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엔 그런 곳인지 몰랐다. 그래서 운이 없었다. 입학하자마자 동급생과 싸움이 붙었다. 주번을 바꿔달라는 같은 반 아이의 요구를 거절했더니, 온갖 욕설이 쏟아졌다. 결국 주먹이 오갔다. 둘 다 얼굴에 멍이 들었고 입술이 찢어졌다. '걸레'가 된 교복은 피투성이가 됐다.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알고 보니 싸운 친구는 중학교 때 소위 '짱'으로 졸업한 친구였다. '무명'이었던 친구에게 맞은 게 분해서였을까. 싸우고 며칠이 지난 뒤, 함께 어울리는 친구들을 끌고 왔다. 영문도 모르고 하굣길에 한강으로 끌려가야만 했다. 흠씬 두들겨 맞았다.
그 뒤론, 학교 생활이 지옥이었다. 패거리를 몰고 다니던 친구는 A씨에게 툭하면 시비를 걸었다. 그리곤 주먹질이 뒤따랐다. A씨는 점점 어두운 성격이 됐다. 많이 맞으면 결국 때리게 되는 걸까. A씨 역시 조금씩 폭력적으로 변해갔다. 그보다 약한 아이들에게 주먹을 휘두르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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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머니에 흉기를 넣고 학교에 갔던 날
결국 A씨는 학교에서 문제아가 됐다. 아침 조회 시간이면, 담임교사는 그를 불러내 아무 이유 없이 때리기도 했다. 학급 분위기가 어수선하다는 게 이유였다. A씨는 학급 아이들을 대표해서 맞은 셈이었다. 학급에서 문제만 생기면, A씨가 원인으로 찍혔다. 같은 반 아이들 역시 A씨를 어울리지 말아야 할 대상으로 여겼다.
A씨를 괴롭게 했던 것은 더 이상 '짱'이라 불리는 동급생과 그 패거리만이 아니었다. 그보다 더 두려웠던 건, 어느 순간부터 변한, 같은 반 아이들의 무감각한 시선이었다. 같은 반 아이들에게 A씨는 '원래 폭력적인 아이'가 돼 있었다. 순하고 얌전하던 고교 입학 직후의 모습을 기억하는 아이는 없었다.
끝이 보이지 않는 터널 안에 갇힌 느낌. 당시 A씨가 딱 그랬다. 터널에서 벗어나는 길은 결국 죽음뿐이었다. 자살 방법을 궁리했다. 하지만 그건 잠깐이었다. 그보다는 이런 상황을 만든 최초의 인물, 즉 늘 그를 괴롭히는 '짱'이 세상에서 사라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사고를 쳐서 퇴학을 당했으면 좋겠다는 생각부터, 교통사고가 나서 1년쯤 병원에 입원해 있기를 바라기도 했다.
감정이 격해질 때는 아예 그 친구가 세상에서 사라지기를 바라기도 했다. 패거리들에게 흠씬 두들겨 맞은 다음 날엔 호주머니에 칼을 갖고 학교에 간 적도 있었다. 어차피 망가진 인생, '놈'도 죽이고 나도 죽자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실행에 옮기진 못했다. '놈'의 삶을 망가뜨린다 한들, 내 삶이 회복되는 건 아니라는 깨달음이 머리를 스쳤다. 삶을 더 망가뜨리기엔 A씨가 너무 어렸다. 결국 A씨는 무사히 졸업했고, 우여곡절끝에 지금은 평범한 회사원으로 착실히 살아가게 됐다. 만약 당시 A씨가 '이왕 망가진 인생, 더 망가진들 어쩌랴'하는 자포자기 심정으로 칼을 뽑았다면, 지금의 A씨는 없었을 게다.
잇따른 칼부림 사건, 그들은 왜?
한동안 잊고 지냈던 A씨의 사연이 최근 다시 떠올랐다. 잇따라 발생한 살인 및 살인미수 사건을 접하면서다.
22일 저녁 서울 여의도 번화가에서 김모(30) 씨가 흉기를 휘둘러 전 직장 동료와 지나가던 행인 등 4명에게 큰 상처를 입혔다. 직장을 잃고 재취업도 안 되는 상황에서 인생을 포기하는 심정으로 저지른 사건이었다.
피의자 김 씨는 2009년 피해자들과 함께 다니던 회사에서 부팀장으로 일하던 중 실적 부진과 동료 직원들의 험담에 스트레스를 받아 2010년 퇴사했다. 김 씨는 퇴사한 후 다른 회사에 취업했지만 다시 회사를 그만뒀다. 현재 무직 상태다. 신용불량자로 4000만 원의 빚이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경찰 조사 결과, 무직인 스스로가 한심해 자살하려고 했으나 혼자 죽기 억울해 이 같은 범죄를 저지른 것으로 밝혀졌다. 전 직장에서 자신을 험담한 동료에게 보복하고 싶었던 것. 자신의 삶이 망가진 원인을 그들에게서 찾고 있었다.
배경은 다르지만, 최근 발생한 살인미수 사건은 내몰린 인생들의 마지막 몸부림이라는 점에서 범행 동기가 비슷하다. 지난 18일 지하철 1호선 의정부역에서 행인 8명을 다치게 한 유모(39) 씨는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일용직 노동자였다. 범행 당일에도 유 씨는 동대문의 한 직업소개소에서 일자리를 알아보려 전철을 탔다가 이 같은 범행을 저질렀다.
21일 울산에서 벌어진 칼부림은 청년 실업자의 소행이었다. 피의자 이모(27) 씨는 일명 '은둔형 외톨이'였다. 중졸 학력인 이 씨는 3년 전부터 직업 없이 혼자 방에 틀어박혀 지내온 것으로 알려졌다.
▲ 22일 서울 여의도에서 흉기를 휘둘러 4명을 다치게 한 김모 씨가 거주하던 신림동 고시원 방. ⓒ연합뉴스 |
칼보다 무서운 흉기는 '자포자기' 심리
이견이 있겠지만, 사람이 벼랑 끝으로 내몰리게 되면 대부분 극단적인 선택을 고민하게 된다. 크게 두 갈래다. 누군가를 다치게 하지 못하는 여린 사람은 자신을 파괴하는 길을 택한다. 간혹 다른 길을 택하는 사람도 있다. 최근 발생하는 일련의 '칼부림' 사건이 그렇다. 이런 두 가지 선택은 결과 면에선 전혀 달라보이지만, 뿌리는 같다. '자포자기' 심리다.
자신의 삶을 포기해버린 이들은 자신에게 혹은 남에게 폭력을 휘두른다. 자신의 삶이 귀하지 않으므로, 남의 삶도 귀한 줄 모른다. A씨가 주머니에 칼을 넣고 학교에 갔던 날의 심정도 그랬을 게다.
A씨는 가끔 학창시절 이야기를 한다. 자기가 스스로를 포기해버리지 않도록 붙잡아주는 교사가 한 명만 있었더라도, 막다른 골목에서 의지할 친구들만 있었더라도, 그의 학창시절은 달랐을 것이라고 말이다. 최근 잇따른 '칼부림' 사건의 가해자들도 어쩌면 마찬가지일 게다. '자포자기' 상태에 빠지기 직전, 그들에게 손을 내민 이들이 있었다면, 그래서 그들이 일어설 수 있었다면, 그래도 그들은 칼을 뽑았을까. 아마 그렇지 않을 게다.
누군가의 삶이 망가졌다면, 그건 사회 전체의 책임
요즘 정치권에서 회자되는 '보편적 복지', '사회안전망 강화' 등은 거창한 게 아니다. 누구나 여러 가지 이유로 '자포자기' 상태에 빠질 수 있다. 그리고 자신을 포기해버린 사람만큼 무서운 흉기는 없다. 그렇게 되기 전에 손을 잡아주는 것. 그게 사회의 역할이다.
뻔한 이야기지만, 세상은 혼자 살아가는 곳이 아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영향을 주고 받으며, 더불어 살아가는 곳이다. 누군가의 삶이 망가졌다면, 거기에는 나, 그리고 우리의 책임도 있다. 정치권에서 회자되는 복지 담론은, 누구나 알고 있는 이런 '뻔한 이야기'를 다시 끄집어 낸 것이 다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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