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 경복궁을 가로질러 신무문으로 나가면 바로 청와대
문화재청은 29일 노무현 대통령과 권양숙 여사, 어린이, 시민, 문화재 관계 인사들이 참석한 가운데 청와대 앞길과 맞닿은 신무문 개방행사를 열어 이제 일반인들도 경복궁의 남문이자 정문인 광화문으로 들어와 경복궁을 곧장 가로질러 신무문으로 나가 청와대까지 걸어다닐 수 있게 됐다.
문화재청은 "역사·문화적으로도 유의미한 청와대 주변의 아름다운 자연환경과 공간을 국민의 품으로 돌려줘야 한다는 대통령의 의지에 따라 북악산 개방과 함께 45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보안과 경호'의 이유로 굳게 닫혀 있던 신무문을 개방키로 했다"고 말했다.
문화재청은 신무문 개방을 계기로 경복궁 돌담길을 자유롭게 걷고, 경복궁 관람의 접근성을 높이게 됐으며, 지난 4월부터 시행 중인 청와대 앞길 의장행사 및 이와 함께 개방된 북악산 숙정문(서울 도성의 북문) 등의 연계 관람이 가능해졌다고 밝혔다.
또한 문화재청은 올 11월 시행될 광화문의 위치 복원 작업 등을 통해 서울 4대문 안의 옛 모습을 되살려 유네스코 세계역사도시로 등재할 수 있기를 기대하고 있다.
경복궁의 북문인 신무문…화려한 중국식 건축물인 집옥재
이번에 개방된 신무문은 경복궁의 북문이지만 담장 북쪽 중앙에 있지 않고 약간 서쪽에 치우쳐 있다. 현재 신무문 밖은 청와대 앞길로 이어져 있지만 원래 이 문은 경복궁 후원으로 통하는 문이었다. 지금의 청와대 앞길 인근이 예전에는 경복궁 후원이었기 때문이다.
신무문은 정면 2간, 측면 2간의 조촐한 규모로 이익공의 겹처마에 우진각 지붕을 하고 있는데 석축을 쌓고 가운데 홍예문(아치 모양의 문)을 냈다. 북문이기 때문에 신무문의 홍예에는 북방을 상징하는 현무(玄武)가 그려져 있다.
이날 함께 개방된 집옥재는 건청궁을 지을 당시인 고종 10년(1873년) 무렵 함께 지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건물.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고종의 서재와 외국사신의 접견 등에 쓰인 것으로 전해진다.
집옥재는 겹처마로 된 맞배지붕 양식으로 내부는 매우 화려한 단청 문양으로 장식되어 있다. 또한 다른 궁궐에서 찾을 수 없는 독특한 중국풍 양식으로 지어져 있어 매우 이국적인 느낌을 준다.
집옥재는 후면과 측면이 벽돌로 마감되어 있고 후면 가운데는 만월창문, 양쪽에는 각각 두 개의 반월창문을 둔 것이 중국풍을 강하게 띄고 있다. 지붕의 장식 역시 용마루 끝은 중국식 건물에서나 찾을 수 있는 용 모양의 이물(異物)로 마감해 놓았다.
집옥재는 이처럼 외양도 독특하지만 더욱 특이한 것은 밖에서 보면 단층 건물이지만 그 내부는 통로로 연결된 다락이 설치된 복층 구조라는 점이다.
신무문에 얽힌 기구한 사연
한편 이날 개방된 신무문은 우리 근현대사의 기구한 단면을 상징하는 곳이다. 1895년 명성황후가 일본 공사 미우라와 낭인들에 의해 시해되는 을미사변으로 생명의 위협을 느낀 고종이 1896년 2월 왕세자와 함께 궁내용 교자를 타고 바로 이 문을 통해 정동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하는 '아관파천'을 단행한 것. (동문인 건춘문 혹은 서문인 영추문을 통해 나왔다는 설도 있다.)
하지만 러시아와 일본은 1896년 5월 니콜라이 2세의 황제 대관식 이후 급격히 가까워져 로마노프-야마가타 협정을 맺었고 러시아 역시 경원 경성 탄광 채굴권, 압록강, 두만강 및 울릉도 벌채권과 같은 각종 이권을 요구하자 고종은 파천 1년 만인 1897년 2월 경운궁으로 환궁했다.
고종은 같은 해 10월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스스로 황제의 자리에 등극했지만 그 이후 대한제국은 일본의 영향력 속에서 급속히 몰락의 길을 걸었다.
또한 1979년 12.12 사태 당시 전두환, 노태우 등 당시 신군부 핵심 세력이 정변을 모의하기 위해 경복궁 수경사 30경비단으로 집결할 때도 이 문을 이용했다.
수방사 30경비단의 이전으로 가능해진 경복궁 복원
게다가 원래 경복궁이 일반에 공개됐던 지난 1954년 함께 개방됐던 이 문은 1961년 5.16 쿠테타 이후 군부대가 경복궁에 주둔하는 것과 함께 폐쇄됨으로써 경복궁 내의 30경비단이 군부의 비밀스러운 모의 장소로 사용되는 길을 열었다.
대통령을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보필한다는 명목으로 30경비단은 당시 보안사령부도 간섭하기 힘들 정도로 최정예 부대의 대우를 받았으며, 대통령 만찬에 유일하게 영관급 장교로 참석할 자격이 부여된 30경비단장은 당연히 진급과 출세코스로 선망의 대상으로서 하나회 회원들이 거의 독점하다시피했다.
그러나 87년 6·29 이후 민주화 바람에 의해 88년 5월
원래 이 30경비단 자리는 일제 때부터 군주둔지였다. 일본인들이 경복궁을 훼손하기 위해 조선총독부(구 중앙청)를 건립하면서 궁 내의 서북쪽에 해당하는 이 지역에 군을 주둔시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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