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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너진 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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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너진 둑

[해림 한정선의 천일우화(千一寓話)]<1> 누가 둑을 무너뜨렸는가

승자독식의 신자유주의 시대. 무한경쟁과 이기주의라는 담론 속에 갇힌 우리들에게 세상은 배신과 암투가 판치는 비열한 느와르 영화일 뿐이다. 이는 오늘날 많은 사람들에게 우화(寓話)가 처세를 위한 단순한 교훈쯤으로 받아들이는 근거로 작용하기도 한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와 조지 오웰에게 우화는 고도의 정치적 언술이자 풍자였으며, 대중을 설득하는 탁월한 수단이었다. 또 어떤 철학자와 사상가들에게는 다양한 가치를 논하는 비유적 수단이자 지혜의 보고(寶庫)였다.

<프레시안>에서는 <해림 한정선의 천일우화(千一寓話)]>를 통해 우화의 사회성과 정치성을 복원하고자 한다. 부당하고 부패한 권력, 교활한 위정자, 맹목적인 대중들. 이 삼각동맹에 따끔한 풍자침을 한방 놓고자 한다. 또 갈등의 밭에 상생의 지혜라는 씨를 뿌리고, 아름답게 살고 있고 그렇게 살아가고자 하는 사람들의 바람과 감동을 민들레 꽃씨처럼 퍼뜨리고자 한다. 한정선 작가는 "얼음처럼 차갑고 냉정한 우화, 화톳불처럼 따뜻한 우화, 그리하여 '따뜻한 얼음'이라는 형용모순 같은 우화를 다양한 동식물이 등장하는 그림과 곁들어 연재하고자 한다"고 밝혔다.

한정선 작가는 화가로서 한국미술협회 회원이다. 대한민국 전통미술대전 특선을 수상했으며 중국 심양 예술박람회에서 동상을 받았다. <천일우화>는 열흘에 한 번씩 발행될 예정이다. <편집자>

연못 둑이 무너졌다. 구멍이 점점 커지는가 싶더니 어느 순간 둑 한 쪽이 툭 터져버렸다.
책임을 둘러싸고 재판이 열렸다.

재판관인 게아재비와 소금쟁이 앞에 메기, 붕어, 미꾸라지, 우렁이가 불려와 있었다.
게아재비가 앞 다리를 오그리고 메기를 조심스럽게 올려다 보았다. 항간에 떠도는 메기의 의심스러운 지난 행적 몇 가지를 끄집어 내는 게아재비의 긴 다리가 바르르 떨고 있었다.

"내 기억에는 그런 일이 없다. 그런 허튼 소릴 내뱉는 자가 누구냐!"
메기는 수염을 빳빳이 세웠다. 사실 연못 식구들 모두 둑을 무너뜨린 주범으로 메기를 의심했다. 닥치는 대로 먹어치우고 걸핏하면 연못을 휘저으며 커다란 몸통으로 둑을 쿵쿵 쳐댔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찍어 누르는 메기의 눈빛에 모두 침묵했다. 게아재비는 소금쟁이와 귓속말로 소곤거리다 어물쩍 붕어에게 눈을 돌렸다.

게아재비가 늙은 붕어의 기색을 살피며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연못 한 가운데에서 일해 온 나요. 바닥으로 내려간 적도, 둑 가장자리로 간 적도 없소."
붕어가 아가미를 벌름거렸다. 게아재비는 고개를 끄덕이며 더 이상 붕어를 심문하지 않았다.그리고는 미꾸라지의 집 구멍이 둑을 무너지게 한 게 아니냐고 추궁했다.

"제 집은 둑 오른편이고 무너지게 한 구멍은 왼편입니다."
미꾸라지가 파닥거렸다. 얼마 전 붕어가 지렁이를 입에 문 채 둑 구멍에서 나오는 걸 본 적이 있었지만 미꾸라지는 그 말을 하지 않았다. 우렁이들 역시 미꾸라지가 둑의 구멍을 수차례 들락날락하는 걸 목격했으나 혀를 자신의 입 뚜껑 속으로 말아 넣었다.

마지막으로, 우렁이들이 심문을 받았다.
"둑에 대해 가장 잘 아는 건 바로 너희들이다. 거짓 없이 말하라."
가시 같이 뾰족해진 게아재비의 눈이 우렁이들을 쏘아보았다.
"우리들은 연못 바닥과 둑에 붙어살며 오히려 둑을 튼튼하게 만듭니다."
우렁이들은 죄를 뒤집어 씌우려 한다고 울었다.

게아재비는 소금쟁이를 데리고 연못 주위를 표표히 한 바퀴 살펴보고 돌아왔다. 그리고 단호한 어조로 판결을 내렸다.
"둑이 스스로 무너뜨렸습니다. 그러니 둑의 책임입니다."

ⓒ한정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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