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준 교육부총리의 거취 문제가 자진 사퇴 쪽으로 가닥이 잡히고 있는 가운데 새삼스레 노무현 대통령의 인사 스타일이 도마에 오르고 있다. 그 간은 '코드 인사'가 문제의 핵심이라는 주장이 많았지만 이것만으로 설명하기에는 부족함이 적지 않다.
'김병준 사태'는 해결되는 기미지만…
관저에서 휴가를 보내고 있는 노무현 대통령은 지난 31일 한명숙 총리와 오찬회동, 수석 및 보좌관 회의를 연달아 소집해 김 부총리의 '자진사퇴' 쪽으로 의견을 모은 것으로 알려졌다.
1일 국회 교육위의 사실규명 상황을 보고 최종적으로 결정한다는 단서가 남아 있긴 하지만 하루 동안의 상임위를 통해 사실규명이 말끔히 이뤄지기가 난망하다는 점을 감안하면 이는 사실상 요식행위나 다름없어 보인다.
결국 국회의 해임건의안 의결, 여당과 청와대의 공개적 정면충돌 등 최악의 상황은 피하는 형국이 됐지만 법무부 장관, 건강보험관리공단 이사장 등 줄줄이 기다리고 있는 인사 요인에도 뇌관은 잠재해 있다.
현재 여당은 "문재인 청와대 전 민정수석을 법무부 장관에 임명하는 것은 불가하다"는 입장을 청와대에 전달해놓고 있고 사실상 건보 이사장에 내정된 것으로 알려진 이재용 전 환경부 장관에 대해서는 벌써부터 "의원 낙선->환경부장관->대구시장 낙선->건보이사장이라는 최악의 보은인사"라는 비판이 터져 나오고 있다.
이런 판국에 노 대통령이 다시 '오기 인사'를 강행한다면 상황은 걷잡을 수 없게 전개될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빚이 작아 적재적소에 인사 할 수 있다"던 청와대
노무현 대통령의 인사스타일이 애초부터 비판의 대상이었던 것은 아니다. 이창동 전 문화부 장관, 강금실 전 법무부 장관, 진대제 전 정통부 장관 등은 해당분야 전문가이면서 주류 관료사회의 관행에 물들지 않은 신선한 인사로 관가에 새바람을 불어넣기도 했다.
또한 노 대통령의 측근들은 "김영삼, 김대중 전 대통령은 오랜 정치 활동을 통해 빚을 갚아야 할 사람이 많아 인사에 무리가 있었지만 노무현 대통령은 그들에 비해 빚이 작기 때문에 원하는 대로 적재적소에 사람을 쓸 수 있다"고 자랑했었다.
그러나 임기를 1년 6개월 남짓 남긴 현재 현 정권의 인사를 적재적소, 신선함 등의 단어로 풀이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청와대만 빼놓고.
이는 최근 들어 청와대에서 "인사는 임명권자인 대통령의 고유권한"이라는 당연한 명제가 하루가 멀다 하고 강조되는 것으로도 쉽게 증명된다. 게다가 이는 과거 정권과 달리 야당을 향한 것이 아니라 주로 '아군' 격인 여당을 향한 것이라는 점도 눈에 띤다.
'코드'만 문제가 아니다
노무현 대통령 인사의 문제점은 주로 '코드' 문제로 풀이돼 왔다. 그러나 온갖 도덕적 문제로 인해 현 정부 최단명 장관으로 기록된 이기준 전 교육부총리나 부동산 투기 의혹으로 사퇴한 이헌재 전 경제부총리, 비서실장 재직 당시 황우석 사건의 책임에서 자유롭지 않았지만 컴백한 김우식 과기부총리 등은 노 대통령과 '코드'가 맞는 인물들로 규정하기도 힘들다.
'코드'에 '보은', '좁은 인재풀' '오기' 등의 키워드가 더해져야 노 대통령의 인사 스타일에 대한 설명이 가능하다는 것.
'보은'을 상징하는 인사는 앞서 지적한 이재용 전 장관 외에 '불법 대선자금으로 구속수감->집행유예 출소->사면복권->보궐선거 출마 낙선->장관 임명'의 과정을 거친 이상수 노동부 장관이 대표적이다.
노 대통령의 이 같은 보은인사에 대해 정치권에서는 "YS나 DJ도 자기사람을 끔찍이 챙겼지만 '모양새'를 갖추기 위해 애썼는데 오히려 노 대통령이 '빚'에 더 민감한 것 같다"고 지적하고 있다.
'좁은 인재풀'의 사례는 손으로 꼽기도 힘들다. 권오규 경제부총리, 김우식 과기부총리, 변양균 청와대 정책실장, 그리고 김병준 부총리까지 내각과 청와대를 오가는 인사에 대해 여당 내에서도 "청와대하고 (정부종합)청사 사이에 회전문이라도 달렸냐"는 비아냥이 나온 지 오래다. 이에 대해서는 "노 대통령이 의외로 낯을 가리고 한번 신뢰를 보낸 인사에 대해서 끝까지 가는 스타일이기 때문"이라는 풀이도 나오고 있다.
그리고 '오기'라는 키워드는 나머지 세 개의 단어를 포괄해서 작동한다. 코드, 좁은 인재풀, 보은에 오기가 결합하는 모양새를 보여 왔다는 것.
이기준 전 교육부총리의 경우 이미 서울대 총장 시절 판공비 유용의혹, 밀어붙이기식 행정 등으로 학생들은 물론 교수사회로부터 극심한 비판을 받은 바 있고 한 동안 언론을 장식하기도 했다. 따라서 부총리 임명 전부터 이에 대한 우려가 쏟아졌지만 청와대는 귀를 막은 채 "이미 그 문제는 해결된 것 아니냐"며 "이기준 전 총장이야말로 대학구조조정의 적임자"라면서 임명을 강행했다.
이 전 부총리는 김우식 현 과기부총리의 40년 지기로 당시 비서실장이던 김 부총리의 천거로 발탁된 것으로 알려졌다. 이는 좁은 인재풀과 오기가 결합된 사례로 분류할 수 있다. 이 전 부총리 인사에 책임이 큰 김 전 실장이 부총리로 컴백한 것도 마찬가지다.
또한 황우석 전 교수와 함께 이른바 '황금박쥐' 멤버로 노무현 대통령의 눈과 귀를 가리는 데에 한 몫 한 박기영 전 청와대 과학기술 보좌관에게는 어떠한 문책도 하지 않았다. 청와대는 "여론몰이식 문책은 안 되고 실제로 책임이 있는지 명확하게 따져봐야 한다"며 버텼고 결국 박 전 보좌관은 아무 책임도 지지 않고 순천대 교수로 복직했다.
노 대통령의 대선후보 시절 과학기술정책 자문을 맡으며 인연을 맺었던 박 전 보좌관의 사례는 코드와 오기가 결합된 것으로 분류가 가능하다. 당청관계를 일촉즉발의 위기로 몰아넣었던 유시민 복지부 장관 임명이나 김병준 부총리도 마찬가지 케이스다.
이처럼 노 대통령은 언론과 여론의 반대의 목소리가 높아질 수록 오히려 고집을 꺽지 않고 '오기'를 부리는 모습을 연출해 왔다.
"아마도 특유의 인사스타일은 더 강화될 것"
이같은 '오기 인사'에 대해서는 노 대통령이 '역발상, 정면돌파' 등으로 난국을 헤치고 대통령 자리에 올랐던 과거 경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탓이라는 지적이 많다. 게다가 노 대통령의 그런 경험에 특유의 '역사의식'이 합쳐졌다는 것.
서강대 손호철 교수는 "대통령은 다른 분야도 별다를 것 없지만 특히 인사 문제에 있어서 그야말로 버틸 수 없는, 결정적 국면까지 밀어 붙이는 스타일이었다"며 "이는 일반 국민이나 야당은 말할 것도 없고 여당 역시 여론이나 선거에만 신경 쓰는 집단이지만 본인은 역사적 정당성을 가지고 긴 호흡으로 통치하는 존재라는 노 대통령의 독특한 자기 규정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설명했다.
손 교수는 "임기 중반에는 그래도 뒤를 보고 한 발 물러서고 정리하는 모양새를 취한 적도 있지만 이제 임기 말이기 때문에 더 버틸 것"이라며 "한발이라도 물러서면 레임덕을 자초한다는 강박관념이 그 경향을 더 강하게 하고 있는 것 같다"고 분석했다.
손 교수는 "5.31 지방선거에서 나타난 민심은 '진보가 아니라 보수가 맞다'는 것이 아니고 '겸손하고 차분하게 국정을 운영하라는 것'이었다"며 "하지만 노 대통령 특유의 스타일은 더 강화되는 느낌"이라고 말했다.
김병준, 역대 6위 단명 장관으로 기록될 듯
지난달 21일 임명장을 받은 김병준 부총리가 오는 3일 이전에 사의를 표명하면 결국 김 부총리는 역대 단명 장관 6위를 기록하게 된다.
현재 6위를 기록하고 있는 인사는 지난 2003년 "대통령이 태풍 분다고 오페라 보러 가면 안 되냐"는 발언으로 물의를 빚자 고 건 당시 총리가 해임건의안을 제출해 14일 만에 낙마한 최낙정 전 해수부장관이다.
또한 김 부총리의 조기 낙마로 인해 노무현 정부의 내각은 역대 최단명 장관 10위 안에 3명을 진입시키는 불명예를 안게 됐다. 57시간 30분 동안 재임해 지금까지는 현 정부의 최단명 장관인 이기준 전 교육부총리는 역대 기록으로 따지면 DJ정부 시절 안동수 전 법무부 장관에 이어 2위다. 코드, 보은, 좁은 인재풀, 오기가 낳은 결과물인 셈이다.
임계치에 육박하고 있는 당청관계
이처럼 오기에 가까운 노 대통령의 인사 스타일은 유례를 찾기 힘든 당청관계의 난맥상을 불러일으키는 주요인이 되었다.
지난 5.31 지방선거에서 여당은 최악의 패배를 당했지만 청와대는 "선거는 당의 책임"이라며 분리시켰고 이는 다른 정치적 사안에서 여당이 애써 청와대를 엄호하지 않는 부메랑을 돌아왔다. 그런 상황 속에서 최근 김근태 체제 출범 이후 당 내의 비판에도 불구하고 청와대와 각을 세우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여당 지도부가 느끼는 배신감도 설명될 수 있다.
그 배신감 속에서는 김병준 부총리의 임명 문제도 큰 몫을 차지하고 있다. 김 부총리 임명 전부터 당내에 반대 목소리가 많았지만 김근태 의장은 우유부단하다는 비판을 감수하면서까지 대통령의 인사권을 존중했고 인사청문회에서도 적극 엄호에 나섰다는 것이 여당 지도부의 생각이다.
그리고 김 부총리의 의혹이 걷잡을 수 없이 터져 나온 이후까지 김 의장은 말을 아끼며 김 부총리와 비공개로 만나 해명과 거취를 스스로 표명할 수 있는 기회를 줬지만 김 부총리는 "청문회를 열어달라"고 '뒤통수'를 때렸다는 것.
이에 대해 여당의 한 핵심인사는 "결국 청문회 열면 여당이 자기를 엄호해 줄 수밖에 없다고 판단한 것 아니겠느냐"며 "김 부총리가 청와대를 믿지 않으면 뭘 믿고 우리와 상의도 없이 이렇게 안하무인으로 나오겠냐"고 분통을 터뜨렸다. 당-정-청 관계의 여러 국면 가운데 삐걱거리지 않는 것이 없는 셈이다.
물론 김 부총리의 퇴진 쪽으로 가닥이 잡힘에 따라 당-청 간의 정면충돌은 면하게 됐다. 이 와중에 김 의장의 의중이 청와대 전달됐고 한명숙 총리도 김한길 원내대표와 여러 의원들의 의견을 청취해 대통령에게 전한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이에 이르기까지 청와대는 당에서 전달되는 여러 시그널들을 여전히 무시하는 행태를 보였다. 김 부총리에 대한 비판이 높아짐에도 불구하고 청와대는 "목소리 큰 몇몇 의원의 목소리일 뿐 당의 공식입장이 아니지 않냐"는 입장이었고, 한 핵심 관계자는 "말은 쉽지만 중요한 것은 대안"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결국 김병준이라는 당면의 뇌관은 제거됐지만 당청관계는 폭발의 임계치에 점점 가까워지고 있는 형국이다. 김근태 체제 출범 이후 "그래도 연말 정기국회 마무리까지는 당청관계가 유지되지 않겠냐"는 관측이 우세했지만 이제는 이를 장담키 힘든 상황이됐다.
연일 회의와 고민으로 휴가 같지 않은 휴가를 보내고 있는 대통령이 복귀해 법무부 장관의 인선을 확정짓는 다음 주가 오기 인사와 그 여파로서의 당-청 갈등에 또 한번의 분수령이 될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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