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교통상부를 출입하고 있는 한 기자는 최근 한 통의 이메일과 휴대폰 문자메시지를 받았다. 통상교섭본부가 언론사 기자들 중에서 '홍보전문가'를 뽑겠다는 내용이었다. 이 기자는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제2차 본협상을 코앞에 둔 상황에서 통상교섭본부의 의도가 뻔히 보인다는 생각에 헛웃음을 짓고는 이메일과 문자메시지를 지워버렸다.
통상교섭본부, 기자 수십 명에게 '홍보전문가' 모집공고 뿌려
한미 FTA 협상을 총괄하고 있는 통상교섭본부는 최근 한미 FTA를 취재하고 있거나 과거 통상교섭본부를 출입했던 기자 수십 명에게 일반계약직으로 4·5급 공무원에 준하는 대우를 받게 될 '홍보전문가' 한 명을 채용하겠다는 내용의 이메일과 휴대폰 문자메시지를 보냈다.
이 이메일에 따르면, 통상교섭본부가 원하는 '홍보전문가'는 방송사, 일간신문사 등 언론사에서 7년 이상 일한 경력이 있는 기자 또는 기자 출신이다. 관련 분야의 학위를 갖고 있다면 취재기자 경력 기간이 다소 짧아도 지원자격을 주겠다는 내용도 들어 있다.
채용된 기자 출신 '홍보전문가'에게는 최소 2년 동안 고용을 보장하고 실적이 좋을 경우에는 5년 한도로 재계약이 가능하다고 통상교섭본부는 설명하고 있다. 홍보전문가로 채용된 사람은 통상과 관련된 각종 사안에 관한 홍보자료를 만들거나 기자를 상대하는 일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번 채용과 관련해 실무를 담당하고 있는 통상교섭본부의 한 관계자는 기자 출신 홍보전문가를 뽑는 이유에 대해 "기자 생활을 해본 사람은 기자들이 원하는 정보를 효율적으로 제공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는 또한 "기자 출신은 (기자 경력이 없는) 홍보담당관들이 생각하지 못하는 기자들의 요구사항을 쉽게 파악할 수 있고, 취재 지원도 보다 효율적으로 할 수 있을 것"이라고 기자 출신 홍보전문가의 장점을 설명했다.
그러나 현재까지 통상교섭본부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정작 '홍보전문가' 채용에 지원하는 기자는 거의 없는 것으로 알려졌다. 응시원서 접수 마감일이 오는 13일이기 때문에 통상교섭본부는 기자들의 무호응에 답답한 표정을 짓고 있다. 실제 통상교섭본부는 당초 응시원서 제출 마감일을 6월 말로 정했으나 이미 한 차례 연기했다.
통상교섭본부의 한 관계자는 "문의는 더러 있지만 지원서를 제출하는 경우는 별로 없다"며 "하지만 보통 막판에 지원서가 몰리는 경향을 고려하면 적지 않은 응시원서가 접수될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기자들 "FTA 문제가 홍보로 해결되냐"
한편 기자 출신 '홍보전문가'를 채용하려는 통상교섭본부의 이번 계획에 고개를 갸웃거리는 기자들이 많다. 통상교섭본부의 채용계획 자체가 과연 제대로 된 발상법에서 비롯된 것인지 의문스럽다는 것이다.
한 방송사의 기자는 "채용공고 자체는 물론 채용방식도 매우 조잡해 신경을 쓰지도 않았다"면서 "정부가 한미 FTA 홍보에 열을 올리긴 올리는 모양"이라고 말했다. 그는 "오죽하면 답답하면 현직 기자들에게 홍보전문가 채용 공고를 이메일로 보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또 다른 언론사의 한 기자는 "정부정책을 홍보하는 입장에서는 비판과 견제를 사명으로 하는 기자들의 생리를 알고 싶어 하는 것이 당연하고, 기자들을 활용하려 하는 것도 이해는 된다"고 전제한 뒤 "그러나 정부의 정책홍보가 지닌 문제점이 드러나고 있는 데에다 한미 FTA가 실제로 추진되는 상황을 고려하면 문제가 '홍보'에 있는 것은 아닐 텐데 헛다리 짚는 것 같아 안타깝다"고 말했다.
언론노조 "궁지에 몰린 정부의 초조함 드러낸 것"
언론단체에서는 이번 통상교섭본부의 기자 출신 홍보전문가 채용계획에 대해 보다 심각한 우려를 표명하고 있다. 언론노조의 신학림 위원장은 이번 사건을 일단 "정부의 초조함의 발로"라고 풀이했다.
신 위원장은 "MBC PD수첩 등 일부 언론의 보도로 한미 FTA의 본질이 드러나면서 반(反) 한미 FTA 정서가 확산되자 초조함을 느낀 정부가 '악수'를 두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며 "여론의 대세를 인식하고 이제라도 한미 FTA 추진을 전면 재고해야지 홍보 수준에서 문제를 때우고 넘어가려 해서는 안 될 것"이라고 밝혔다.
<코리아타임스> 기자 출신이기도 한 신 위원장은 후배 기자들에게도 "한미 FTA는 국민 전체에 재앙을 불러올 것이 분명하다"며 "노무현 대통령과 통상교섭본부 관계자뿐만 아니라 한미 FTA를 제대로 보도하지 않는 기자들도 역사의 준엄한 심판을 받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통상교섭본부 출범 이래 처음으로 실시한다는 기자 출신 홍보전문가 채용계획은 이런저런 구설수에 오르내리고 있다.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