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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산의 외면된 아픔…막달레나공동체 '고별 미사' 하던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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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산의 외면된 아픔…막달레나공동체 '고별 미사' 하던 날

[현장] 용산 성매매 집결지를 울린 '마지막 미사'

골목을 따라 들어가자 집의 잔해가 보였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붉은 불빛이 밤을 낮처럼 훤히 비추던 곳, 누군가에겐 '쾌락'의 공간이었지만 누군가에겐 '절망'의 다른 이름이었던 곳. '철거'라고 쓰인 붉은 글씨와 깨진 유리창이 그곳의 오늘을 말해주고 있었다.

'재개발'의 다른 이름인 철거가 시작된 지역, 그 철거 때문에 남편을 잃은 한 세입자의 말처럼, '없는 사람의 지옥이 부유한 사람의 낙원'으로 변할 지역이 있다. 바로 용산이다.

용산의 재개발로 당장 삶의 뿌리가 흔들릴 사람들이 또 있다. 이제는 흔적없이 허물린 남일당 건물 맞은편, 성매매 집결지의 여성들이다. 재개발 호재로 땅값이 크게 오른 건물주들에겐 '대박'이 터졌고, 하다못해 성매매 업주들도 대책위를 꾸려 보상을 받으려 하지만, 이곳에 고용된 성매매 여성들에게 재개발은 또 하나의 '재앙'이 될 수밖에 없다.

▲ 용산 재개발로 건물주들에겐 '대박'이 터졌지만, 이곳에서 일하는 성매매 여성들에겐 재개발이 또 하나의 '재앙'일 수밖에 없다. 집결지의 성매매 업소 대부분이 문을 닫은 가운데, 한 업소가 불을 켜고 영업을 하고 있다. ⓒ프레시안(선명수)

성매매특별법과 단속 등, 온갖 행정력으로도 밀어내지 못했던 용산의 성매매 집결지는 그렇게 자본이란 이름의 욕망이 만들어낸 재개발로 사라지고 있었다. 이미 용산역 뒷골목을 중심으로 대부분의 업소는 이곳을 정리하고 다른 곳으로 떠났고, 아직도 영업 중인 곳은 서너 곳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이곳에서 일하는 여성들에 대한 대책은 전무한 실정이다. 이곳이 헐린다고 해서 성매매를 그만둘 수 있는 여성도 많지 않다. '누구는 천호동 어디로 떠났다더라', '누구는 해외로 나갔다더라'는 종류의 소문만 무성한 가운데, 용산의 뒷골목은 깨진 유리창과 벽면의 낙서로 을씨년스러운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 재개발의 광풍은 용산 성매매 집결지에도 불어닥쳤다. 대부분의 업소가 문을 닫은 용산역 뒷편 성매매 집결지는 '폐허'를 방불케 했다. ⓒ프레시안(선명수)

ⓒ이경은

눈이 비처럼 쏟아지던 27일 오후, 용산역 맞은편 성매매 집결지 한가운데서 난데없는 성가 소리가 울려 퍼졌다. 25년 전, 용산의 성매매 여성을 지원하고자 문을 연 '막달레나 공동체'가 이 지역 성매매 여성들과 함께 연 '송년 미사'였다.

세상이 밀어낸 사람들, 용산이 밀어낸 사람들

말이 송년 미사지, 사실은 하나 둘 떠나가 텅 비어버린 성매매 집결지에서 열린 마지막 '고별 미사'였다. 미사가 진행되는 동안에도 맞은편에선 아직 영업 중인 성매매 업소의 붉은 불빛이 용산을 비추고 있었지만, 이곳 여성들은 재개발이 시작되자 하나 둘 소리없이 용산을 떠났다. 재개발의 환희 뒤에 가려졌던, 누구도 끄집어내고 싶어하지 않았던 사람들이다.

▲ 27일, 용산 성매매 집결지 한가운데서 '송년 미사'가 열렸다. 말이야 송년 미사지, 사실은 하나 둘 떠나가 텅 비어버린 성매매 집결지에서 열린 마지막 '고별 미사'였다. ⓒ이경은

이들에게 용산은 '도시 속의 섬' 같은 곳이었다. 막달레나공동체 부설 용감한여성연구소 원미혜 소장은 "용산은 사회적 관계에서 단절된 성매매 여성들에게 20~40여 년간 서로 의지하며 살아왔던 고향 같은 곳"이라며 "외부와의 소통은 차단됐지만, 이 안에서 나름의 공동체를 만들어 서로 의지해왔는데, 이제 재개발로 뿔뿔이 흩어지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있다"고 설명했다.

ⓒ이경은
그만큼 재개발을 대하는 이곳 여성들의 심경은 이중적이다. 한편으론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나고 싶을만큼 고통스러운 기억이 머문 곳이지만, 또 한편으론 낯선 곳에 홀로 떨어져 정착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도 존재한다. 미사의 시작은 '헤어짐'이었지만, 마지막은 서로에 대한 '축복'일 수밖에 없는 까닭이다.

25년 전, 성매매 여성을 엄마로 둔 다섯 살짜리 여자아이가 길가에서 성추행을 당하는 모습을 보고 막달레나공동체를 설립했던 이옥정 대표의 감회는 남달랐다. 성매매 여성들이 자신의 아픔을 스스로 보듬어볼 기회조차 없이 뿔뿔이 흩어지는 것이 무엇보다 안타까웠던 그다. 용산 성매매 여성들에겐 '대표'보단 '큰 언니'라는 호칭이 더 익숙할 정도로 오랜 세월 그들과 동고동락했던 그는 마지막 편지를 읽으며 끝내 눈물을 감추지 못했다.

"먹던 소주병을 던지며 욕설을 퍼붓던 성판매 여성도, 우릴 보면 재수없다고 소금을 뿌리던 업주도, 쉼터까지 업주를 따라와 협박하던 건달도, 구멍가게 주인도, 미용실 주인도, 해장국집 주인도, 포장마차 주인도, 우리와 한 동네 사는 친구가 되었습니다. 우리 동네에서 우리는, 그렇게 살았습니다. 어떤 이는 10년, 어떤 이는 20년, 어떤 이는 30년, 40년, 50년을 함께 이웃하며 이곳을 고향인 것처럼 살아왔습니다.

그런 우리들은 이제 모두 이곳을 떠나가야 합니다. 어떤 이는 자식 곁으로, 어떤 이는 새로운 일자리를 구해서, 또 이것도 저것도 안 되는 이는 또 다른 성매매 현장으로 갑니다. 누가 언제 어디로 떠난지 모르게, 그렇게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떠나가고 있습니다."


편지글은 용산에서 생을 마감한 성매매 여성들의 이야기로 마무리됐다. 용산을 먼저 떠나간 이들의 이름이 한 명 한 명 호명되자, 참가자들의 어깨가 들썩였다.

"금자(이하 가명-편집자), 창숙, 선옥, 현지, 재숙, 옥희, 영숙 모자, 혜진, 형숙, 용순, 용희 모녀, 인희…. 그 외 옥상에서 한강에서 투신하거나, 화재로 죽은 우리 용산 친구들의 영혼을 하느님께서 위로해 주실거라 믿으며, 용산에서의 이별을 고합니다. 이젠 당신들도 더 이상 용산에서의 아픔을 잊고 하느님 안에서 편안하길 빕니다."

철거 벼랑에 밀린 '막달레나'들, 용산을 떠나보내다

재개발은 누군가에겐 환희가, 누군가에겐 절망이 된다. 그러나 그 둘에겐 공통의 기억이 남는다. 오랜 시간 살아온 공간에 얽힌 관계와 기억들이다. 누군가에게 재개발이 정든 집과 마을, 사람들과 헤어지는 '이별'이라면, 성매매 여성에게도 예외는 아니다. 그 기억이 때론 고통스럽고 끔찍했다고 해도, 번듯한 건물과 세련된 거리로 그 모든 기억이 치유되고 '재개발'될 순 없는 법이다.

ⓒ프레시안(최형락)

막달레나공동체를 통해 용산 성매매 여성들과 관계를 맺어온 홍근표 신부는 예수의 '빈 무덤' 이야기로 마지막 인사를 대신했다. 이날 강론은 '창녀'라고 멸시 당했던 마리아 막달레나가 예수의 빈 무덤을 가장 먼저 목격하고 부활을 확신하는 성서의 내용으로 진행됐다.

"용산이 재개발되면 이제 막달레나의 집은 빈 둥지로 남게 될 겁니다. 모두가 어딘가로 흩어지고, 또 다시 폭력과 외로움, 가난에 힘겨워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막달레나가 빈 무덤을 통해 예수님의 부활을 확인했듯이, 여러분도 빈 둥지를 떠나 새로운 곳에서 부활의 체험을 하길 바랍니다."

몇 번의 축복과 몇 번의 회상, 그리고 눈물로 미사는 마무리됐다. 그렇게 붉은 불빛을 밝힌 성매매 집결지 한가운데서 미사를 열던 40여 명의 '막달레나'들은, 2010년과 함께 용산에 얽힌 기억과도 이별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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