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졸업하려면 4학기가 넘게 남았다. 모든 걸 혼자 해결해야 하는 이 씨에게 대학 생활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지금 상황으론 제대로 졸업할지도 미지수다. 돈이 문제다. 가정 형편은 여전히 좋지 않다. 혼자 등록금과 생활비를 충당해야 한다.
방학 때는 늘 학기 수업료와 생활비를 마련하기 위해 일을 한다. 두 달 동안 힘들게 일해야 겨우 등록금을 마련할 수 있다. 이전에 일하던 경험을 살려 공사현장 등에서 전선을 설치하는 작업을 했다. 위험한 작업이라 수당이 꽤 높았다.
일하다 여러 군데를 다치기도 했다. 배관 절단 작업을 하다 다리에 철이 박히기도 했다. 뼈가 부러진 적도 있었다. 워낙 험한 일이다 보니 상처는 늘어날 수밖에 없었다. 결국,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까지 몸이 고장 났다. 일하는 게 무리였다.
ⓒ다산인권센터 |
경비업체인 줄 알고 간 곳이 용역 업체
당장 이번 여름방학 때부터 다른 일을 알아봐야 했다. 하지만 케이블 설치처럼 단가가 높은 아르바이트를 찾기란 불가능했다. 우여곡절끝에 우연히 인터넷에서 경비직 모집 공고를 보게 됐다. 일반 아파트 경비와 같다는 설명이 붙어 있었다. 일당도 하루 10만 원이었다. 숙식도 가능했다. 일하는 곳이 인천이었지만 상관없었다. 곧바로 지원했다.
면접도 없었다. 서울 상암월드컵경기장으로 오라는 통보만 받았다. 급히 옷가지 등만 챙겨 도착한 곳에는 자기와 비슷한 사람들이 상당수 있었다. 어림잡아 1400명은 넘어 보였다. 이곳에 모여 인천으로 간다고 했다. 하지만 정작 당일 날 만난 담당자는 주소가 변경됐다며 강원도 원주로 가라고 했다. 주변에서 불만이 터져 나왔다. 그러자 '오기 싫은 사람은 그냥 집으로 가라'고 엄포를 놓았다. 부산에서 온 이 씨는 달리 선택할 길이 없었다.
전세 관광버스를 타고 원주로 향했다. 도착해보니 만도기계 문막 공장이었다. 파업사태를 겪고 있는 건 나중에야 알았다. 게다가 통상적인 경비업이 아니었다. 노조원이 공장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막는 일을 했다. 일명 '용역'이었다. 그게 지난 7월 27일의 일이었다.
이 씨가 이곳에서 맡은 일은 공장 정문에 서 있는 일이었다. 'security'라고 적힌 방패 하나만 주어졌다. 아무런 보호 장비도 받지 못했다. 그나마 이 씨가 공장에 들어올 당시, 노조원들은 휴가 중이라 물리적 충돌은 발생하지 않았다.
8시간 일하고 8시간 잠잤다. 나머지 8시간은 대기시간이었다. 말이 대기시간이었지 사실상 일하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 정해진 장소에서 대기하고 있어야 했기 때문이다. 일이 터지면 곧바로 달려가야 했다. 사실상 16시간을 일하는 셈이었다.
끊임없이 쏟아지는 육두문자, 언제 닥칠지 모르는 노조원에 불안해
잠도 편히 잘 수 없었다. 공장 내 대회의실, 복도, 강당 등에서 침낭 하나를 깔고 자야 했다. 옷 세탁은 화장실에서 해야 했다. 샤워장을 사용하기 위해선 밤샘 근무 이후, 3시간 동안 기다린 후에나 이용할 수 있었다. 워낙 사람이 많았다.
급여가 제대로 지급되지 않을 수도 있다는 불안감도 이 씨를 괴롭혔다. 주급으로 주겠다던 임금은 15일 단위로 지급하겠다고 멋대로 바꿔버렸다. 알아보니 이 씨가 속한 회사는 일명 '유령회사'였다. 법인도 없고, 회사 거주지도 없었다. 인터넷으로 검색해보니 커뮤니티 카페 회원 수 3명을 가진, 작년 11월에 만든 회사였다.
정신적으로도 괴로웠다. 언제 노조원이 들어올지 몰랐기 때문이다. 물리적 충돌이 벌어질까 노심초사했다. 근무 업체 부장의 괴롭힘도 견디기 어려웠다. 항상 욕을 입에 달고 다녔다. 육두문자는 기본이었고 인격 모독적인 발언도 서슴지 않았다. '아니꼬우면 그만두라'는 식이었다.
경비이수증도 마찬가지였다. 경비근무를 하려면 이수증이 반드시 필요했다. 처음 서울에 집합했을 때, 담당자는 경비이수증이 필요 없다는 식으로 이야기했다. 뭔가 다른 방법이 있나 싶었다. 하지만 착각이었다.
근무 중 갑자기 '경찰이 들어와 경비이수증 검사를 한다'며 이 씨 등을 옥상으로 피신시키기도 했다. 알고 보니 업체의 장난이었다. 그렇게 장난을 친 뒤 업체에선 경찰이 단속할지도 모르니 경비이수증을 발급받아야 한다며 14만 원을 내라고 했다. 부담스러운 돈이었다. 하지만 이수증을 만들지 않은 사람은 집으로 돌려보냈다. 어쩔 수 없이 이 씨는 돈을 주고 이수증을 발급받았다.
등록금 걱정에 '울며 겨자 먹기'로 2주를 이곳에서 버텼다. 하지만 더는 버티기 어려웠다. 언제 물리적 충돌이 일어날지 모른다는 두려움과 그렇게 일하고도 돈을 제대로 받지 못할 수 있다는 걱정 때문이었다.
ⓒ다산인권센터 |
함께 일한 200여 명 중 절반이 처음 용역 일 접해
이 씨가 일했던 곳은 자동차부품회사 만도 공장에 투입된 용역경비업체 '지원가드'다. 지원가드는 사실상 CJ시큐리티가 만든 유령회사로 알려졌다. CJ시큐리티는 이명박 정부 출범 이후, 한국3M, 재능교육, 구미KEC 등 노사 분규 현장에서 폭력을 행사하는 것으로 악명이 높다.
지원가드는 지난달 27일 만도의 문막·평택·익산 공장에 1400여 명을 배치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들은 서울 상암월드컵경기장과 인천 문학경기장에서 모인 뒤, 각각 정해진 장소로 흩어졌다. 이 씨도 여기에 포함됐던 셈이다.
문제는 이들 1400여 명 경비원 가운데 상당수가 결격사유를 지녔다는 점이다. 경찰 조사 결과, 만도 익산 공장에 배치된 200여 명의 경비원 가운데 20명이, 만도 문막 공장에 배치된 경비원 587명 가운데 264명이, 만도 평택 공장은 신고된 경비원 657명 가운데 66명이 교육 미이수 등 결격사유가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1400여 명의 경비원 가운데 350명이 '부적격자'인 셈이다.
이 씨가 일한 만도 문막공장에 투입된 경비원들의 경우, 가짜 교육이수증을 나눠준 정황도 드러났다. 현행법상 경비원 경험이 없는 사람은 현장 투입 전 28시간의 사전 교육을 받아야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던 셈이다. 이 씨도 마찬가지였다. 이 씨를 따르면 자신과 같이 일하던 200여 명의 용역 아르바이트생 중 절반이 20대 청년들로 이 일을 처음 하는 이들이었다.
누가 그들을 내몰고 있는가
이 씨는 일을 그만둔 뒤, 부산으로 내려와 막노동하고 있다. 조만간 다시 용역 업체에 들어가려 준비 중이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막노동으로는 등록금과 생활비 마련이 요원하기 때문이다.
이 씨는 그간 언론에서 자신을 '용역 깡패'로 이야기하는 것을 두고 답답하다고 했다. 이 씨는 "폭력이 정당화될 수는 없지만 스스로 살아남기 위해 해야 하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는 걸 말씀드리고 싶다"고 말했다.
이 씨는 "폭력적이지 않은 아르바이트생과 갓 스무 살 넘은 대학생들은 두려움에 떨며 근무를 선다"며 "그리고 긴급 상황에 놓여있을 때, 살기 위해 봉을 휘두른다"고 밝혔다. 이 씨는 "물론 우리는 비판받아 마땅한 사람"이라면서 "하지만 우리 역시 안타까운 사람들이라고 말하고 싶다"고 답답함을 토로했다.
이 씨는 "우리와 맞서 싸우는 노조원에게도 죄송하고, 스스로 두려움을 만드는 선택을 한 저 자신에게도 미안하다"며 "하지만 이 일을 하지 않으면 다음 학기에 학교에서 정상적인 생활을 하기 어려워진다는 걸 알기에 어쩔 수 없이 한다"고 말했다.
이 씨는 "물론 용역 일을 하는 것을 두고 많은 고민을 했다"며 "하지만 이것을 안 하면 달리할 수 있는 일이 없다"고 답답함을 호소했다. 이 씨는 "나 역시 이 일을 하고 싶어서 하는 게 아니라는 점을 알아줬으면 한다"고 한숨을 내쉬었다.
다산인권센터와 <프레시안>은 컨택터스를 비롯한 각종 용역업체에서 일하는 분들의 제보를 받습니다. 용역으로 일하면서 받는 비인간적인 처우 등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자 합니다. 용역도 우리 사회가 만들어 낸 상처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상처를 보듬고, 도울수 있는 부분이 있으면 돕고자 합니다. 부당한 처우에 관해 고소를 원할 경우, 법률지원도 해드립니다. 어려운 길은 한 발을 내딛는 것부터 시작합니다. 아래 연락처로 제보 바랍니다. ▶ 다산인권센터: 이메일 humandasan@gmail.com / 트위터 @humandasan ▶ 프레시안 : 이메일 kakiru@pressian.com - 폭력의 악순환, 용역 ☞ "누가 그들을 '용역 깡패'로 내몰았나" |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