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날 오전 10시께 전농 등 농민단체 회원들 수백 명은 서울 중구 '훈련원공원'에 모여들었다. 한미 FTA 장례 상징의식에 참여하기 위해서였다. 농민단체뿐만 아니라 노동자와 학생 등도 수십 명 참여했다.
이날 행사에는 당초 2000여 명이 참가할 것으로 주최 측은 예상했지만 전날 서울시청 앞과 광화문 일대에서 저녁 늦은 시간까지 진행된 '한미 FTA 저지 국민총궐기 대회'의 여파로 인해 참가인원이 절반 넘게 줄어들었다.
장례행렬은 예정된 시간보다 1시간 남짓 지난 뒤에 '훈련원공원'을 출발했다. 장례행렬의 상징인 '상여'의 행사장 진입을 경찰이 차단했고, 이 때문에 행사 주최 측과 경찰 간에 지루한 실랑이가 벌어졌기 때문이다. 결국 주최 측은 "상여가 없어도 일단 거리로 나가자"고 결론을 내렸다.
'상여'없는 장례행렬은 20여 분 간 거리를 걷다가 을지로 지하상가 앞 사거리에 주저앉았다. 농민들은 "상여를 돌려주기 전까지는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겠다"고 말했다. 빗줄기는 더욱 굵어졌지만 장례행렬은 좀처럼 움직일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장례행렬이 길을 막자 주변 도로는 순식간에 '혼란'에 빠져들었다. 바쁜 길을 재촉하던 일부 시민들은 차에서 내려 농민들에게 항의했다. 농민들은 "우리도 이러고 싶어서 그런 것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교통경찰들은 '혼란'을 수습하느라 분주히 움직였다. 교통경찰의 호루라기 소리가 여기저기서 요란하게 울렸다.
전농의 전기환 사무총장은 "경찰들이 약속을 안 지켰다"고 분통을 터뜨렸다. 경찰이 노무현 대통령과 조지 부시 미국 대통령의 '영정'을 갖고 오지 않으면 장례행진은 보장해주겠다고 약속해놓고 지키지 않았다는 것이다. 아닌 게 아니라 장례행렬 속에 한미 양국 대통령의 영정은 보이지 않았다.
도로 연좌농성은 1시간 남짓 진행됐다. 밀린 차량의 행렬이 끝이 보이지 않자 경찰들은 다급해진 나머지 행사주최 측과 협상을 벌였다. 결국 경찰이 가져갔던 '상여'는 1시간 만에 돌아왔다. 장례행렬은 이동하기 시작했고, 막혔던 길은 다시 뚫렸다.
여성 농민들은 상복을 입고 있었다. 남성 농민들은 상여를 들었다. 곧 유장한 상여소리가 시작됐다. 맨 앞의 '선소리꾼'은 상여소리에 '한미 FTA에 반대한다'는 메시지를 담았다. 또 한미 FTA에 대한 농민들의 심정도 담았다. 상여는 비에 젖은 채로 천천히 나아갔다.
장례행렬의 종착지는 '한미 FTA 2차 협상'이 진행되고 있는 서울 신라호텔이었다. 느린 발걸음의 장례행렬은 1시간30분만에 신라호텔 인근의 동국대학교 캠퍼스 앞에 도달했다. 이미 신라호텔 주변은 경찰병력이 겹겹이 에워싼 상태였다. 장례행렬은 발걸음을 멈췄다.
오후 2시부터 정리집회가 시작됐다. 농민들은 "신라호텔까지는 가봐야 하는데…"라며 안타까워했다. 그러나 전날 열린 '한미 FTA 저지 국민총궐기' 때처럼 경찰의 방어선을 뚫기에는 이날 행사 참가자 수가 많지 않았다. 행사주최 측은 "이곳에서 마지막 결의를 모으자"며 농민들을 다독였다.
'한미 FTA 저지 범국민운동본부' 전북지역 대책위의 이강실 대표가 마이크를 잡았다. 이 대표는 "대미종속을 강화하고 농민들을 농토에서 내쫒는 한미 FTA 협상은 중단돼야 한다"며 "미국 시애틀에서 열리는 3차 협상 때는 보다 강한 시위를 만들어내자"고 호소했다.
농민들은 정리집회를 마치고 전통 장례절차에 따라 '상여'를 태웠다. 경찰이 순식간에 달려들어 소화기로 불을 껐다. 농민들은 거칠게 항의했지만 경찰로부터 '방패' 세례만 받고 물러났다. 농민 다수가 부상을 입었다. 전농의 문경식 의장도 경찰 방패에 맞아 피를 흘렸다.
농민들은 격분했지만 어찌 할 도리가 없었다. 여기저기서 경찰을 비난하는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하지만 맨손의 농민들은 경찰의 방패와 기세에 눌려 발걸음을 옮길 수밖에 없었다. 농민들의 탄식은 이어졌다. 오후 3시가 조금 못 된 시간에 농민들의 '한미 FTA 장례식'은 씁쓸하게 마무리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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