담론 수입유통업자 노릇을 자처하며 그 대를 이어가고 있다. 신비화된 도그마를 통하지 않고 우리의 눈으로 이 세계를 조망하려는 것이 근대라는 역사적 시공간의 기원이듯이, 철학사 또한 이 땅에 살고 있는 이 시대 사람들의 눈으로 다시 구성되고 새롭게 쓰여져야 할 것이다. 철학함의 관점이 결코 절대화·정식화될 수 없다면, 철학사도 대상화된 상품이나 관상식물화된 케케묵은 고담준론이 되어서는 안 된다. 관상식물은 맑고 싱그럽기나 하지.
인간과 무관하게 독립적으로 운행할 뿐인 정지된 세계는 '비극'을 낳는다. 마찬가지로 오늘의 문제와 손을 잡지 못하는 철학은 인류 지성사의 기념비, 전설만 남은 죽은 지식들의 거대한 무덤이 될 뿐이다. 오늘 이 세계에서 문제화된 문제는 나 자신이 오늘 고통스럽고 불안하고 화가 나는 풀릴 것 같지 않은 그 소소한 문제들의 근원과 연결되어 있다. '나'라는 존재는 저 먼 공간에서 온 우주의 역사, 인류의 장구한 진화와 자기 깨우침의 역사를 이미 포함하고 있다. 세계와 인간의 그 망각된 관계는 소외와 회의감, 무력감을 줄 뿐이다.
이 철학 강좌는 죽은 철학자들이 가졌던 당대의 문제의식들을 통해 오늘날의 문제들을 내 힘으로 생각해보자는 뜻에서 기획되었다. 그리고 이 연재 글은 나중에 책으로 묶여 나올 강좌이지만 먼저 강좌의 뒷이야기를 독자들과 조금이나마 나누려는 마음에서 시작되었다. 시대 변화를 반영하며 우리의 역사적 현실을 사상적으로 역추적해보는 과정 속에서 우리의 문제를 새롭게 인식하고 그것을 다시 나만의 질문으로 만들어 내보자. 본래 철학함이란 바로 그런 것이 아니던가.
▲ 열강 중인 최종덕 상지대 교수 ⓒ프레시안 |
비극에서 희극으로, 혹은 지배의 철학에서 자유의 철학으로
첫 강의에서는 절대화되고 결정된 방식으로 세계를 설명하는 플라톤 철학에 대한 비극적 인식의 비유로 고대 희곡의 '비극'이 사용되었다. '차갑고 건조하고 색깔이 없는' 세계에서는 오직 완전하고 독립적인 존재만 상정되는데, 그 이데아의 세계에서 자연과 인간의 다채로운 삶은 늘 종속되고 열등한 것으로 취급되었다. 적어도 우리가 'modern'이라고 부르는 시대를 인간이 스스로의 힘으로 열기 전까지는 말이다.
비극적인 세계는 인간의 의지와는 무관한 법칙적 운행구조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고 그 절대적인 세계의 질서에 개입할 수 없다면 인간은 소외되고 회의감에 빠지며 무기력해질 수밖에 없는 곳이다. 그곳은 인간관계에서 생기는 갈등과 아픔, 고민과 우연들에 섭동하거나 공조하지 않는다. 이에 반해 절대적이고 완전한 세계에서 실패할 수밖에 없는 운명인 것을 알면서도 그 벽을 뛰어 넘기 위해 끊임없이 도전하고 스스로의 한계를 시험하는 주체는 희극적인 세계의 출발점이며, 그 안엔 숭고미가 짙게 흐른다.
우리가 실제로 살아가는 세계는 끊임없이 모든 사물들이 변화하고 뭇 생명들이 태어나고 죽고 다시 태어나는 곳이며, 따뜻하고 축축하고 다채로우며 모순이 산재해 있고 목적도 끝도 없는 곳이다. 그 리얼한 세계를 바로 보기 위해, 그 세계에 다가가서 스스로 관찰하고 세계를 이해하는 새로운 질서와 원리를 만들어내는 과정이 바로 최종덕 교수가 말하는 희극의 재탄생, 근대의 출발점이다. 그런데 우리는 왜 자꾸 근대가 무엇인지 궁금해 하고 그 역사적 시대가 만들어낸 가치들의 총체인 근대성과 근대철학에 물음을 던지는가. 바로 그것이 오늘날 우리들의 삶을 규정하고 현대사회를 구성한 첫 번째 단추로서 역사적 변곡점이기 때문이 아닐까.
세계를 구성하는 최초이자 궁극적인 요소(arche)와 그 운행 법칙을 설명하기 위해 물질적인 질료성을 거부하고 완전한 존재가 실재하는 세계를 설정하고, 그 세계에 조금이라도 접근하기 위해 인간이 수학적이고 기하하적인 이성의 지배를 받도록 만든 플라톤은 비극의 창시자이다. 이에 반해 아리스토텔레스는 저쪽 세계를 엿보는 인간의 인식 도구로 과학적 사유를 열어 놓으며 동시에 '희극'의 틈도 열어 놓았다. 중세의 역사는 기도를 통한 구원의 믿음을 통해 완전한 비극을 방지했지만, 신의 세계가 인간의 합리화된 언어와 인식의 영역 안에서 설명되는 것을 막기 위해 다시 희극을 봉쇄했다.
그러나 르네상스 이후 베이컨은 세계에 대한 경험적인 인식의 가능성을 열어 놓으며 근대의 포문을 열었다. 신비화된 존재만이 주체로 우뚝 서는 것이 아니라 바로 인간이 주체가 되어 그 존재를 객체로 바라보아야 한다는 새로운 인식의 세상이 열린 것이다. 그것은 누구도 막을 수 없는 인류 역사의 진보이자 자신과 세계를 스스로의 힘으로 인식하려는 거대한 운동이었다. 4가지 정신의 우상을 비판하는 베이컨의 사상은 신과 형이상학으로부터 해방되기 위해 노력한 이후 수백년간의 인간 등정의 역사를 예감하는 것이었다. 이어 인간이 스스로 자연을 지배하는 방법론을 정립하는데 뉴턴은 결정적인 역할을 했고 그것이 바로 서구 근대과학의 탄생이었다. 그를 위대하게 평가하는 것은 수학적으로 표시되는 물질로부터 비물리적인 의지를 제거시켰다는 점에 있다.
뉴턴은 인간의 인식을 배제하려 하지 않고 인간의 명확한 인식을 가로 막는 우상들을 배제하려고 했다. 또한 그는 생명의 세계를 부정한 것이 아니라 단지 이 세계 가운데 물질의 운동을 설명하기 위한 수단으로서만 물질을 기하학적 대상으로 치환했다. 그런 점에서 근대가 남긴 문제들이 단순히 뉴턴의 기계적인 세계관에서 연유한다고 보는 것은 잘못이다. 데카르트는 인간의 자유와 영혼을 제외한 일체의 생명적인 것도 기계적인 것으로 환원시킬 수 있다고 보았지만, 뉴턴은 오직 경험적으로 탐구 가능한 사물의 운동에 대해서만 관심을 가졌다.
이러한 '비극'과 '희극'의 세계관은 완성된 존재자만이 자유로운 세계에서 자유로운 존재자의 세계로, 아폴론적 세계로부터 디오니소스적 세계로, 파르메니데스의 정지된 세계로부터 헤라클레이토스의 운동하는 세계로, 플라톤의 이상적 세계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현실적 세계로의 이행이라는 측면에서 고대 그리스적 세계관에 이미 축적되어 있던 두 세계관이자, 서양철학사의 태초부터 그 변화의 방향이 이미 새겨져 있던 예언이었다. 신의 권능을 믿는 대신 수학적 이성의 생각하는 힘을 믿는 세계, 미리 만들어진 '정답'을 거부하고 진정한 인간이 누릴 수 있는 로고스를 찾아가고 사회적으로 구성한 세계, 그것이 700만년 인류 역사상 초유의 사태를 매일 만들어가는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기원이다.
그런데 근대의 과학혁명에서 산업혁명으로 이전되는 가장 중요한 계기이자 근대의 가장 중요한 동력은 자본의 축적이었다. 자본의 팽창과 과학기술의 산업화는 서로를 순환적으로 촉진시켰다. 자본은 국가권력과 결합하여 인간과 자연을 지배하는 가장 강력한 실질적인 존재자가 된 것이다. 그리고 그 자본을 비호하기 위해 존재하는 세계관은 오늘날 주류 철학이 되었다. 그것은 일제강점 시대에 주입된 은둔과 순응, 체념을 은연중에 강요하는 노장사상에 대한 오늘날 일반적 해석처럼, 지배자들과 기득권층을 위한 철학이다. 한편 19세기 이후 서양의 물리적·경제적 힘에 제압당한 동양은 서양의 시간적 틀이 절대적인 것인양 그것에 끼워 맞춰 자신들의 역사를 구분하고 동시대를 규정했다.
근대인은 하늘의 반짝이는 별이 나그네의 길을 안내하는 낭만적 세계와 푸른 숲과 어머니 자궁으로서의 지구와 직접 조우하는 자유로움을 잃어버린 대신에 풍요와 편리와 감각적 쾌락을 충분히 얻었다. 세계를 분해하고 횡단할 수 있는 도구를 가지게 되었지만, 결국 그들이 여전히 찾아 헤매고 있는 것은 그것으로 볼 수 없는 따뜻하고 축축하고 다채로운 안식처가 아닐까. 결코 상품화시킬 수 없는, 그 무엇 말이다.
▲ 최종덕 상지대 교수 ⓒ프레시안 |
현대 생태위기와 인간위기의 정체
어디까지나 '근대'라는 시공간은 신의 비밀이 담긴 이 세계의 질서와 법칙을 인간이 살짝 엿보고 그 열매를 얻어낸 것이 아니라, 인간 스스로의 눈으로 그 세계를 관찰하고 그들의 언어와 기호로 운행의 법칙을 만들어 온 역사였다. 그런 점에서 강좌에서 어느 질문자가 표현한 '비극과 희극의 공존'을 가능케 하는 새로운 세계관이 요청되고 있다. 하지만 그 거대한 역사의 물결을 관조하기 위해선 우선 당면한 이 땅의 문제들부터 찬찬히 들여다보고 낮은 곳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야 하리라. 우리가 현실이라고 부르는 이곳엔 연역법으로 치장한 채 질문과 다른 목소리를 배제하는 가짜 법칙과 우상들이 상징권력을 휘두르며 환상으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근대의 깨우침이 세계를 요리하기 위해 우리에게 쥐어 준 '칼'인 연역법은 정치가 아닌 수학에서만 사용되어야 한다. 플라톤적 사유와 히틀러, 그리고 이 땅의 '가카'가 공유하는 것이 있다면 독재적 사유방식일 것이다. 존재자를 신비화시키고 현실 전체를 점령하려는 권력의지가 만들어 온 어두운 역사는 기도를 통한 구원의 믿음이 절대적이던 중세보다 더 참혹하다.
또한 현대 생태위기와 인간위기의 근본 원인을 데카르트나 뉴턴의 근대적 세계관의 책임으로만 돌리는 것은 역사적으로나 사상사적으로나 비겁한 일이다. 또한 그것은 산업화되고 금융화된 자본의 탐욕과 그것을 분유한 근대인의 욕망 구조를 화폐의 물신성처럼 누구나 알면서도 모두가 모르게 은폐하는 것이다. 아쉽게도 근대의 기원을 잘 이해한다고 해서 근대가 처한 전반적인 문명 위기의 해법을 쉽게 찾을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자본을 위한 권력을 직시하고 자본의 이윤을 위해 소외된 우리들 대다수의 삶을 주체적으로 찾아가기 위해 이 철학 강좌는 계속될 것이다.
'꼼수'와 '국익'이 아직도 먹히는 대한민국에서 한미FTA의 묻지마식 국회 통과를 다시 생각한다. 스스로 생각하지 못하게 만드는 것들, 우리를 체념하게 만드는 것들, 고민하고 번뇌할 필요가 없다고 말하는 온갖 억압과 유혹과 싸울 필요가 있다는 점에서 우리는 여전히, '근대'에 살고 있다.
* 다음 번 강의는 17일 저녁 7시 30분, 이병창 동아대 명예교수의 '내가 알고 있는 것을 의심하라 - 근대적 자아의 탄생 : 데카르트'입니다.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