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1 후쿠시마 원전 사고가 남긴 단 하나의 교훈은 생명의 최저선(bottom line)을 확인한 것이다. 일본의 많은 부모들은 아이들에게 아무것도 해줄 수 없음을, 깨끗한 공기와 물도 안전한 음식도 줄 수 없음을 절감하고 기도하고 있다. 일본은 '없으면 생명이 존재할 수 없는 기본'이 무엇인지 확인하고 있다. 이마저 배우지 못했다면 (이 고통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환경운동연합은 18일 '후쿠시마 핵발전소 참사 이후 일본의 사회문화적인 충격과 변화'라는 주제로 쓰지 신이치 교수 초청 강연을 열었다. 이날 쓰지 신이치 메이지가쿠인대 교수는 후쿠시마 사고 이후 일본 사회의 변화를 전하면서 '대안적인 삶으로 전환'의 필요성을 거듭 강조했다.
쓰지 신이치 교수는 <슬로 라이프>, <행복의 경제학> 등의 저자로 잘 알려진 문화인류학자이자 환경운동가이다.
"원전 사고 이후 가장 큰 충격은…"
쓰지 신이치 교수는 "3.11 원전 사고가 난 지 6개월 사이에는 대단히 역동적인 움직임이 있었다. '탈 원전'에 대한 기대가 높아지고 다양한 방법의 전환이 모색됐다"며 "그간 원자력 발전 관련 보도를 아예 하지 못했던 주요 미디어들이 보도를 사고 영향으로 보도에 나선 것도 영향이 컸다"고 말했다.
이어 그는 "그러나 6개월이 지난 이후 다시 돌아오는 추세가 시작되고 있다"며 "이것은 상황은 그렇게 쉽게 변화하지 않는다는 것, 그리고 원전을 둘러싸고 다양한 이해관계로 얽힌 강고한 연결이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고 말했다.
그는 "3.11 사고 이후 일본의 심리를 말한다면 굉장히 복잡한 상황이다. 사람마다 반응도 천차만별"이라며 "일부는 '일본은 전국이 다 오염됐다. 북반구도 안되겠다'며 남반구로 이사가는 사람도 있고, 동시에 후쿠시마 원전으로부터 30km 떨어진 곳에서 아무런 대책없이 사는 사람도 있다"고 말했다.
▲ 쓰지 신이치 교수, ⓒ연합뉴스 |
쓰지 신이치 교수는 "3.11 사고가 터지고 가장 충격을 받았던 것은 우리가 믿고 의심치 않았던 민주주의가 실상 뚜껑을 열어보니 아무 것도 없었다는 사실"이라며 "주류 미디어나 정치가 촘촘하게 둘러싸고 있어서 어지간해서는 부수고 나올 수 없는 성 안에 갇혀 살고 있었음을 알게 됐다"고 말했다.
그는 "일본에서는 한국처럼 군사독재가 없었음에도 주류의 논리가 훨씬 더 큰 힘으로 의식을 지배하고 있다는 생각"이라며 "정치적, 사회적 변화 가능성은 일본보다는 한국이 더 크지 않나 싶기도 하다"고도 말했다.
일본은 다음달 5일 홋카이도 하쿠원전 3호기가 정기점검에 들어가면 모든 원전의 가동이 중단된다. 그러나 일본 정부는 "'원전 제로 상황'을 막아야 한다"며 원전 재가동을 적극적으로 추진하고 있다.
그는 "일본 정부는 '지금은 괜찮지만 이번 여름에 더워지면 큰일난다'는 논리로 '원전 재가동' 캠페인을 벌이며 날뛰고 있다. 이같은 논리에 흔들리는 사람도 많다"면서 "스스로의 삶이 바뀌지 않은 상황에서는 후쿠시마 사고와 같은 큰 비극마저도 대전환을 만들어내기어렵다는 것을 잘 보여준다"고 말했다.
그는 "특히 일본은 투표를 통해 사회를 움직이는 면에서는 굉장히 늦다"면서 "올 7월에 일본에서도 녹색당이 생길 예정인데, 저도 기대와 응원을 하고 있으나 일본 정치가 바뀌는 것은 아직 멀었다고 본다"고 말했다.
그는 "한편으로는 투표로부터 변화를 시키는 것 자체가 구식이 되어버린 것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한다"면서 "앞으로 새로운 세계를 만들 젊은 사람들이 스스로의 삶을 바꾸는 것과 정치를 바꾸는 것을 동시에 진행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말했다.
"3.11이 남긴 유일한 교훈은 생명의 최저선을 확인한 것"
반면 사고 이후 일본 시민들 사이에서는 다양한 풀뿌리 활동도 일어나고 있다는 소개다. 쓰지 신이치 교수는 "가장 주목해야 하는 이들은 아이를 가진 부모들, 엄마들의 움직임"이라며 "사고 이후 부모들은 '아이들에게 줄 수 있는게 없다. 좋은 공기도, 깨끗한 물도, 오염되지 않은 음식도 줄 수 없고 수유 중인 엄마는 모유를 먹이는 것 자체를 두려워 하는 사회가 됐다"고 말했다.
그는 "3.11 사고가 남긴 유일한 교훈은 '생명의 기본선, 최저선(bottom line)'을 재확인 한 것"이라며 "물론 주류 사회는 이 기본선을 '돈'이라고 생각하지만 지금 일본의 부모들은 '아이들에게 깨끗한 공기와 물, 안전한 음식을 주십시오'라고 기도하고 있다. 없으면 존재할 수조차 없는 최후의 것이 무엇인지을 확인한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3.11을 통해 이를 배우지 못했다면 사실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생각한다"고 강조했다.
3.11 이후 일본 사회 내에서는 공동체 운동도 다시 활발해지고 있다고 한다. 쓰지 신이치 교수는 "원래 대안적 커뮤니티가 많은 큐슈 쪽으로 이사를 가 새로운 공동체를 꾸리는 사람도 많다"며 "농사를 지으면서 기존의 직업을 이어가는 식의 삶을 선택하는 사람들도 3.11 이후 크게 늘어났다"고 말했다.
그는 "3.11 이후 일본 풀뿌리의 움직임은 공동체화, 재로컬화 두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글로벌 시대로 인해 파괴된 공동체가 지역을 중심으로 다시 생겨나는 것"이라면서 "쓰나미 피해가 크지 않은 북해도나 동북 지역에서도 이런 움직임이 늘어나고 있다"고 말했다.
일부 공동체는 방사능 수치에 관한 일본 정부의 발표를 믿지 않고 스스로 기준을 정해 생활하고 있다는 전언이다. 쓰지 신이치 교수는 "최대한 방사능 측정기를 많이 입수해서 각자가 스스로 측정하고 스스로 정한 기준에 따라 살아가는 이들도 있다"며 "도쿄의 한 카페는 음식물의 방사능 수치를 측정할 수 있는 기계를 두고 시민들이 이용하게끔 하기도 한다"고 말했다.
그는 "최근 일본에서는 '행복'이라는 말이 특히 유행하고 있는데, 그간 풍요로움만 추구하다 마주쳐온 공허함이 3.11이후 더 뚜렷하게 눈에 보이기 시작한 것"이라며 "헬레나 호지의 <행복의 경제학> 영화 상영 운동이 전국에서 진행되고 있는 것도 마찬가지 이유"라고 말했다.
"'대 전환'이 필요한 것은 '에너지'가 아니라 '가치관'"
쓰지 신이치 교수는 후쿠시마 사고 이후 대체 에너지에 대한 논의가 확대되는 것에 대해 우려를 표했다. 그는 "3.11 이후 '원전이 아닌 무엇'을 이야기하면서 '대체', '전환'이라는 말이 유행하는데 위험한 부분이 있다고 생각한다"며 "과연 한국에서 21개의 원전을 대체하는 풍력 발전소를 해안에다 쭉 짓거나, 모든 건물 위에 태양광 발전기를 올리는 것이 답이 되는가"라고 물었다.
그는 "그만큼의 전력을 생산하고 경제 성장을 해나가야 한다는 환상 자체가 문제"라며 "가장 중요한 전환은 '에너지'가 아니라 '가치관'에서 이뤄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원전은 위험하다'고 생각하는 이들 중 대부분은 FTA 추진파인 경우가 많다. 같은 가치관 안에서 '무슨 에너지가 좋은가'를 선택하는 것일 뿐"이라며 "이를 뛰어넘는 새로운 비전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는 "원전 운전을 멈춰도 우리는 지진이 날 때마다 두려워해야 하는 엄청나게 많은 수의 원전을 가지고 있다. 이미 늦었다. 원전을 만든 사람들은 금방 죽어갈 것이고, 젊은 이들과 그들의 아이들이 이 짐을 떠넘겨 받게 될 것"이라며 "전환은 가치관의 변화 없이 이뤄지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원전을 모두 멈춰도 살아갈 수 있는 삶을 지금 당장 실행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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