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레시안>에서는 <해림 한정선의 천일우화(千一寓話)]>를 통해 우화의 사회성과 정치성을 복원하고자 한다. 부당하고 부패한 권력, 교활한 위정자, 맹목적인 대중들. 이 삼각동맹에 따끔한 풍자침을 한방 놓고자 한다. 또 갈등의 밭에 상생의 지혜라는 씨를 뿌리고, 아름답게 살고 있고 그렇게 살아가고자 하는 사람들의 바람과 감동을 민들레 꽃씨처럼 퍼뜨리고자 한다. 한정선 작가는 "얼음처럼 차갑고 냉정한 우화, 화톳불처럼 따뜻한 우화, 그리하여 '따뜻한 얼음'이라는 형용모순 같은 우화를 다양한 동식물이 등장하는 그림과 곁들어 연재하고자 한다"고 밝혔다.
한정선 작가는 화가로서 한국미술협회 회원이다. 대한민국 전통미술대전 특선을 수상했으며 중국 심양 예술박람회에서 동상을 받았다. <천일우화>는 열흘에 한 번씩 발행될 예정이다. <편집자>
한날한시에 죽은 하이에나와 여우와 족제비가 하계(下界)의 심판대에서 다시 만났다. 세 망자(亡者)들은 서로를 알아보고 흠칫했다.
망자들 앞에는 거대한 양팔 저울이 세워져 있었다. 망자들의 죄와 양심의 무게를 달아 천국과 지옥의 길을 결정하는 저울이었다.
"너희들은 한날한시, 한 장소에서 죽었구나. 자초지종을 말해 보이라."
머리가 세 개 달린 삼두견(三頭犬)이 세 망자들을 굽어보며 말했다.
"제가 공정하고 소상하게 아뢰겠습니다. 저는 이승에서 도둑질하고, 싸움질하고, 선량한 이를 속이는 나쁜 자들을 처벌하는 일을 했습니다. 또 숲의 법전에 선서한 대로, 법과 양심에 어긋난 죄를 지은 적이 없고 높은 도덕성과 사명감으로 오로지 숲의 정의를 위해 살아왔기에 셋이 한 곳에서 죽게 된 기가 막힐 일에 대해 제가 공정히 말할 수 있습니다."
맨 먼저 늙은 하이에나가 머리를 조아리며 입을 열었다.
하이에나의 말에 의하면 이랬다.
족제비는 숲 속의 정사(政事)를 맡고있는 여우의 집에 고기를 훔치러 들어갔다가 잡혔고, 하이에나는 족제비를 7일간 토굴에 가두고 30일간 사냥을 금지했다. 토굴에서 풀려난 족제비는 이번에는 하이에나의 집에서 먹이를 물고 달아났다. 하이에나는 여우와 함께 족제비를 벼랑으로 몰다가 낭떠러지에서 발을 헛디디는 바람에 셋 다 떨어져 죽었다.
하이에나가 말을 하는 동안 삼두견은 아홉 개의 눈을 모두 감고 있었다.
"족제비는 큰 도둑이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족제비를 엄벌한 건 숲의 장래를 위한 특단의 조치였습니다. 숲으로부터 권위를 인정받은 여우와 제집에 족제비가 몰래 발을 들여놨다는 건 숲 속 동물들의 공동 재산도, 숲에서 가장 존엄한 호랑이님의 양식도 훔쳐갈 수 있다는 걸 말해주기 때문이었습니다."
말을 마친 하이에나가 삼두견을 향해 이마가 땅에 닿도록 인사하자, 삼두견은 우측 머리를 끄덕였다.
여우는 윤기나는 꼬리를 살짝 낮추고 말하기 시작했다.
"저는 숲의 수많은 짐승을 먹여 살리기 위해 제 머리를 쥐어짜며 살아왔습니다. 제집에 쌓여 있는 보물은 그 봉사에 대한 조그만 보상일 뿐이죠. 숲에 먹을거리가 많아진 건 제 덕분이라고 모두들 칭송하는 데, 어떤 무리들은 제 명성을 끌어내리며 제 보물도 탐을 낸답니다. 족제비가 바로 그런 족속입니다."
이승에서는 숲만을 위해 살았으니, 이제는 천국에서 편히 쉬고 싶다는 여우의 말에 삼두견의 우측 머리가 끄덕였다. 하지만 아홉 개의 눈은 여전히 감겨 있었다.
족제비는 울먹이는 목소리로 자신의 사연을 털어놓았다.
"저는 본시 도둑이 아닙니다. 새끼들이 배를 곯아 죽게 생겨서 여우 집에 들어가 고기 한 덩이 물고 나왔을 뿐인데, 하이에나는 저를 잠깐 가두는데 그치지 않고 무려 한 달 동안이나 사냥을 금지했습니다. 그냥 굶어 죽으라는 소리지요. 사실 여우와 하이에나에게 숲은 먹을거리가 풍족할지 몰라도, 저 같은 작은 동물들은 배를 주리는 날이 많습니다. 그런데 고기 한 덩이 때문에 저를 벼랑 끝으로 몰다니요."
족제비는 언젠가 대형 양고기 절도 사건의 주범으로 몰린 여우를 숲 속에 기여 한 공로가 크다며 하이에나가 그냥 풀어주었다고 말했다. 그에 비하면 자신은 억울하다고 강변했다. 이번에는 삼두견의 좌측 머리가 아래위로 천천히 움직였다. 역시 눈은 감은 채였다.
"내 눈은 너희들의 과거, 현재, 미래를 볼 수 있다. 그럼에도 눈을 감고 있었던 건 공평무사함으로 너희들의 말을 듣고자 함이었고, 개과천선할 여지에 따라 심판관님께 다음 생을 점지해 달라 하기 위함이었다."
세 망자의 말을 듣고 난 삼두견이 아홉 개의 눈을 모조리 뜨고 말했다.
"이제 너희들은 이승에서의 죄와 방금 나에게 한 말들에 대한 양심의 저울을 통과해야 하느니라."
삼두견은 망자들에게 왼쪽 가슴에서 심장을 꺼내 저울에 올려놓으라고 명했다.
저울 한쪽에는 이미 붉은 심장 하나가 놓여 있었다. 그 심장은 숲에 사는 생물들의 평균적인 죄와 양심이며, 그 양심보다는 무거워야 천국에 갈 수 있다고 삼두견이 말했다.
족제비가 덜덜 떨며 자신의 심장을 먼저 저울에 올렸다. 족제비의 심장이 위로 올라갔다. 평균보다 약간 가벼웠다.
여우와 하이에나는 얼굴을 찌푸렸다. 하지만 이내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각자의 심장을 꺼내 저울에 올렸다. 둘의 심장은 유난히 검붉었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저울은 애초 기울여졌던 상태에서 꿈쩍하지 않았다.
"하계의 저울은 잘못되었습니다. 이승의 저울로 바꾸어 달게 해주십시오."
당황한 여우와 하이에나가 삼두견에게 항의했다.
삼두견은 여우와 하이에나를 쏘아보며 엄중하게 말했다.
"이건 하계의 저울이 아니다. 너희들이 숲의 쓰레기장에 내다 버린 저울이다."
ⓒ한정선 |
* 근대 민주주의의 대원칙은 '법 앞에서 만인은 평등하다'이다. 그러나 루소의 말처럼 '법은 돈이 많은 자들에게 항상 유리하고 빈털터리에게는 항상 해롭다'. 진부하기 짝이 없는 이 불편한 진실은 슬프지만 고착화된 현실이다.
최근 73세의 노인이 배가 고파 5차례에 걸쳐 총 13만1000원의 라면과 김치를 마트에서 훔친 죄로 징역 3개월을 선고받은 바 있다. 반면 2010년 부산저축은행 사건과 관련해 1억 원을 받은 은진수 전 감사위원은 1년6개월을 선고받았고, 그나마도 형기의 3분의 1을 채웠다는 이유로 최근 가석방됐다. BBK, 민간인 사찰, 도곡동 사저 문제도 검찰과 판사에 의해 안개 처리되지 않았는가.
검사와 판사 윤리강령에 따르면, 그들은 법과 양심에 따라 기소하고 공정하게 재판하고 정치적 중립성을 지켜야 한다고 되어 있다. 하지만 그들은 공정한 저울을 심심치 않게 내팽개친다.
일반인의 법의식보다 더 낮은 저울을 가진, 양심에 시커먼 털이 난 검찰. 그들의 양심의 무게는 얼마나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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