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차 세계 대전 당시 나찌 독일의 장군으로 '사막의 여우'라 불리던 에르빈 롬멜은 대담하면서도 전격적인 공격의 달인이었다. 북아프리카 전선에서 롬멜이 펼친 일련의 공세에 영연방군은 후퇴를 거듭해 이집트를 포기할 수도 있는 상황에까지 몰리기도 했다. 하지만 영연방군은 압도적인 전력을 바탕으로 엘 알라메인 결전에서 롬멜이 지휘하던 독일 아프리카 군단을 패퇴시킨다.
여기서 롬멜의 진가가 다시 빛난다. 롬멜은 전력이 급격히 소진된 데다 사기가 떨어진 독일 아프리카 군단을 이끌고 리비아를 통과해 튀니스까지 무려 2000킬로미터를 큰 전력의 손실 없이 후퇴했던 것이다. 압도적인 전력을 지닌 추적자의 맹렬한 추격을 피해 독일 아프리카 군단의 전력을 보전한 롬멜의 군사적 위업은 순전히 군사적 측면에서 볼 때 칭찬받아 마땅하다.
느닷없이 롬멜 얘기를 하는 건 위기에 처한 통합진보당 때문이다. 진보당은 현재 절체절명의 위기에 빠졌다. 이석기 의원 등에게 던져진 내란음모ㆍ예비선동 등 혐의에 대한 사법처리 가능성이 낮다는 사실은 현재 진보당이 처한 객관적 상황을 타개하는데 별 도움이 되지 못한다. 진보당은 이 시점에서 냉정하게 생각해야 한다. 국정원 등이 세운 전략적 목표와 시나리오에 부응하는 방향으로 진보당이 움직이는 건 아닌지를 말이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금방 알 수 있는 일이지만, 국정원 등이 걸고 있는 일련의 드라이브가 달성하려고 하는 전략적 목표는 꽤 자명하다. 국정원 등이 노리는 1차적 전략목표는 국정원 선거개입 사건을 물 타기 하고, 국정원을 지금 그대로 존치시키는 것일 게다. 2차적 전략목표는 야권의 분열을 영구화시키고, 민주당에게도 '종북' 낙인을 찍는 것일 가능성이 높다.
국정원 내에는 이런 전략적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세부 플랜들이 있을 것이고 진보당의 대응방향에 대한 대비책도 마련되어 있을 것이다. 답답한 것은 진보당이 국정원이 가장 원하는 대로, 하지만 그렇게 움직일 가능성은 낮다고 예상한 대로, 대응하는 것처럼 보인다는 사실이다.
진보당은 사실관계를 낱낱이 확인한 후 인정할 것은 솔직히 인정하고 사법적 대응과 정치적 대응을 불리해 대처했어야 옳았다. 하지만 진보당은 반대로 행동했고, 국정원의 페이스에 말리고 있다. 이석기 의원에 대한 체포동의서가 통과되고 국정원의 수사망이 조여 오는 지금 진보당은 질서 있는 퇴각을 위해 국정원의 의표를 찌르는 결단을 내려야 한다. 뻗댈 상황이 아니며, 결사의 각오도 울림 없이 공허하다. 진보당은 지금이라도 파악한 사실관계를 공개하고 시민들에게 인정할 것은 인정하고 사과할 것은 사과하는 것이 좋겠다.
또한 읍참마속의 심정으로 인적 청산을 단행해 불길이 더 번지는 걸 일단 차단했으면 좋겠다. 그렇게 해야 지금의 국면을 진정시킬 계기가 마련될 것이고, 진보당도 재기를 기약할 수 있다. 진보당이 지금과 같은 스탠스를 유지하는 한 지금의 사태는 청와대와 국정원이 전략적 목표를 달성했다고 판단하는 시점이나 반북적대감이라는 연료가 상당부분 연소된 시점이 돼서야 사그라질 것이다.
자칫하면 세상 물정 모르는 몽상가들의 시대착오적인 논의가 국민주권의 정당한 행사 및 공정하고 투명한 정치적 의사형성을 교란하고 왜곡한 국정원의 범죄행위 보다 훨씬 흉악한 범죄로 굳어질 상황이다. 진보당의 반성과 결단이 긴절한 순간이다.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