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의 유령이 대한민국 부동산 시장을 배회하고 있다. '분양가상한제 사수(死守)'라는 이름의 유령이. 대다수의 진보적 시민운동 단체와 활동가들이 '분양가상한제'의 폐지에 완강히 반대하고 있다. '분양가상한제'폐지를 강력히 반대하는 이들의 생각은 대략 이런 것일 것이다.
'분양가 자율화가 시행된 이후 아파트 분양가가 가파르게 상승했다. 고분양가가 주변 집값을 끌어올리고 이렇게 상승한 집값은 다시 고분양가 책정의 근거가 된다. 분양가상한제는 이런 악순환을 차단하는 효과가 있다. 분양가상한제 폐지는 건설업체들의 이익에만 복무할 따름이다. 분양가상한제를 폐지한다 해도 침체된 부동산 시장이 살아날리 만무다'
현상적으로 보면 이런 주장은 분명 일리가 있다. 분양가 자율화 이후 서울 아파트 평당 분양가는 1998년 512만 원, 2002년 919만 원, 2006년 1546만 원으로 급등했다. 또한 이 시기는 이른바 4차 부동산 폭등기와 대체로 겹친다. 현상적으로만 보면 터무니없이 가파르게 상승한 신규 아파트의 분양가가 부동산 시장의 폭등을 견인한 것 같다.
고분양가가 부동산 시장을 견인할 수 있나?
그런데 정말 고분양가가 부동산 시장을 견인하는 것일까? '분양가상한제' 프레임이 지닌 치명적인 한계는 부동산 시장에서 가격이 형성되는 메커니즘을 오해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세인들의 생각과는 달리 부동산 시장 가격에 영향을 미치는 요소들은 매우 다양하고 복합적이며 중층적이다.
우선 생산가능인구의 변화, 도시화 정도, 산업구조의 변화 등의 요소, 각종 거시경제(금리, 환율, 무역수지, 경제성장률, 1인당 실질구매력, 실업률 등)지표, 수급 등이 큰 틀에서 부동산 (주택)가격을 규정짓는다.
정부의 각종 부동산 정책- 공급(공급량-공급유형과 로케이션 등, 분양방식-원가공개, 후분양제, 청약제도, 실질주택보급율 등)정책, 수요(세제-취득세, 보유세 및 양도세 등)정책, 금융(주택담보대출-LTV 및 DTI- 관리)정책, 공공임대주택 건설 등 주거복지 정책, 개발이익환수장치(개발부담금, 재건축 규제 등)정책 등-도 부동산 가격에 영향을 미친다. 대한민국 경제의 볼륨이 커지고, 경제의 글로벌화가 급속도로 진전됨에 따라 정부의 부동산 정책이 부동산 시장에 미치는 규정력이 예전만 못하다는 사실도 놓쳐서는 안 될 것이다.
유감스럽게도 '분양가상한제' 프레임은 이같이 부동산(주택)가격을 결정짓는 장·중·단기적 요소들을 간과한 채 신규아파트를 공급하는 공급자가 분양가격을 임의대로 결정할 수 있으며 이렇게 결정된 고분양가가 전체 부동산(주택)가격을 견인한다는 비현실적인 가정 위에 서있다. 그러나 부동산(주택)가격이 몇몇 건설업체들의 선택만으로 결정될 리 만무다.
이른바 4차 부동산 폭등기의 부동산(주택)가격 상승도 분양가 자율화 때문이 아니다. 당시의 부동산 가격 폭등은 전 세계적 유동성 과잉에 기인한 투기적 가수요 때문이었다. 쉽게 말해 투기적 가수요가 만연해 건설업체들이 주변 시세 보다 한참 높은 가격에 신규 아파트를 공급해도 아파트들이 날개달린 듯 팔렸고 이런 현상이 시장 참여자들의 투기 심리를 자극한 측면은 분명이 있겠지만, 건설사들이 일방적으로 정한 고분양가가 주택 가격을 끌어올린 것은 아니다.
아무리 분양가 자율화가 시행된다고 해도, 부동산(주택)시장이 안정돼 있고 시장에 투기적 가수요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건설업체들이 주변 시세 보다 월등히 높은 가격에 신규 아파트를 분양할 수 없다. 신규 아파트 대부분이 미분양 신세를 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지켜야 할 정책수단과 탄력적으로 적용해도 되는 정책수단을 분별할 수 있어야
'분양가상한제'사수를 주장하는 시민단체와 활동가들의 진심은 충분히 존중되어야 한다. '분양가상한제'는 쓸모 있는 부동산 시장 규율 장치이기도 하다. 하지만 보조적 시장 규율장치이다.
시장상황이 어떠하건 부동산 시장을 정상화시키기 위해서 사수해야 하는 정책수단들이 있다. 부동산 시장 투명화, 토지 보유세, 개발이익 환수 장치, 공공임대주책 확충 등 주거복지 등이 그것이다. 이런 정책수단들이 건재한 상태에서는 부동산 시장에 투기적 가수요가 개입될 여지가 적다. 부동산 시장이 정상적으로 작동하는 것이다.
그 외의 정책수단들은 부동산 시장상황에 따라 탄력적으로 운용해도 괜찮다. 지금과 같이 부동산 가격이 하락하고 거래가 극도로 침체한 시장상황에서는 '분양가상한제 사수'를 목 놓아 외칠 필요가 없다는 말이다. 많은 시민단체와 활동가들이 부동산 시장에서 지켜야 할 정책수단과 탄력적으로 운용해도 괜찮은 정책수단을 분별할 수 있다면 박근혜 정부에 보다 적극적인 주문을 할 수 있게 된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박근혜 정부에게 부동산 시장의 거래 활성화 등을 위해 다주택자 양도세 중과를 폐지하는 것, 분양가상한제를 한시적으로 폐지하는 것, 취득세 감면 조치를 연장하는 것, 주택담보대출비율을 조정하는 것을 수용할 테니, 보유세를 시장에 충격을 주지 않는 범위(비업무용 토지 및 빌딩 위주로 보유세 강화)내에서 강화하고, 다주택자들을 임대사업자로 등록토록 하며, 다양한 유형의 공공임대주택을 소셜믹스 형태로 지속적으로 공급하고, 주택임대차보호법 및 상가건물임대차보호법을 대폭 개정해 임대인과 임차인 사이의 힘의 비대칭성을 해소하며, 주식백지신탁제를 운용하는 것처럼 부동산에 대해서도 고위공직자 후보들을 상대로 부동산 백지신탁제를 도입할 것을 공세적으로 요구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게 하는 것이 박근혜 정부를 생산적으로 견인하는 길이며, 진보적 시민단체와 활동가들이 대중들에게 신뢰받는 경로다. 본질이 아닌 것에의 과도한 집착은 운동의 동력을 떨어뜨리며, 문제를 해결할 수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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