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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의 아름다움을 품은...황홀지경의 명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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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의 아름다움을 품은...황홀지경의 명산"

[알림]<백두대간12걸작선>11 <조령산 구간> 참가 안내

백두대간학교(교장 최창남)의 <백두대간12걸작선(傑作選)> 열한 번째 코스는 <조령산 구간>입니다. 9월 24일(토), 경북 문경과 충북 괴산을 잇는 이화령에서 산길로 들어선 후 조령산과 신선암봉을 지나 조령관문으로 내려옵니다. 울창한 숲, 거대한 암벽과 아득하기만 한 너른 계곡, 손을 뻗으면 닿을 것 같은 맑고 깊은 하늘과 그 모든 것이 어우러진 아름다움을 품고 있는 산이 조령산입니다. 한마디로 황홀지경의 산입니다. 신선암봉이라는 이름을 굳이 빌리지 않더라도 산마루에 올라서면 황홀함에 취해 신선이 된 듯 마음이 절로 깊고 넓고 아득해지는 산입니다.

▲가을이어서 더욱 아름다운 조령산 능선 Ⓒ백두대간학교

최창남 교장선생님은 백두대간 전문가이며 작가, 작곡가이기도 합니다. 2008년 백두대간을 종주하며 인문학적 산행기를 <프레시안>에 연재했습니다. <백두대간 하늘길에 서다> 등 다수의 책을 출간하였으며 <노동의 새벽> <저 놀부 두 손에 떡 들고> 등 민중가요들을 작곡하였습니다.

[산행지 안내]

지리산에서 흘러들기 시작한 백두대간 산줄기는 덕유산과 속리산과 희양산을 지나 조령산을 만들어 놓았습니다. 희양산에서 백화산을 지나고 갈미봉에서 내려서면 옛 사람들이 '이우릿재'라고 불렀던 이화령입니다. 그 이화령에서 조령산으로 들어갑니다.

조령산은 충북 괴산군 연풍면과 경북 문경시 문경읍 경계선상에 위치해 있는 있습니다. 어떤 이유에서인지 알 수 없으나 예전에는 산과는 어울리지 않는 '공정산'이라는 운치 없는 이름으로 불리기도 했습니다. 조령산은 울창한 숲과 거대한 암벽, 기묘한 모양의 바위와 절묘한 봉우리 그리고 노송 등이 어울려 눈길 닿는 곳마다 한 폭의 그림이 펼쳐지는 천하절경의 명산입니다. 주위에 신선봉과 주흘산을 거느리고 있으며 북쪽으로는 월악산, 문수봉, 소백산 등으로 이어지고 남쪽은 속리산으로 이어집니다.

이화령에서 산길로 들어서 맑고 싱그러운 기운 가득한 숲을 느끼며, 산허리를 따라 난 너덜길을 걷다 보면 이내 눈부시고 가슴 시리도록 맑은 물을 품고 있는 조령샘입니다. 맑은 물 한 모금으로 마음 씻고 몸 식힌 후 깊은 조령의 숲과 함께 산길을 걷습니다. 삶과 죽임이 하나인 숲, 서로 다른 삶과 죽음의 모습을 지니고 있기에 서로를 살리고 있는 숲, 서로 다른 삶을 살아가고 있기에 모두가 하나인 숲, 서로 다른 생명의 모습을 지니고 있기에 모두를 살릴 수 있는 생명력 넘치는 깊고 유려한 숲과 함께 걷습니다.

그렇게 숲과 바위 사이로 난 길 따라 걷다 보면 조령산입니다. 정상 한편에는 나무로 만든 작은 비목이 세워져 있습니다. 황홀지경을 품은 이 산에 마음을 빼앗겨 1999년 4월 히말라야 안나푸르나에서 불꽃같은 짧은 생을 마감한 여성 산악인 지현옥의 추모비입니다.

그 아름다운 영혼 앞에 마음 한 자락 내려놓고 산줄기를 따라 흐르면 이내 신선암봉입니다. 바위에 올라앉으면 그대로 신선입니다. 눈앞은 기암괴석들과 깊은 골들이 어우러져 기묘하고 장엄합니다. 비라도 내린 후면 골마다 피어오르는 운무까지 더해져 신비롭기 이를 데 없습니다. 그저 황홀하다는 말 외에 더할 말이 없습니다. 참으로 신선들이나 머물 수 있는 선경입니다.

황홀한 아름다움에 아쉬워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재촉하여 형제삼봉으로 향합니다. 좁은 산길과 거대한 바위 위로 난 길은 형제삼봉을 넘어서며 넓어지고 편안해집니다. 그 길 따라 내려서면 조령3관문인 조령관입니다. 임진왜란 당시의 슬픈 역사가 담겨 있는 곳입니다.

'문경새재'라고 부르는 새재가 바로 이곳입니다. 선조 25년 임진왜란 당시 가토 기요마사와 고니시 유키나가의 진격을 막기 위해 내려왔던 조선의 장수 신립이 이곳을 지키지 못해 온 나라가 전란에 휩싸이게 되는 슬픈 역사의 현장입니다.

신립은 천혜의 요새인 새재를 지키지 않고 충주 탄금대로 물러나 배수진을 치고 왜적을 막았으나 전멸하고 말았습니다. 자신이 거느린 기마병을 믿고 택한 전술이었지만 상황에 맞는 전술이 아니었습니다. 그가 선택한 지형은 저습지였고 전날 비까지 내려 온통 진흙탕이었기 때문입니다. 말도 보병도 자유롭게 움직일 수 없었으니 왜적의 조총에 일방적으로 당한 것은 당연한 결과였습니다.

윤제학은 그의 책 <산은 사람을 기른다>에서 신립의 이해할 수 없는 전술과 관련한 전설을 하나 전하고 있습니다. 선조의 명을 받고 내려온 신립은 새재를 지키려고 했는데 꿈에 한 처녀가 나타나 탄금대에 배수진을 칠 것을 호소하였고, 신립은 그 처녀의 말대로 했다가 전멸했다는 것입니다. 그 처녀는 일찍이 주흘산의 요귀로부터 신립이 구해준 처녀였는데, 자신의 연정을 신립이 받아들이지 않자 원한을 품고 스스로 목숨을 끊어 원귀가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전설을 소개한 후에 재미있는 촌평도 달아 놓았습니다.

"어쩌면 처녀귀신은 삼척동자라도 당연히 구사했어야 할 전술을 포기한 신립(지배자)에 대한 민중들의 원망과 비웃음의 상징이 아닐까. 모름지기 우두머리가 된 사람이라면 마땅히 여럿의 목소리에 귀 기울일 일이다. 산은 참 별 것도 다 가르쳐준다."

통찰력 있는 해석입니다. 하지만 한 나라의 존망을 결정하다시피 한 전쟁에서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처녀귀신 이야기를 만들어낸 민초들의 마음을 살펴보면 윤제학의 해석과는 또 다른 마음을 엿볼 수 있습니다. 원망과 비웃음보다는 이해할 수 없는 선택을 했던 신립의 행동을 억지로라도 이해하기 위한 슬픈 노력이 아니었을까요? 그렇게 해서라도, 억지로라도 이해하지 않으면 그들의 처지가 너무 슬프고 비참했을 것이니 말입니다.

조령관은 슬픈 역사를 담고 있지만 주변 풍경은 참으로 아름답습니다. 옛 선비들이 과거를 보기 위해 넘던 옛길도 남아 있고, 당시 그들이 읊었던 시들도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조령관 바로 옆에 '백수영천'이라고 전해지는 조령약수가 있습니다. 아득한 조령의 황홀지경을 넘느라 지친 몸을 달래주는 약수입니다. 한 잔 가득히 드시기 바랍니다. 조령샘물을 마시고 조령산 신선의 세계에 들었다가 내려와 백수영천이라는 조령 약수를 마시니 그 아니 즐겁겠습니까.

맑은 샘물과 깊은 숲, 거대한 암벽과 기묘한 바위들, 깊은 계곡과 아득한 하늘 어우러진 황홀지경이 바로 조령산입니다.

▶구간 소개

-산행코스 : 이화령-조령샘-조령산-신선암봉-깃대봉-조령3관문-조령산자연휴양림 입구
-고사리 주차장
-산행거리 : 약 12km
-소요시간 : 약 7시간 40분(충분한 휴식시간 포함)

<산행지도 : 조령산 구간>


[산행계획]

여유 있는 산행을 위해 일찍 출발합니다. 모든 산행은 전문산악가이드 두 분이 '안전제일'로 진행합니다. 산악가이드 김남균 선생님은 백두대간을 7회 종주한 공인 등산안내인이고, 이철승 선생님은 백두대간 종주 등 산행 경력 29년의 공인 등산안내인입니다.

<버스운행>

출발 10분 전에 도착하여 버스에 탑승하세요. 버스 앞에 <백두대간학교> 표지가 붙어 있습니다. 김종선 기사님 전화번호는 010-4152-1055 입니다.

01:00 덕수궁 대한문 앞 출발(지하철 1,2호선 시청 2번 출구)
01:30 사당역 출발(지하철 2,4호선 1번 출구)
01:40 양재역 출발(지하철 3호선 8번 출구)
02:00 경부고속도로 죽전 버스승차장

<산행일정>

05:00 충북 괴산군 연풍IC 도착/아침식사, 도시락 싸기
연풍식당 : 충북 괴산군 연풍면 삼풍리 203-5/043-833-5155
아침 메뉴 : 올갱이해장국 등
07:00 이화령 출발, 산행 시작 - 여유롭게 산행
08:00 조령샘
08:40 조령산
10:00 신선암봉
11:00 안부 점심식사
13:30 깃대봉
14:00 조령3관문
14:30 조령산 자연휴양림 입구
14:40 고사리 주차장
15:00 문경식당 : 경북 문경시 문경읍 상초리 288-16/054-571-3044
메뉴 : 오미자한방백숙과 막걸리 등으로 뒤풀이
16:00 서울 출발
19:00 서울 도착(예정)

*상기 시간일정은 상황에 따라 변경될 수 있습니다.

[산행준비물]

-등산복, 장갑, 등산모, 방풍의, 우의, 스틱, 물통, 여벌 옷, 간식, 자외선차단제, 헤드렌턴, 산행 중 드실 수 있는 간단한 간식(예 : 쵸코바, 과일 등). 빈 도시락과 수저를 반드시 지참하세요.

[산행자료]

[이화령(이우릿재, 529m)] 이화령은 경북 문경과 충북 괴산을 잇는 고개이다. 이화현으로 불리던, 사람 통행이 적은 조그만 고갯길이었다. 그 고갯길이 1925년 일제에 의해 신작로로 개설되면서부터 중부와 영남을 잇는 새로운 동맥으로 급부상하였다. 당시 한국민들에게 중요한 의미를 갖던 영남대로의 기(氣)를 꺾기 위해 일제가 의도적으로 조령 근처에 신작로를 만든 것이라 한다. 실제 이화령이 개설된 후 양조장과 시장이 설 정도로 번성했던 조령의 풍요는 마감됐고, 이후 조령 근처 상초리 사람들은 화전(火田)으로 먹고 살아야 했다 한다.
하늘재가 신라와 고려 시대에, 조령이 조선시대에 고개로서의 역할을 담당했다면, 이화령은 근대에 그 역할을 담당했던 곳이다. 해방 이후에는 3번국도가 쉬었다 넘는 고갯마루로 번성하였으나, 1998년 고갯길 아래로 이화령터널이 뚫려, 점차 잊혀지기 시작하였다. 그러다 2004년에는 중부내륙고속도로에 터널길을 또 내어주고, 이제는 등산객들 아니면 찾는 이 없는 쓸쓸한 고개로 전락했다.
-이화(梨花, 伊火)
조령산 남쪽에 위치한 '이화령' 속칭 '이우릿재'는 <조선세종실록> 지리지 문경조 및 <동국여지승람> <대동지지> 등의 역대 지리지 문경조 기록에 의하면, 조선시대에는 이화현(伊火峴)으로 표기하던 고개 이름인데, 그 의미는 분명치 않다.
현재의 이화령(梨花嶺) 표기는 조선총독부에서 1914~18년에 걸쳐 조사 제작한 근세 한국 5만분지1 지형도에서 잘못 표기한 것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는 것으로, 본래의 의미가 변질된 표기다. 1929년에 김유동이 저술 간행한 <팔도명승고적> 문경군조에도 이화현(伊火峴)으로 표기하고 있음을 살필 수 있다.
이화령은 <증보문헌비고> 권119 병고(兵考)에 보이는, 조선 숙종 31년(1705)조 기사에 의하면, 이오령(伊吾嶺)으로도 표기하고 있다. 이는 아마도 방언 상에서 이화령→아와령→이오령으로 전음되어 일컬어지던 것을 소리 나는 그대로 표기한 것으로 추측된다.
이화령의 속칭 '이우릿재'도 이화령 부근의 동리 이름을 따서 이화리의 고개란 뜻으로 이화릿재라 일컫던 말이 이와릿재→이우릿재로 전음된 것이거나, 또는 이화(伊火)의 음과 훈(訓)이 혼용된 이불(벌)재, 이부릿재→이우릿재로 전음된 것이 아닐까 한다. 음과 훈이 혼용되어 일컬어지는 땅 이름 용례는 우리 땅이름에 흔히 보이는 것으로, 예컨대 하늘재 동남쪽 문경읍 갈평리의 갈평(葛坪)도 속칭 갈벌이라 일컫기도 하는 것과 같은 예이다.
또는 이화령은 '아득하다, 희미하다'의 옛말 '입다'의 고형태인 '이블다(이울다)'에서 '이블'을 취하여 아득한 고개라는 뜻으로 이블재[伊火峴]라 일컫던 것이 전음되어 이울재→이우릿재라 일컫던 고개 이름이 아닐까 생각되기도 하였다.
문경시청이 최근 '이화령'이란 지명을 폐기하고 '이우릿재'라는 전래 명칭을 되살렸다. 일제에 의해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것을 버리고 오랜 세월 우리 조상들이 걸어 넘던 오솔길일 때의 이름을 선택한 것은 참으로 반가운 일이다(2007년).
신동길 지음 <뫼따라 하늘가지>에는 이렇게 Tm여 있다. 추풍령과 죽령 사이에 위치하며 중부 내륙을 남북으로 관통한다. 조령의 대체도로로 이용된다. 원래는 '이우리고개'였던 것을 지난 1925년에 신작로 형태로 개통하면서 이화령으로 개명했다. 고갯길 연변의 배꽃이 아름답다고 해서 당시 총독부에서 붙인 이름이다. 지금은 터널이 뚫려 옛 고개에는 관광차량만 가끔 지나간다. 한때는 조령과 구분하는 말로 '큰새재'라고도 불렀다.




[조령산(1025m)] 충북 괴산군 연풍면과 경북 문경시 문경읍의 경계선상에 자리잡은 명산으로, 예전에는 공정산(公正山)으로 불리웠다.
전체적으로는 산림이 울창하며 대암벽지대가 많고 기암괴봉이 노송과 어울려 마치 그림 같다. 능선 남쪽 백화산과의 경계에는 이화령이 있고 능선 북쪽 마역봉과의 경계가 되는 구새재에는 조령3관문(조령관)이 있으며, 관문 서편에는 조령산 자연휴양림이 조성되어 있다. 3관문이 위치한 곳은 해발 642m로서 예로부터 문경새재라 일컬어지고 있다. 이를 통해 영남지방과 중부지방이 연결되어 교통의 요지였을 뿐 아니라, 험난한 지세를 이용할 수 있어 군사상의 요충지이기도 하였다. 주능선 상에는 정상 북쪽으로 신선봉과 치마바위봉을 비롯하여 대소 암봉과 암벽지대가 많다. 능선 서편으로는 수옥폭포와 용송골, 절골, 심기골 등 아름다운 계곡이 발달되어 있다. 능선 동쪽을 흐르는 조령천 곁을 따라 만들어진 길은 조선조 제3대 태종이 국도로 지정한 간선도로였으며, 주흘관(1관문), 조곡관(2관문), 원터, 교구정터 등의 사적지가 있고 완만하게 흐르는 계곡에는 와폭과 담이 산재하여 있다. 현재 이 일대는 문경새재도립공원으로 지정되어 있으며 수안보온천, 월악산국립공원과 가깝다.




[고(故) 지현옥 추모비] 조령산 산정에는 정상임을 알리는 팻말과 더불어 안나푸르나에서 짧은 생을 마감한 여성 산악인 지현옥을 기리는 추모팻말이 서 있다. 대학에 입학하기 전까지만 해도 산에 문외한이었던 지현옥은 이곳에서 암벽등반에 빠진 뒤 산악인이 됐다고 한다. 그녀는 에베레스트 등정과 가셔브럼Ⅱ봉(8035m) 무산소 단독 등반 등, 여성으로는 믿지 못할 기록을 남긴 채 1999년 4월 히말라야 안나푸르나에서 짧은 생을 마감했다.
지현옥이 활발하게 활동하던 1990년대는 여성이 전문 산악인으로 활동하는 것이 매우 어려웠다. "여자가 무슨 산이야!" 하는 곱지 않은 시선이 남성 산악인은 물론 사회 전반적으로 팽배해 있었다. 게다가 여성 산악인을 후원하려는 업체가 없어 원정 비용을 조달하는 것조차 힘들었다. 실제로 지현옥은 대학 후배들과 텐트와 유자차 등을 팔아 원정 비용을 마련했다.
1993년 한국여성에베레스트원정대의 대장으로 뽑힌 지현옥은 일부 남성 산악인들의 도를 넘는 간섭과 우월의식 속에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차별과 좌절을 겪는다. 그렇지만 지현옥은 보란 듯이 여성원정대를 이끌고 세계 최고봉 등정에 성공해 후배 여성 산악인들이 활동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한다. 훗날 지현옥은 당시의 힘들었던 상황을 다음과 같이 표현하기도 했다.
"에베레스트는 또 다른 나를 발견하는 시험무대였다. 온몸을 갈기갈기 찢을 것 같던 육체적 고통을 첫 원정에서 체험했다면 에베레스트에서는 넘을 수 없는 사회적 편견을 넘어가야만 했다. 여성 등반가를 바라보는 사회적 시선 앞에서 좌절의 고통과 서러움을 이겨내고서야 에베레스트로 가는 길은 열렸다. 그런 사회적 냉소와 질시에 비하면 시체가 나뒹구는 에베레스트 사우스콜의 죽음의 공기도 견딜 만했다. 여자끼리만의 오기로 뭉쳐진 팀을 이끌었고, 나는 그 모든 고통으로부터 자신을 견뎌내게 하는 데 성공했다."
지현옥(1959~99년)은 대한민국 논산 출신의 여성 산악인이다. 등반 경력은 1988년과 1993년, 대한민국 여성으로는 처음으로 매킨리산와 에베레스트산 등정에 성공했다. 1999년 엄홍길과 함께 안나푸르나 등정한 후에, 하산 중 실종되었다. (위키백과)




[신선암봉(937m)] 신선암봉과 깃대봉은 조령산 주능선상의 북쪽 방향에 있는 바위층이 많은 산이며, 조령산 구간 중에서 어려운 암릉 코스에 속한다. 그리고 깃대봉은 조령3관문의 서남 방향의 능선에 가까이 보이는 봉우리로 그 모습이 깃대처럼 뾰족하게 솟아올라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깃대봉의 정상 남서면은 치마바위봉이라 부르기도 한다.
신선암봉은 조령산과 새재(조령3관문)의 중간정도에 위치해 있으며 능선상의 암봉에 불과하지만 괴산군에서는 '괴산의 명산'이라고 하면서 별도 소개하고 있기도 하다.


▲조령산과 신선암봉 Ⓒ백두대간학교

[깃대봉(치마바위)] 산 이름은 정상 일대에 있는 화강암 절벽이 치마를 펼친 듯하다 하여 생겨났으며, 산 모습이 깃대처럼 뾰족하다 하여 깃대봉이라고도 한다. 조령산 정상 북쪽 능선에 있다.



[조령(650m)] 조령은 다른 이름으로 새재라고도 불리는데,
1. 새도 날아서 넘기 힘들어 쉬어 가는 험하고 높은 고개
2. 새(억새)가 우거진 고개(草岾)-<고려사> 기록
"새재 골짜기 마을 이름을 살펴보면 조선시대 초곡방(草谷坊)으로 정했고, 현재까지도 상초리(上草理) 하초리(下草理)로 불리는 것을 보면 이 지역에 새(억새)가 많았던 모양이다."
3. 하늘재와 이우리재(이화령) 사이(새)의 고개
4. '새로 생긴(新) 고개'라는 뜻
일찍이 신라 때부터 영로가 개통된 계립령과 죽령이 옛 고개, 묵은 고개임에 비해 늦게 생긴 고개, 새로 생긴 고개라는 것. 조선시대부터 영남에서 한양으로 통하는 가장 큰 대로(영남대로)로서 '영남'이란 명칭도 조령의 남쪽지방이란 뜻이다.
5. 비지재, 비조령(飛鳥嶺)이라고도 부르는데, 이는 영산골에서 평천리로 넘어가는 주흘산 중턱에 위치한 고개로 옛날에 비조룡(飛鳥嶺)이라고 하는 전설상의 새가 영산골에서 평천으로 넘어가려고 날아가다 주흘산에 가로막혀 단숨에 넘지 못하고 정상에서 쉬어 넘었다고 하여 비조령이라 하였다는 전설이 있다. 또한 1700년경에는 최완룡이라는 사람이 이곳에 정착하여 생활하면서 이 재를 비지재라고 불렀다 한다.(mg80.invil.org/문경새재 마을 소개 중)
6. 문인들이 좀더 멋스럽게 표현하는 과정에서 조령이라는 이름을 얻은 듯하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조령(鳥嶺)'으로 표기되어 있다.




[조령관문]
1. 주흘관(主屹關)-영남제1관
남쪽의 적을 막기 위해 숙종 34년(1708)에 설관하였다. 개울물을 흘러 보내는 수구문이 있으며 3개의 관문 중 옛 모습을 가장 잘 지니고 있다.
2. 조곡관(鳥谷關)-영남제2관
선조 27년(1594)에 충주인 신충원이 축성한 곳으로 중성(中城)이라고도 한다. 숙종조에 관방을 설치할 때 옛 성을 개축하였으나 관(關)은 영성(嶺城 : 3관문)과 초곡성(草谷城 : 1관문)에만 설치하고 이곳에는 조동문(鳥東門) 또는 주서문(主西門)을 설치하였다. 그후 1907년에 훼손되어 1975년에 복원하였다. 이렇게 복원한 문루를 옛 이름 조동문(鳥東門)이라 하지 않고 조곡관(鳥谷關)이라 개칭하였다.
3. 조령관(鳥嶺關)-영남제3관
새재 정상에 위치하고 있으며 북쪽의 적을 막기 위하여 선조 초에 쌓고 숙종(숙종 34년 : 1708) 때 중창하였다. 1907년에 훼손되어 육축(陸築)만 남고 불탄 것을 1976년도에 홍예문 및 석성 135m와 누각을 복원했다.
조령관문은 조선 선조 25년(1592) 임진왜란 때 왜장 고니시 유끼나가가 경주에서 북상해 오는 카토오 키요마사의 군사와 합류했던 곳으로 군사적으로 중요한 지점이었다. 이 때 조정에서는 이곳을 지켜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신립 장군은 이미 때가 늦었다고 판단하여 충주로 후퇴하였다. 그 후 선조 30년(1597) 2월 충주에서 일어난 의병장 신충원이 파수관으로 임명되어 응암의 일자성(一字城)을 쌓고 가운데 문을 세워 고개 밑을 내려다보게 하는 축성이 끝났다. 이것이 오늘날의 제2관문이다. 신충원은 훈련원 주부(主簿)로 승진하고 조령은 중요 관방(關防)으로 방어책임이 분담되었으나, 임란이 끝나자 조령 수어에도 관심이 없다가 인조 16년 왜구의 동란이 심상치 않아 조령 등 남관 요충의 수호계책이 논의된 적이 있다.
축성공사는 문경현감 이중창과 손명대에 의하여 이루어진다. 그러나 숙종 38년 5월에 축성 상태가 부실하여 무너졌다는 서종태의 보고에 의하여 현감과 영비는 삭탈당하고 논죄됐었다. 그 규모는 기록에 따라 다르나 남북 18리 18,509보인가 하면, 남북 8리에 둘레 18,509보로도 기록되고 있다.


<백두대간12걸작선(傑作選)>11 <조령산 구간> 참가비는 10만원입니다(왕복 교통비, 3회 식사와 뒤풀이, 여행보험료, 운영비 등 포함). 버스 좌석은 참가 접수순으로 지정해드립니다. (산행에 관한 문의는 이철승 선생님에게 해주세요. 010-8727-0202)

최창남 교장선생님은 <백두대간학교를 열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름다운 하늘길, 백두대간으로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백두대간은 우리 땅의 시작입니다. 모든 생명의 요람이고 터전입니다. 백두대간이 솟구쳐 열리며 수많은 산줄기들도 함께 드러냈습니다. 1정간 13정맥뿐 아니라 많은 기맥과 지맥들이 따라 열렸습니다.



우리 민족에게 산은 하늘의 지혜와 생명을 받는 통로였습니다. 그래서 이 민족을 연 단군도 하늘에서 산으로 내려온 것이고, 옛 사람들은 자식을 점지 받기 위해 산으로 들어가 기도하였던 것입니다.



우리 모두의 하늘길, 백두대간은 늘 우리 곁에 있습니다. 단지 우리가 때로 잊고 때로 잃어버리고 있을 뿐입니다. 이제 그 길로 들어가기 위해 백두대간학교를 엽니다."



백두대간학교는 어떤 학교일까요.

"지금 백두대간 산행은 여러 가지 현실적인 이유로 인해 종주 중심의 산행입니다. 정해진 시간 내에 목적지에 닿기 위해 빠르게 갈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산행은 산을 제대로 느끼고 만나기가 쉽지 않습니다. 나무를 만지고 풀잎의 소리를 듣기 어렵습니다. 때로 적막할 정도로 고요하고 때로 출렁이며 일렁이는 숲의 소리를 느끼기는 더더욱 어렵습니다.



그런 이유로 백두대간학교의 산행은 종주 산행을 지양합니다. 나무늘보처럼 백두대간 하늘길을 천천히 걸으며 산을 느끼고 만나는 산행을 하려고 합니다. 마을을 만나면 잠시 뒷골목도 걸어보고, 사람을 만나면 마음도 나눠보는 산행을 하려고 합니다.



이런 산행을 위해 백두대간의 '아름다운 길 12곳'을 선정하였습니다. 이름하여 <백두대간 12걸작선(傑作選)>입니다. 이 길은 계절의 아름다움을 담고 있는 산길입니다. 겨울의 화사함을 드러내는 산길도 있고, 여름의 풍성함을 뽐내는 산길도 있습니다. 생명력 가득한 봄의 설렘을 느끼게 하는 산길도 있고, 마음을 깊게 하는 가을의 아름다움을 담고 있는 산길도 있습니다.



체력적으로 무리가 없도록 산길의 들머리 날머리가 긴 구간은 아름답더라도 일단 제외시켰습니다. 평균 6시간에서 8시간 정도의 산행으로 구성하였습니다. 천천히 걸으며 산과 숲, 바람과 구름, 흙과 나무, 햇살과 나뭇잎, 아득한 산줄기와 그리움, 그리고 사람을 느낄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백두대간학교에서는 산을 좋아하고 주말 산행을 열심히 하는 정도의 체력을 가진 분이라면 누구나 큰 어려움 없이 걸을 수 있는 길들을 걷습니다. 백두대간학교는 백두대간의 감동을 가장 가까이서 행복하게 만날 수 있는 곳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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