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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적이고 정신나간 배우, 너를 믿은 내가 미쳤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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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이기적이고 정신나간 배우, 너를 믿은 내가 미쳤지!"

[모 피디의 그게 모!] '배우 의심 병'

병에 걸렸다. 증상은 다음과 같다. 외국 영화를 본다. 멋지고 예쁜 배우들의 연기를 보며 감격한다. 그리고 극장을 나오며 그 배우 멋있지 않았냐며 호들갑을 떨다, 순간 웃음기를 지우고 입을 삐죽이며 이렇게 말한다. "쟤네도 결국 현장에서 만나보면 다 정신 나간 짓들을 하겠지?"

여기서 배우의 정신 나간 짓이란? 연출의 지시를 깡그리 무시하고 하고 싶은 대로 하기, 이건 좋게 봐서 더 나은 작품을 위해 의견 조율 과정에서 나온 충돌이라고 우아하게 말해 보자. 이 핑계 저 핑계로 스케줄 마음대로 바꾸기. 기분 나쁘다고 아무한테나 욕하기, 더 나은 대우 안 해준다며 느닷없이 광범위하게 꼬투리 잡기, 촬영 빨리 끝내달라며 쪼기, 자기 분량 남들보다 먼저 찍고 먼저 가게 해달라고 조르기, 분장차에서 버티면서 촬영 현장에 늦게 나오기, 의상, 소품, 분장, 미용 다른 배우보다 화려하게 해달라며 스태프 들볶기, 대본 안 외워 오기, 사람들 인사 무시하기, 울면서 떼쓰기, 느닷없이 겹치기 출연 통보하기, 대본을 마음에 들게 바꿔달라며 촬영 거부하기, 촬영장 안팎에서 폭행, 폭언, 음주 등으로 인한 사건 사고로 사회적 물의에 오르기….

디테일하게 열거하자면 아라비안 나이트다. 촬영현장은 거대한 톱니바퀴 다발처럼 계획된 대로 굴러가줘야만 한다는 스트레스 아래서 진행되는 곳이다. 그런데 배우 톱니가 운행을 거부하면 이 다발 전체를 처음부터 다시 조립해야 하는 경우가 생긴다. 그리고 그 재조립에는 그만큼의 자본과 그에 해당하는 책임이 연출의 어깨에 놓인다. 자신의 톱니 운행 거부가 의미하는 바를 잘 모르고 문제를 일으키는 배우도 밉고, 자신의 행동이 의미하는 바를 너무나 잘 알면서도 자신은 그 이상으로 중요한 사람이기에 그런 문제들 좀 일어나도 '나는' 상관없다고 생각하는 배우는 더 밉다.

이러니, 존경하는 배우와 감독의 인터뷰 기사 같은 걸 봐도 곧이 곧대로 보이지 않고 그들의 마음의 소리가 떠오른다. 배우가 말한다. '처음엔 제가 맡은 역할에 대해 감독님과 의견 차이가 좀 있었어요. 하지만 감독님께서 제 해석을 지지해주셔서 잘 표현해 낼 수가 있었죠.' 이 글은 이렇게 읽힌다. '감독이 감각이 너무 없어 내가 연기하는 인물에 대해 이해를 못하고 있더라구. 그래서 그냥 연출 무시하고 내 마음대로 연기했지. 거 봐. 그러니까 결과도 좋잖아? 나 멋있지?' 이젠 감독이 맞장구를 친다. '애초에 생각했던 인물과는 좀 달랐지만 모 배우님만의 해석과 연기 덕분에 인물이 더 풍부해졌지요.' 이 말은 결국 이런 소리다. '너 내 말 절대 안 듣더라. 너 연기 못해서 망친 씬이 얼마나 많은 줄 아냐? 어차피 시키는 대로 안 할 거, 스태프들 보기 민망해서 그냥 원하는대로 연기하라고 하면서 내 속은 시커멓게 탔다 이 자식아.'

그러니까, 요는 배신감이다. 내 한 때 그대를 믿었는데. 정녕 그대를 원했는데. 캐스팅 단계에서 도원결의 하듯 눈을 빛내며 의기투합하던 우리가 아니었는가. 가슴 떨리는 작품 한 번 해보자던 우리가 아니었는가. 그런데, 그런데 어떻게 이리도 이기적일 수가 있나. 배우를 믿은 내가 미쳤던 걸까.

▲이 갈등의 핵심은 이기주의다. ⓒ'영화는 영화다'

그런데, 돌아보면 과연 나는 뭘 믿었던 것일까. 배우를 만나기 전부터 난 이미 그를 믿고 있었다. 그의 전작들을, 그가 보여준 연기를, 그로부터 받은 감동을. 그런데 스스로 알다시피 그것은 배우 본연의 모습이 아니다. 감독과 작가, 모든 스태프들의 노력 위에 쌓아올린 만들어진 모습일 뿐이다. 그럼에도 나는 그것으로부터 받은 감동으로 만나보지도 않은 배우를 어느 정도 안다고 생각하고 내 멋대로 믿어버린다. 나는 배우를 믿은 것이 아니라 내 생각을 믿어버린 것 아닌가. 결국 나중에 배신감을 느꼈네 어쩌네 말해봤자, 애초부터 믿음 자체가 비뚤어졌다는 걸 인정해야 한다. 배우에 대한 나의 시각은 대중의 시각과 별 다를 게 없었던 것이다. 배우 본연의 것이 아닌 배우의 이미지에 현혹됐을 뿐이다.

이 갈등의 핵심은 이기주의다. 업계에 떠도는 말로, 감독은 이기적이어야 한다는 말이 있다. 어차피 늘 상황은 안 받쳐주기 때문에 냉철하게 판단하지 않으면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없으므로, 주변의 고통에 잠시 눈 감더라도 독하게 원하는 바를 추구해야 한다는 것이다. 전체를 조율하고 책임지는 유일한 사람이니, 제대로 일하려면 어찌됐든 자기가 원하는 걸 관철해야 하지 않겠는가. 맞는 말이다. 부분적으로.

그런데 배우도 이기적이어야 한다는 말도 있다. 대사 암기와 신체 훈련, 민감한 반응 등을 통해 섬세한 감정선을 표현하는 일은 상당한 집중력을 필요로 한다. 경우에 따라선 사람들 앞에서 자신을 다 들키는 듯한 기분이 드는 일이기도 하다. 그리고 여러 테이크를 찍을 수 있는 상황도 많지 않고 한 번 OK가 떨어지면 다시 찍기도 힘들다. 그리고 그건 그대로 온 대중 앞에 적나라하게 노출된다. 그리고 그에 대한 반응은 배우 머리 위로 곧바로 떨어진다. 그러니 이 사람 저 사람 배려하며 착한 모습 보이느라 정신줄 놓지 말고 그냥 자기 것에만 집중하라는 것이다. 맡은 인물의 일관성에 대해선 감독보다 배우 자신이 더 잘 알 때가 많다. 사람들 이야기 다 받아주며 웃어주다 감정 놓치고 일관성 흔들려 연기 망치는 배우와 여기저기 짜증내며 예민하게 굴다가도 그 느낌을 이어가서 연기를 제대로 하는 배우,를 상상해보면 이 역시 맞는 말이다. 역시 부분적으로.

문제는 촬영 현장이 개인의 예술적 작업장이 아니라 거대한 사회생활이라는 점이다. 많게는 수백명이 한 현장에서 지시를 따르며 호흡하는 곳이다. 보통 단체 협업은 정확한 목표와 깔끔한 분업을 통한 일사분란한 움직임이 생명이다. 일반적인 협업이라면 이기적 행동은 퇴출대상이다. 그러나 촬영 현장에서의 이기적 행동이란, 더 나은 예술적 결과를 위한 집중력의 다른 말일 수 있다. 이러니 상황이 복잡해진다. 이기적인 행동을 늘 욕할 수만은 없게 되는 것이다. 자신의 비전을 추구하는 이기적 욕심과 타인을 배려하는 사회적 감각이 쉴 새 없이 교차해야 한다. 자동차의 전진 기어와 후진 기어를 계속 번갈아 넣어가며 운전을 하는 격이다.

여기에 착각와 권력이 끼어들면 재앙이 일어난다. 내가 A급 배우인데, 내가 노장 감독인데. 내가 원하는 것이 모두 관철되는 일이 곧 이 작품을 위한 것이라는 착각. 누가 더 센지를 겨루는 권력 다툼. 이것들로 무게추가 기울어지면, 촬영 현장의 인간군상들은 고등학교 교실과 초등학교 교실의 단점만 섞어 놓은 사람들의 집단이나 다를 바 없어진다. 1진 따지며 약한 아이들 괴롭히고, 담임 선생님 눈치 보며 종칠 시간만 기다리는. 배움을 위한 교실이 아니라, 약육 강식과 잔머리와 사회생활의 쓴 맛을 몸에 새기는 곳으로.

업계의 무게 중심은 급격하게 스타 배우들에게로 이동했다. 그들의 예술적 노력을 벗어난 이기적인 요구들에 대해 끊임없이 이해하고 배려하고 대화하는 것이 감독의 큰 업무 중의 하나가 되었다. 보통의 사회생활이라면 명쾌하게 옳고 그름을 따지고 책임을 물을 일들도 있다. 그러나 이 일은 꿈과 환상을 만들어 사람들에게 내보이는 일이다. 공개적으로 시시비비를 물음으로써 그 환상을 깨는 것은 게임의 룰을 배반하는 짓이다. 아무도 원치 않는다. 그럴 때 현장은 속으로 곪는다. 종기가 터져 엉뚱한 사람이 모함을 뒤집어 쓰기도 한다.

이렇듯 마음의 병이 커져 배우 의심증이 뿌리를 내릴 때면, 나는 눈을 감고 어떤 장면을 떠올린다. 핀라이트를 받으며 이마엔 송글송글 땀이 맺힌 채로 눈을 빛내며 연기를 하고 있는 배우들과, 그에 압도되어 객석에 앉아있던 나. 손바닥이 아프도록 박수를 치고 난 후, 얼얼한 마음으로 객석을 나서자 어느 틈에 출구에 줄 서서 관객에게 공손히 인사를 하는 배우들. 그들의 성취감이 깃든 눈과 후련한 미소. 겸손함. 그리고 내가 느꼈던 황송함.
나는, 우리는 얼마나 쉽게 배우를 동경하고 욕망했던가. 마음 속에 비밀스럽게 감춰둔 감정을 툭툭 건드리는 작품을 볼 때, 우리는 얼마나 쉽게 배우 앞에 무너졌던가.

눈을 떠보면, 조금은 차분해진다. 결국 나의 배우들에게서 사람들이 그런 감동과 황송함을 느껴줬으면 하는 것 아닌가. 그게 가능한 지점이 느껴지고, 그것과는 별개의 욕심들이 대충 구분이 된다. 나를 비롯해 전부 다 마음 속에 어린 아이 하나씩 앉혀놓고 어리광을 부리는 거다. 그 어린 아이가 가끔씩 놀랄 만한 재주를 이끌어내니까 못 숨기는 거다. 정작 사회생활을 해야할 때, 어른으로 미처 못돌아오는 거다. 그 어린 아이가 파도처럼 몰아치는 동경과 욕망을 뒤집어 쓰면 제 정신으로 있기가 쉽지가 않은 거다.

여기는 개인적인 예술 작업장이자 거대한 사회 생활이다. 헛갈린다. 신뢰와 의심이 교차한다. 어린 아이와 어른이 번갈아 튀어나온다. 이기심과 배려가 꼬여버린다. 나는 배우 의심 병이라는 평형자를 들고 외줄타기를 계속할 모양이지만, 언젠가는 가볍게 균형을 잡고 이 곳을 노닐 수 있는 달인이 될지도 모른다. 그 때는 말할 수 있을까? 사람 마음 이제 좀 알 것 같다고, 그냥 별 거 아니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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