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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인 척 하는 최고의 아마추어, 한국 드라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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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인 척 하는 최고의 아마추어, 한국 드라마

[모 피디의 그게 모!]농구와 드라마

힙훕(Hip-Hoop)이라는 단어를 아시는지? 힙합(hip-hop)과 농구골대를 뜻하는(hoop)의 합성어다. 힙훕은 승부로서의 스포츠이기 이전에 개인 기량을 개성적으로 뽐내는 것에 무게를 둔다. 화려한 드리블과 춤에 가까운 몸동작으로 이루어진 힙훕은 주로 3 대 3 게임에서 그 진가를 발휘한다. 힙훕 동영상을 처음 볼 때는 그야말로 눈이 열리는 듯 했다. 농구를 이렇게 할 수도 있는 거구나. 자유로운 길거리 농구로 회자되는 힙훕은 정규 농구 경기에서 좀처럼 느낄 수 없는 패션과 스타일로 또 다른 쾌감을 제공한다.

그러다보니, 힙훕에 열광하는 사람들은 힙훕 선수들의 실력에 대해 프로와 비교 평가를 하고 싶어한다. 왜 프로 농구로 가지 않는가. 프로 농구에서도 통할, 아니 뒤집어 놓을 실력인 것 같은데. 실례로 웹 상에는 힙훕퍼 안희욱 씨와 농구선수 문경은, 이상민, 김승현 등과의 1:1 대결 동영상이 떠돈다. 프로 선수들이 최선을 다하고 있는 것 같지는 않다는 점을 고려하더라도 안희욱 씨의 실력은 화려하기 그지없다. 하지만 힙훕퍼와 프로 선수의 실력 논쟁은 사실 언급 자체가 좀 말이 안 되는 것이긴 하다. 비록 힙훕퍼 만큼의 화려함과 쇼맨십은 없을지언정, 프로 선수의 수비력과 조직력, 슈팅력, 체력의 벽은 힙훕퍼가 쉽게 넘을 수 있는 게 아니다. 둘은 목표 자체가 다르다. 무슨 일이 있어도 승리를 거머쥐어야 하는 것이 프로라면 힙훕퍼는 농구라는 틀을 통한 자기 표현이 중요한 것이니까.

무슨 일을 하건 '프로'라는 표현은 상당한 자부심을 안겨준다. 이를테면 내가 비록 무명의 프로 농구 선수일지라도, 유명하고 팬도 많은 힙훕퍼의 실력과 기본적으로 레벨이 다르다는 위엄이랄까. 드라마 일을 하는 동안 비슷한 마음이 들 때가 있다. 제 아무리 사람들이 드라마를 비웃고 '내가 발로 만들어도 저것보단 잘 만들겠다'는 식의 거친 비판을 한다 해도, 수많은 제약 속에서 완결성 있는 영상물을 뚝딱 뚝딱 쏟아내는 것은 훈련된 사람들만 할 수 있는 '프로의 영역'인 거다. 내가 서장훈 급의 경기력이 아니라고 해서, 벤치워머라고 해서 함부로 폄하할만한 실력은 아닌 거다.

그런데 가끔씩 엄습하는 열패감의 정체는 무엇일까. 단편이나 독립 영화에서 가슴을 세게 후려맞는 듯한 기분을 느낄 때가 있다. 2011년 상반기를 두고 말하자면 <파수꾼>이나 <혜화, 동>같은 영화가 그러할 것이다. 이 자유로운 표현력, 거침없는 상상력, 뚜렷한 집중력이라니. 연속극 150부작 분량의 오해와 갈등, 긴장과 절망, 희망을 짧은 러닝타임 안에서도 더 깊게, 더 멋지게 표현한 작품들을 보면, 그냥 말이 없어진다. 더욱이 신인 감독이라며? 물론 뛰어난 작품을 만들었다고 해서 그들이 지금 당장 드라마 업계로 넘어와서 곧바로 괜찮은 결과물을 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경기장이 다른 만큼, 적응을 할 수 있느냐 없느냐의 여부는 알 수 없다. 비유하자면, 이 열패감은 정규리그 선수로서 5:5 풀코트 경기에선 내가 팀의 승리에 더 기여하겠지만, 1대1로 붙으면 왠지 져버릴 것 같다는 마음에서 생긴 것이다.

이 곳에서의 승리란 (작품성까지 있으면 더 좋은) 상업성이다. 작품성이 떨어져도 상업적 성공을 해내면 다음 경기 출장이 보장된다. 플레이가 아무리 화려해도 팀이 져버리면 벤치에 앉혀두기 십상이다. 모든 선수들이 경기장에서 화려한 개인기와 팀의 우승, 팬들의 환호를 한몸에 받는 마이클 조던 급의 플레이를 꿈꾸지만, 현실적 목표는 일단 팀의 승리와 지속적인 출장 여부일 수밖에 없다. 그러다 보면 팬들의 야유를 받는 플레이가 속출하기도 한다. 심한 반칙, 헐리우드 액션, 전술과 개인기가 돋보이는 플레이가 아닌, 신체적 우위를 지닌 용병으로만 밀어붙이는 단순한 플레이 등. 하지만 프로는 사랑받는 일보다 승리하는 일이 먼저 아닌가.

팬들의 사랑이 곧 드라마의 인기로 이어지는 드라마 업계는 덜 할 것 같지만, 의외로 이곳도 시청률과 수익을 위해 야유를 무릅쓰는 플레이가 속출한다. 센 갈등을 위해 캐릭터의 일관성이나 말하고자 하는 주제를 허공으로 날려보내는 '막장 드라마' 작법도 그렇고, 저마다 자기 뜻을 관철하려고 모여드는 사람들을 주체하지 못해 방송 직전에야 시놉시스도 완전히 정리되지 않은 채로 쪽대본으로 촬영에 들어가는 드라마들이 그렇고, 방송 중에도 시청률 상승을 위한 극약처방으로 이야기 자체가 망가지는 일들이 그렇다. 내가 꿈꾼 건 이런 더티 플레이가 아니었는데, 마이클 조던처럼 사뿐하게 비상해서 원핸드 덩크슛을 꽂아 넣고 싶었는데. 그럴 게 아니라면, 농구를 사랑하는 사람으로서 그냥 자유롭게 길거리 농구를 하는 게 낫지 않았을까. 프로리그란 게 이런 거였나. 농구팬들은 점점 KBL을 떠나 NBA로 마음을 달래고, 드라마팬들은 한국드라마를 떠나 미드를 본다.
▲ 내가 꿈꾼 건 이런 더티 플레이가 아니었는데, 마이클 조던처럼 사뿐하게 비상해서 원핸드 덩크슛을 꽂아 넣고 싶었는데.

승리도 중요하지만, 그 승리를 향하는 과정에서의 멋진 플레이가 핵심이다. 승리는 멋진 플레이에 따라오는 결과일 뿐이다. 그 멋진 플레이를 통해 보는 사람들의 가슴이 설레야 한다.

결국 프로리그란 그런 멋진 플레이가 나올 수 있는 생태계여야 한다. 승부는 그 다음에 찾아온다. 리그 자체가 매력적인 것이 더 중요하다. 포지션에 따라 다양한 재능을 가진 선수들의 실력이 마음껏 발휘되며 멋진 팀 간의 대결이 이루어지는 리그를 우리는 갖고 있는가? 농구 이야기냐고?

드라마가 그 내용보다 다음 날 인터넷에 양산되는 가십성 홍보성 기사로 판단된지 꽤 오래되었다. 기사 많이 나와서 클릭 많이 받고 포털에 댓글 많이 달리면 안도한다. 아, 사람들이 많이 보나보다. 실시간 검색 순위를 예의 주시하며 드라마의 성패를 가늠하는 일은 돌이켜보면 가망없이 처량맞다. 시간 때우기 용으로서의 가치 말고, 이야기로서의 가치에 대해서 팬들의 감사를 받는 드라마가 몇 개나 될까. 일 년이라도 시간을 이길 수 있는 작품이 몇이나 될까. 우리의 플레이는 프로 선수의 레벨이 맞긴 맞는 걸까. 화려함 뿐만 아니라 실력 조차 힙훕퍼들보다 떨어지는 것은 아닐까. 리그도 못났고 선수도 못났다고 넘기면 그만인가.

한국드라마를 무조건 폄하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 하지만 리그의 건강성은 진단해 봐야 한다. 드라마는 돈이 많이 필요한 장르다. 그런데 그 돈으로 만들어내는 이야기가 누구도 원하지 않은 이야기가 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승리할 이야기라는 목표에 집착하기 때문이다. 물론 대중성을 획득하고자 하는 노력은 대중문화에서 무척 중요하다. 하지만 그 노력은 창작의 핵심 인원들의 의기투합에 의해 이루어져야 한다. 감독도 원하지 않고, 작가도 원하지 않고, 배우도 원하지 않는 이야기의 배가 폭풍우 치는 리그에서 표류하는 일이 다반사. 그들의 멋진 플레이와 팀웍이 보는 이들의 설렘과 감동, 그리고 승리의 핵심이라는 것을 다들 잊어가고 있다. 농구 경기에서 감독과 구단주가, 광팬이 경기장에 난입해 슛을 쏘면 어찌 될까.

낭비다. 이 돈을 정말 일생일대의 이야기를 하고파하는 무대연출가, 독립영화 제작자들에게 지원하면 훨씬 나은 결과물들이 나올 것이다. 이야기에 임하는 성실한 태도는, 자기 것이라는 애착은 대부분의 제약을 뛰어 넘는다. 그러기 때문에 정규리그는 책임감을 가져야 한다. 이 리그에 이만큼의 자본이 모인 것에 부끄럽지 않은 플레이가 지속될 수 있도록 건강한 리그를 유지해야 한다. 구단주는 사무실에 모시고 감독은 벤치에 모시고 선수는 골대를 향해 날아오르면 된다. 제대로 된 프로 농구 선수라면 힙훕퍼들의 화려함에 버금가는 자신만의 플레이를 보여줄 것이다.

과연 스포츠가 드라마의 직유(直喩)가 될 수 있냐고? 너무 잘 돼서 문제다. 월화수목 미니시리즈 리그(방송국의 핵심 킬러 콘텐츠), 저녁일일연속극 리그(후에 이어지는 저녁 종합 뉴스 타임 때문에 방송국의 실세인 보도국의 관심을 듬뿍 받는 리그), 아침드라마 리그(불륜, 치정, 출생의 비밀과 각종 무리수들이 속출하는 전업 주부들의 리그), 주말연속극 리그(90년대의 영광은 지났지만 여전히 온 가족을 아우르는 시청층을 확보하고 있는 리그)… 각각의 리그에 방송 3사들이 동시간대 피튀기는 승부를 벌이고 있다. 그러느라 리그의 스트레스는 점점 올라 간다. 돈 버는 이야기와 좋은 이야기의 공존 따위, 굉장히 아마추어적으로 들린다. 프로라면 승리지. 그런데 가만, 승리에 가장 목마른 것은 선수들이어야 하지 않나? 그리고 그 승리를 위해 좋은 플레이를, 좋은 이야기를 만들어 가는 것 아닌가.

좋은 이야기가 아닌 것으로도 돈을 벌 수 있다는 생각이 가장 아마추어적이다. 가장 아마추어적인 생각이 가장 프로다운 양 하고 있는 것이 현재 한국 드라마 리그다. 그리고 좋은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것은 누가 중간에 대신 해줄 수 있는 게 아니다. 이야기를 하기로 한 사람들이 이끌어내야만 한다. 그래야 승부도 된다. 가뭄에 콩 나듯, 리그의 상태에도 불구하고 튀어나오는 멋진 플레이만 기대하고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러기엔 이야기 꾼의 세상에서 프로와 힙훕퍼의 차이란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단지 TV리그 안에 있느냐 바깥에 있느냐의 차이일 뿐이다. 리그를 감당할 체력의 차이 정도가 있을까. 기술력은 오히려 더 뛰어날 지 모른다.

90년대, 농구 붐이 일었던 시대가 있었다. 그 때 공을 잡은 사람들이 프로선수로, 힙훕퍼로, 동호인으로 여전히 농구에 대한 사랑과 열정을 이어가고 있지만 이제 더 이상 농구는 인기 스포츠가 아니다. 프로 리그, 용병, 힙훕 공연 등이 있어도 향수처럼 90년대의 농구붐을 떠올린다. HD TV, 신기술, 한류, 막강한 자본이 합류한 드라마 리그도 이와 비슷하다. 영상 세대들은 자라나 이 전 세대보다 더 나은 선수가 될 수 있다는 자부심으로 자신의 세상에 임하지만, 왠지 리그가 약속해줄 수 있는 감동은 예전만큼이라도 가능할 지 영 자신이 없다. 대한민국이라는 리그 자체가 그렇다고? 그렇다고 파인 플레이를 포기할 순 없지 않은가. 이 리그가 일단은 내게, 우리에겐 전부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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