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위대는 하얀 암흑 속에서 허우적댔다. 딛고 있는 땅조차 보이지 않았다. 도무지 공장을 뚫고 들어갈 힘은 없어 보였다. 사측과 경찰은 진격해 오는 시위대를 소화기와 물대포로 간단히 진압하곤 했다. 일부 매체는 20일 울산 희망버스가 폭력으로 얼룩졌다고 보도하며 시위대의 폭력성을 극대화하려고 애썼지만, 사실 시위대는 사측의 적수가 되지 못했다. 3시간의 '전투'는 전선의 변화 없이 공격과 방어를 반복할 뿐이었다.
기사는 사건의 배경은 도외시한 채 현장의 충돌에만 초점을 맞췄다. 왜 전국에서 시민들이 주말을 반납하고 울산으로 모였는지, 두 남자가 철탑에 올라갈 수밖에 없었던 사정이 무엇이었는지 고민해 본 적 없는 기자들이 기사를 썼다. 그렇게 밖에는 믿을 수 없는 기사였다.
(관련 기사 : "<한국경제>, 쇠파이프 든 2500명 어디서 봤나?")
현대차는 하청업체의 직원을 불러다 정규직과 같은 일을 시키며 절반의 임금을 줬다. 하지만 현대차의 노무 관리 아래 사내 하청 노동자가 정규직과 같은 일을 하는 '불법 파견'은 그야말로 불법이다. 불법 파견이 아니라 합법 도급이라는 것이 회사의 해석이었을지 모르나 노동부는 2004년, 대법원은 2010년 이를 부당하다고 판단했다.
최병승은 6년간의 소송 끝에 이것이 불법이라는 대법원 판결을 얻어냈다. 그러나 회사는 제조업 전반에 만연한 '불법 문제'는 외면하고, 대법원 판결은 최병승 한 사람에게만 적용된다고 버티고 있다. 법원의 판례를 3년이 지나도록 애써 무시하고 있다. 줄소송이 이어졌다. 그러나 누가 또 수년의 소송을 견딜 수 있을까? 소송을 걸고 회사를 다닐 수는 있을까? 그만둔다면 소송을 마칠 때까지는 무엇을 먹고살까? 이런 상황에 놓인 사내 하청 비정규직은 8000여 명. 회사는 3500명 정규직 신규 채용이라는 안을 들고나와 비정규직을 모두 정규직으로 전환할 의사가 없음을 다시 확인했다.
어디까지가 폭력일까? 밧줄로 공장 철망을 뜯어내고 대나무를 휘두르는 것만이 폭력일까? 법원의 판결을 무시하고 파견 직원의 고혈을 계속 짜겠다는 사측의 횡포는 폭력이 아닌가? 그 오만함 뒤를 받치는 자본의 횡포는 폭력이 아닌가? 노동자 박정식이 죽을 수밖에 없는 환경을 만든 회사는 아무런 폭력도 행사하지 않은 것인가? 밥줄을 손아귀에 쥐고, 항의하는 직원을 또 다른 직원 혹은 용역업체의 월급쟁이로 막아내는 비정함은 또 어떤가? 그 악랄함은 폭력이라 말할 수 없을까?
폭력엔 두 가지가 있다. 눈에 보이는 폭력과 보이지 않는 폭력.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듯,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그러고 보면 '폭력 사태'라는 표현은 정확했다. 시위대도 그랬지만 사측도 그랬고, 사측이 고용한 용역도 그랬고, 사측을 위해 물대포를 쏘던 경찰도 그랬다. 넓게 보면 비정규직을 외면한 정규직 노조에도 이기적인 폭력성은 존재했다. 여러 형태의 폭력이 얽히고설킨 현장이 그날 울산이었다.
싸움을 걸고 일을 시끄럽게 만들지 않으면 철저히 외면받는 언론 환경에서 이들이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이었을까? 목숨 걸고 280일 동안 철탑에 매달린 동료를 위해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이어야 했을까? 잡음이 생기더라도 이슈를 만들어 회사에 압박을 가하려는 것이 이번 '폭력 사태'의 전말이다. 폭력을 옳다고 말하긴 어렵다. 다만 그 폭력의 배경을 외면하는 사회가 얼마나 위험한지에 대해서 생각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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