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학민 교장선생님은 유명한 음식칼럼니스트로, <한겨레21>에 '김학민의 음식이야기'를 수년간 연재했으며, 최근에는 같은 주간지에 '김학민의 주류인생'이라는 술 칼럼을 연재한 바 있습니다. 음식 칼럼집으로 <맛에 끌리고 사람에 취하다>가 있습니다..
제14강의 요점은 이렇게 정리됩니다. (수업 일정은 현지 사정에 따라 일부 조정될 수 있습니다)
* 스쿨버스 안에서 교장 선생님의 <안동의 음식문화> <영남학파와 조선의 정치> 개괄
* 소수서원, 도산서원 등 유교유적 탐방과 <안동 헛제사밥>으로 점심
* 옥연정사 답사, 부용대에 올라 <하회마을과 낙조 감상하기>
* 수곡고택 안마당에서 열리는 한국 최초 <양반음악회>
* <병산서원 탐방> 후 하회마을까지 가을 들녘 걷기
*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하회마을 탐방>
▲낙동강이 하회마을을 S자 모양으로 휘돌아 나간다. 오른편 안동시에서 흘러나와 왼편으로 흘러간다. ⓒ안동하회마을보존회 |
안동으로 가기 위한 스쿨버스가 마련되어 있습니다. 9월 17일(토) 아침 7시 서울에서 출발합니다. 6시 50분까지 압구정동 현대백화점 옆 공영주차장에서 유진관광 <음식문화학교> 버스에 탑승 바랍니다(김밥과 식수가 준비되어 있습니다). 운동화 등 가벼운 트레킹 차림에, 1박에 필요한 세면도구와 수건 등을 가져오시기 바랍니다(전문 숙박업소가 아니라 세면도구가 제대로 구비되어 있지 않습니다).
영남의 유교 문화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영남 사대부들의 계보와 봉건시대 조선의 정치를 톺아봐야 합니다. 버스 안에서 교장선생님이 안동지방의 음식문화와 '영남학파와 조선의 정치'를 개괄해 줄 것입니다.
10시 30분, 버스는 먼 길을 달려 풍기읍에 위치한 소수서원에 닿습니다. 안동의 유교문화 유적을 돌아보는 여정에서 우리나라 최초로 유교를 받아들여 발흥시킨 안향 선생을 모신 소수서원을 첫 목적지로 삼는 것은 너무나 당연합니다.
[소수서원] 경북 영주시 순흥면 내죽리에 있는 우리나라 최초의 서원이다. 1541년 풍기군수로 부임한 주세붕(周世鵬)이 이듬해에 이곳 출신 유학자 안향(安珦)을 배향하기 위해 사묘(祠廟)를 설립하였다가, 1543년 유생교육을 겸비한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을 설립한 것이 이 서원의 시초이다. 1544년에는 안축(安軸)과 안보(安輔)를 추가 배향하였다. 1546년 경상도관찰사로 부임한 안현(安玹)은 서원의 경제적 기반을 확충하고 운영방책을 보완하는 데 주력하였고, 1548년 풍기군수로 부임한 이황(李滉)은 서원을 공인하고 나라에 널리 알리기 위해 백운동서원에 대한 사액(賜額)과 국가의 지원을 요청하였다. 이에 따라 1550년 '紹修書院'이라 사액되고 아울러 국가의 지원도 받게 되었다. 이러한 조처는 서원이 공인된 교육기관의 위치를 확보하는 것으로, 그 뒤 다른 서원들의 설립과 운영에도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특히 서원이 단순한 향사와 교육 기능 수행만이 아닌 지방 사림(士林)들의 정치·사회 활동의 중심 역할을 하는 곳이라는 의미도 포괄하고 있으므로, 소수서원의 설립과 발전 내용은 우리 역사에서 주목할 만한 것이다.
11시 30분, 소수서원 탐방을 마치고 도산서원으로 향합니다. 한국 유학의 시조를 모신 곳을 보았으면 당연히 한국 유학의 중시조를 모신 곳도 거쳐야 할 것입니다. 퇴계 이황 선생을 배향한 도산서원이 그곳입니다. 퇴계 선생은 34세에 과거에 급제하여 풍기군수 등 여러 벼슬을 지냈으나, 후기에는 벼슬에서 물러나 학문연구, 인격도야, 후진양성에 힘써 우리나라 교육과 사상의 큰 줄기를 이룬 분입니다.
[도산서원(陶山書院)] 경북 안동시 도산면 토계리 680에 위치하고 있는, 퇴계 이황 선생이 도산서당을 짓고 유생을 교육하며 학문을 쌓던 곳에 세운 서원이다. 퇴계 이황(1501∼70) 선생은 주자학을 집대성한 유학자로 우리나라 유학의 길을 정립하면서 백운동서원의 운영, 도산서당의 설립으로 후진양성과 학문연구에 전력하였다. 중종, 명종, 선조의 지극한 존경을 받았으며 일본 유학의 부흥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 도산서원은 선조 7년(1574) 그의 학덕을 추모하는 문인과 유생들이 상덕사(보물 제211호)란 사당을 짓고, 전교당(보물 제210호), 동·서재를 지어 서원으로 완성했으며, 선조 8년 국왕에게서 이름을 받아 사액서원이 되면서 영남지방 유학의 중심지가 되었다. 이 서원의 건축물들은 민간인들의 집처럼 전체적으로 간결, 검소하게 꾸며 퇴계의 품격과 학문하는 선비의 자세를 잘 반영하였다. 도산서원은 안동댐 건설로 인해 지금의 자리로 이전되었다.
12시 30분, 안동댐 부근의 식당 <까치구멍>으로 점심을 먹으러 갑니다. 안동지방의 향토음식으로 유명한 헛제사밥입니다. '특별히' 맛있다고는 생각되지 않지만, 이 지방에서는 '특별하다'고 하니, 한번 향토음식을 체험하는 것도 '특별한' 일인 듯합니다.
[헛제사밥] 헛제삿밥은 안동지방의 향토음식으로, 고추장 대신 간장으로 조미하는 비빔밥이라고 할 수 있다. 헛제삿밥은 여러가지 나물을 흰 밥 위에 얹어 비벼 먹는데, 구운 고기와 전, 탕국은 따로 나온다. 곧 제사상에 진설했던 음식들을 헐어 나누어 먹던 음복례에서 비롯되어, 제사가 없는 평시에도 그 비슷하게 즐기는 것이 헛제사밥이다. 밥과 음식이 부족했던 조선 시대 유학자들이 제사가 아닌데도 제사를 핑계로 제사음식을 만들어 즐겼다는 데서 헛제사밥이 유래했다는 설이 있다.
오후 2시 30분, 오후 2시 30분, 점심을 끝내고 인근의 임청각(臨淸閣)과 고려시대 전탑(塼塔)을 보러 갑니다. 임청각은 안동시 법흥동에 있는 조선 중기의 건물로, 대대로 고성이씨 가문이 살아 왔습니다. 마지막으로 독립운동가 석주 이상룡 선생이 만주로 망명하기까지 사셨는데, 석주 일가는 이회영 일가와 함께 온 재산을 조국의 독립운동에 바친, '노블리스 오블리제'를 실천한 대표적 가문입니다. 이상룡 일가는 9명의 독립운동가를 배출했습니다.
오후 3시 30분, 옥연정사로 향합니다. 하회마을은 두 군데서 보아야 합니다. 대부분이 하회마을로 들어가 마을길을 걷는 것으로 하회마을에 갔다 왔다고 하지만, 그건 마을이나 건물의 평면을 본 것입니다. 자연경관과 아우러진 하회마을의 아름다움은 부용대(芙蓉臺)에 올라가야 그 입체를 볼 수 있습니다. 물론 부용대에서 먼저 보는 것이 좋습니다. 시간이 맞아 풍산 들판의 낙조를 구경할 수 있다면 그건 덤입니다.
[옥연정사(玉淵精舍)] 경북 안동시 풍천면 광덕리에 있는 조선 중기의 정사이다. 서애(西厓) 유성룡(柳成龍, 1542~1607)이 평소 가깝게 지내던 승려 탄홍(誕弘)의 도움을 받아 지은 것으로, 유성룡이 만년에 학문을 연구하고 제자를 양성하던 곳이다. 유성룡은 임진왜란 종전 후 이곳 옥연정사에서 국보 제132호인 <징비록(懲毖錄)>을 집필하였다. 옥연정사는 하회마을의 화천(花川) 북쪽 부용대 동쪽 강가에 자리 잡고 있어 나룻배로 마을을 드나들게 되어 있다. 건물은 대문간채, 살림채, 사랑채, 별당채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들은 각각 독립된 채로서 一자형 평면을 이루고 있다.
6시, 부용대에서 내려와 풍산 맛집 <대구식당>으로 저녁을 먹으러 갑니다. 읍에 있는 인심 좋은 소박한 식당입니다. 객지에서의 1박이니, 소주 한 잔이 없을 수 없습니다. 이제 수곡고택에서의 하룻밤을 위해 이동합니다. 방도 좁고, 천정도 낮고, 화장실도 밖에 있어 불편하지만, 옛 사람의 정취와 솔바람 소리, 풀벌레 소리를 벗 삼아 잠을 청해 보시기 바랍니다.
[수곡고택(樹谷古宅)] 할아버지 권보의 덕을 기리기 위해 정조 16년(1792) 손자 권조가 지은 종가집이다. 50여 호 되는 작은 마을 북쪽에 야산을 배경으로 자리 잡고 있다. 권보는 일생 동안 검소하게 살았던 사람으로 사랑채 지붕을 화려한 팔작지붕이 아닌 맞배지붕으로 한 것도 그의 소박함을 기리기 위함이다. 남향한 터에 ㄷ자형 안채, 一자형 사랑채와 중문간채, 一자형 별당, 一자형 대문간채가 있다. 행랑채의 오른쪽 칸에 있는 문을 들어서면 넓은 마당을 사이에 두고 사랑채와 안채가 튼 ㅁ자형으로 배치되어 있다. 안채의 뒤쪽 높은 곳에는 1칸의 사당이 있다. 별당채는 집터의 서쪽으로 안채와 대문간채 사이에 있는 건물로 새로 지은 사랑채라 해서 '새사랑채' 또는 '일지재'라 하기도 한다. 이곳은 학문연구와 제자를 키우기 위해 만든 공간이다. 수곡고택은 조선시대의 전형적인 양반집이다.
저녁 8시, 수곡고택 ㅁ자 안마당에서 <양반음악회>를 시작합니다. 왜 '양반음악회'냐고요? 옛 선비들이 삶 속에서 즐겨 읊으며 놀았던 가사, 시조, 율창, 송서 등은 이제 그 맥이 희미해져 국악의 한 분야로만 이어져 오고 있습니다. 서울에서 함께 온 국악인 박종순 선생님이 여기에 전통 정가, 가곡을 더하여 '양반들의 운율'들을 소개하니, 이것이 바로 '양반음악회'가 됩니다.
이튿날 아침 9시, 수곡고택 마을 식당에서 아침을 들고 병산서원으로 향합니다. 병산서원은 우리나라 서원 중에서 가장 아름다우면서도 유교적 공간 개념이 가장 잘 투영되어 있는 건축물입니다.
[병산서원(屛山書院)] 병산서원의 전신은 풍산현에 있던 풍악서당(豊岳書堂)으로 고려 때부터 사림의 교육기관이었다. 1572년(선조 5) 서애(西厓) 유성룡(柳成龍) 선생이 지금의 병산으로 옮긴 것이다. 1607년 서애가 타계하자 정경세(鄭經世) 등 지방 유림의 공의로 선생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하여 1613년(광해군 5) 존덕사(尊德祠)를 창건하고 위패를 봉안하였다가, 1614년 병산서원으로 개칭하였다. 1620년(광해군 12) 유림의 공론에 따라 퇴계 선생을 모시는 여강서원(廬江書院)으로 위패를 옮기게 되었다. 그 뒤 1629년(인조 9) 별도의 위패를 마련하여 존덕사에 모시면서, 그의 셋째 아들 수암(修巖) 유진(柳袗)을 추가 배향하였다. 1863년(철종 14)에 사액(賜額)되어 서원으로 승격하였다.
10시 30분, 병산서원을 떠나 하회마을에 들어가기 위해 걷습니다. 이제 본격적으로 하회마을 탐방이 시작됩니다. 누런 물결의 가을 들녘을 가로 질러 상큼한 솔바람을 맞으며 걷는 길이 아주 상쾌합니다. 느릿느릿 걸어도 한 시간이면 충분하니 서두를 필요가 없습니다.
[하회(河回)마을] 경북 안동시 풍천면(豊川面) 하회리(河回里)에 있는 민속마을로, 풍산유씨가 6백여 년간 대대로 살아온 한국의 대표적인 동성마을이다. 와가(瓦家, 기와집)와 초가가 오랜 역사 속에서도 잘 보존되어 있으며, 조선시대 대 유학자인 겸암 유운룡과 임진왜란 때 영의정을 지낸 서애 유성룡 형제가 태어난 곳으로도 유명하다. 마을 이름을 하회(河回)라 한 것은 낙동강의 지천인 화천이 S자 모양으로 마을을 감싸 안고 흐르는 데서 유래되었다. 하회마을은 풍수지리상 태극형·연화부수형·행주형으로 일컬어지며, 이미 조선시대부터 사람 살기에 좋은 곳으로 유명하였다. 마을 동쪽에 태백산에서 뻗어 나온 해발 271m의 화산(花山)이 있고, 이 화산의 줄기가 낮은 구릉을 형성하면서 마을의 서쪽 끝까지 뻗어 있다. 수령 6백여 년의 느티나무가 있는 곳이 마을 중심부에 해당한다. 하회마을의 집들은 이 느티나무를 중심으로 강을 향해 배치되어 있기 때문에 좌향이 일정하지 않다. 한국의 다른 마을의 집들이 정남향 또는 동남향을 하고 있는 것과 대조되는 모습이다. 또한 큰 와가를 중심으로 주변의 초가들이 원형을 이루며 정겹게 배치되어 있는 것도 특징이다. 그래서인지 하회마을에는 서민들의 <하회별신굿탈놀이>와 선비들의 풍류놀이 <선유줄불놀이>가 현재까지도 전승되고 있다. 하회마을은 2010년 8월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12시 30분, 하회마을 탐방을 끝내고 점심식사를 위해 마을 입구로 향합니다. 마을에서 입구까지 오가는 셔틀 버스가 있지만, 15분 소나무길이 좋아 그냥 걸을 생각입니다. 점심은? 안동에서의 마지막 식사이니, 그 유명하다는 <안동찜닭>이지요.
오후 2시 30분. 오후 2시 30분. 1박2일 제14강의 일정을 모두 마친 음식문화학교는 하회마을을 떠나 서울로 향합니다. 고속도로가 밀리지 않는다면 6시 전후에는 서울에 도착할 수 있습니다.
음식문화학교 9월 참가비는 19만원입니다. (교통비, 입장료, 숙박료, 식사비, 강의비, 여행자보험료, 운영비 등 포함) 좌석은 접수순으로 지정해 드립니다. 참가신청과 문의는 사이트 www.huschool.com / 전화 050-5609-5609 / 이메일 master@huschool.com 으로 해주세요.
김학민 교장선생님은 <음식문화학교를 열며> 이렇게 취지를 설명했습니다.
<인간은 요리하는 동물>
최초의 인간은 다른 동물과 마찬가지로 자연 상태 그대로 먹었습니다. 그러다가 불의 발견을 계기로, 인간은 환경에 적응하는 슬기를 발휘하여 서서히, 또한 독특하게 식생활 체계를 세웠으니, 이것이 음식문화입니다. 이로써 인간은 '요리하는 동물'로 진화되어, 각기 살고 있는 곳의 기후와 풍토에 따라 제각각의 음식문화권을 형성하게 됩니다.
이러한 음식문화의 자연스런 분화와 발전이 있었으므로, 인류의 보편적 정서와 규범을 흐트러트리지 않는 한, 한 인간이 무엇을 어떻게 먹든 그것은 그의 자유입니다. 또 특정한 먹을거리를 특별하게 먹게 된 것도 그 공동체 고유의 살아온 환경과 문화, 역사의 소산이므로 자기만의 잣대를 들이밀어 왈가왈부할 일도 아닙니다.
흔히 "모두가 먹고 살자고 하는 일인데…"라고 말합니다. 인간의 원초적 과제들을 의·식·주로 나누어 그럴 듯하게 분화하였지만, 그건 어느 정도 문명화된 시기의 이야기이고, 사실은 식(食)의 문제,
곧 먹을거리 문제가 인간 실존의 근원입니다. 먹을거리 문제는 질서와 규범 속에서 평화롭게 조절돼 가는 것 같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그렇지도 않습니다. 매일 매일의 사회면 기사의 행간을 뜯어보면 그 이면에는 모두 먹는 문제가 개재되어 있고, 국가 사이의 전쟁, 민족 사이의 분쟁도 땅과 자원의 문제가 대부분을 차지하니, 그 끝을 파보면 결국 먹는 문제라 할 수 있습니다.
<아는 만큼 맛있다>
우리 사회는 이제 먹을거리 문제의 극단에서는 벗어나 있습니다. 그러나 먹을거리의 질과 독점을 둘러싸고는 계속 갈등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또 거대 식품산업이나 외식사업 등에서 양산되는 각종 인스턴트 식품들이 우리 식탁에 도전해 오고 있고, 세계 각국의 먹을거리들도 그 나라의 문화요소들과 함께 물밀듯이 들어오고 있습니다.
이러한 먹을거리의 홍수 속에서 음식문화학교는 우리 전통 먹을거리를 낳게 한 사회문화적 배경, 그리고 특정 먹을거리와 그를 갈무리하는 맛깔스런 음식점, 그리고 그 주인과 공동체에 얽힌 이야기를 탐구하고자 합니다.
곧 '먹을거리 이야기'를 넘어 '이야기가 있는 먹을거리'를 찾는 여정이 음식문화학교가 가고자 하는 방향입니다. 문화유산 답사의 개척자 유홍준 교수는 "아는 만큼 보인다"고 했습니다. 유 교수의 어법을 빌려 말한다면, 음식도 아는 만큼 맛있습니다.
<음식문화학교는...>
음식문화학교는 요리법을 가르치는 곳이 아닙니다. 음식문화학교는 문화 속의 음식, 음식 속의 문화를 탐구하고자 합니다. 따라서 음식문화학교는 음식의 현장을 찾아가 문화를 즐기거나, 문화의 현장을 찾아가 음식을 즐기는 기행의 형식으로 진행합니다. 곧 '금강산과 식후경의 조화'가 저희 음식문화학교의 교훈입니다.
앞으로 김치, 젓갈, 된장, 두부, 등심, 갈비, 불고기, 육회, 토종닭, 홍어, 비빔밥, 산나물, 막걸리 등 숱한 우리 전통 먹을거리의 명품, 명소를 찾는 기행이 쭉 이어집니다. 전문가 또는 교장의 음식문화 강의 후 맛있는 음식을 즐기게 되며, 재래시장 장보기, 산나물 뜯기, 쭈꾸미 잡기, 콩 털기 등의 체험행사도 함께 하며 유명 음식축제 여행으로 변화를 꾀하기도 하겠습니다.
음식문화학교는 월 1회, 셋째 토요일(1박2일은 셋째 토, 일요일)에 여는 것을 원칙으로 하되, 사정(명절, 연휴, 장날, 음식축제 등)에 따라 날짜를 옮길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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