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억5000만 원의 출자금이 3일 만에 모였다고 합니다. 세상이 변하고 있습니다."
강사가 한 생활협동조합의 사례를 설명하자 강의실에서는 "우와." 나지막한 탄성이 강의실을 매웠다.
"제대 군인이 많이 가는 직종이 뭡니까?"
"경비요."
"보안업체요."
"빌딩 관리요."
여기저기서 갖가지 대답들이 나왔다.
"네 맞습니다. 그런데 이런 일자리들은 다 어디서 나오죠? 기업들입니다. 그럼 그 기업들은 어떻게 일을 맡길까요? 네. 아웃소싱입니다. 아웃소싱 업체들은 180만 원을 받아 여러분에게 150만 원만 줍니다. 그런데 협동조합을 만들면요? 이런 아웃소싱 입찰에 조합 이름으로 참여할 수도 있겠죠. 언제까지 구태의연하게 취업하시겠습니까?"
이어 '행정사' 이야기.
"행정사 한 명 한 명은 개인사업자입니다. 그런데 협동조합을 만들면요? 조합원으로 변호사, 법무사, 회계사, 노무사도 포함시킬 수 있습니다. 변호사가 오겠냐구요? 제대 군인 중에도 변호사 있습니다. 헌병대 법무관 출신 있잖습니까. 이렇게 협동조합을 만든다고 생각해보세요."
수강생들의 눈이 반짝거리기 시작했다.
이날 교육을 기획한 이는 '전국행정사협동조합'(www.nacoop.org) 하경식 대표행정사. 그 역시 지난해 전역한 제대 군인이다. 21년간 복무하고 원사로 전역한 뒤 행정사 자격을 얻어 행정사 업무를 시작했고, 협동조합기본법이 시행되면서 행정사 협동조합까지 만들게 됐다. 그에게서 협동조합을 만들게 된 이유를 들어봤다.
▲ 전국행정사협동조합 하경식 대표행정사. ⓒ프레시안(김하영) |
행정사는 행정심판 등 각종 관공서 행정업무를 대행해주는 직종을 말한다. 10년 이상 근무한 퇴직 공무원들(군인 포함)은 일정 교육을 이수한 뒤 행정사 자격증을 취득할 수 있었다. 그런데 공무원 출신에게만 행정사 자격증을 부여하는 것은 위헌이라는 헌법재판소의 결정에 따라 2013년부터 비 공무원 출신도 시험을 봐 자격증을 취득할 수 있게 됐다.
행정사가 국가 공인 자격증이 되면서 일반인들, 특히 젊은 층의 관심이 높아졌다. 올해 시험을 통해 행정사 300명을 선발하는데 1만4000명이 몰렸다고 한다. 또한 사회가 선진화 되고 일반 시민들의 삶에 행정이 미치는 영역이 넓어짐에 따라 행정사의 필요성과 역할도 확대되고 있다.
"연세가 여든이 넘은 경찰 공무원 출신이 찾아오셨어요. 6.25 참전 수당을 신청해야 하는데 너무 어려우니 도와 달라고 하시더라고요. 지리산 빨치산 토벌대 활동도 하셨다더군요. 경북 경찰청 자료를 뒤져서 그 분 활동 증거 자료를 찾아냈고, 수당 신청을 해 지금은 월 15만 원씩 받으세요."
하 행정사에 따르면 음주운전, 영업정지 등 행정심판 관련 업무는 물론, 최근에는 중국 동포의 국내 진출이 활발해지면서 출입국업무도 행정사의 주요 업무 영역이 됐다. 심지어 층간소음, 학교 폭력도 행정사를 이용하면 도움이 된다고. 층간소음은 환경분쟁위원회를 통한 조정과 피해보상 신청을 할 수 있고, 학교 폭력도 징계에 대한 재심 청구 등을 행정사가 도울 수 있다.
"사실 이런 행정서비스들은 관공서 공무원들이 다 해야 하는 거죠. 하지만 인력의 한계가 있기 때문에 관공서에서 모두 알아서 해주길 기대하는 건 불가능합니다. 특히 사회가 복잡해지고 행정 서비스가 고도화될수록 행정사들의 역할이 중요해지리라 봅니다. 사실 시민들이 몰라서 챙기지 못하는 서비스들이 많습니다. 고령화 사회가 되고 있는데 노인 분들이 행정 업무 처리에 불편함을 많이 느끼십니다. 일본 같은 경우에는 행정사가 친숙한 존재라고 해요. 동네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면서 '불편한 거 없냐', '필요한 거 없냐'고 살피고 다니거든요."
지금까지 행정사가 대중들에게 생소한 직업이었던 이유는 뭘까?
"현재 활동 중인 행정사가 7000명 정도 됩니다. 행정사 자격 취득이 가능한 10년 이상 근무 공무원 수에 비하면 매우 적은 편이죠. 대부분 행정사가 공무원 경력 10년은 훨씬 넘고요. 대개 연세들이 좀 있으시죠. 예전에는 대서소라고 불렀죠. 그냥 서류 대신 작성해주는 개념. 은퇴 후 연금 받으면서도 책상 하나 놓고 적은 수입이라도 올리면서 소일거리 하시거나, 경험을 바탕으로 지역 사회에 봉사하는 마음으로 하시는 분들이 많아 대부분 영세하고 사회적 인식도 낮았죠."
하 행정사는 침체된 업계 분위기를 협동조합으로 돌파하고자 했다. 규모를 갖춰 보다 토지보상이나 환경분쟁 같은 보다 규모가 크고 전문적인 행정 업무에 뛰어들겠다고 한다. 적극적인 영리 활동을 통해 브랜드 가치를 쌓겠단다. 유수의 로펌 못지않은 행정 서비스 업체를 만들겠다는 것이 목표다.
"구청 앞에서 책상 하나 놓고 혼자 업무를 하면 서류 대신 써주는 간단한 서비스 정도밖에 못 합니다. 하지만 협동조합으로 모여 규모가 되면 어떤 아파트 단지에 환경 분쟁이 생겼을 때 300세대가 넘는 세대의 세대별 환경오염 피해 조사도 하고 혼자서는 할 수 없는 일들을 할 수 있습니다."
교육의 중요성도 강조했다.
"이제 행정사가 국가고시로 바뀌어 젊은 층들도 행정사에 진출할텐데, 기존의 교육 방식으로는 100이면 100 망할 수도 있다고 봅니다. 행정사들에게 지금보다 더 많은 교육 기회를 제공하고자 합니다."
아직 조합원은 7명이다. 지난달에야 비로소 홈페이지를 오픈했다. 시작 단계다. 다만 조합원 행정사들은 대전, 서산, 속초, 안산, 서울, 광주(경기) 등 지역에 고루 퍼져 있어 네트워크를 형성하고 있다. 출자금은 100만 원이다.
하 행정사는 사무실을 청량리역 앞 대로변에 차렸다고 한다. 변호사 문턱이 높은 서민들에게 행정 서비스라도 저렴하고 편리하게 제공하고 싶었고, 서민들이 가장 많이 모여 있는 곳으로 들어가자는 마음에 시장 근처에 사무실을 냈다고.
"지금은 행정사라고 하면 사람들이 대부분 '뭐지?'라고 하지만, 서민들에게 행정사가 친숙한 존재가 되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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