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진 줄 알았던 '블랙리스트'가 노동현장에 또다시 등장했다.
50여 일간 노사갈등을 겪고 있는 한 택시업체의 대표가 파업에 참여한 노조원의 명단을 작성해 인근 택시업체들에 이들이 취업하지 못하도록 영향력을 행사한 사실이 드러나 파문이 일고 있다.
이같은 '블랙리스트'는 지난 1970~80년대에 노조를 탄압하는 주요 수단으로 사용자들이 활용했으나 1987년 노동자 대투쟁 이후 노동운동의 성장과 절차적 민주화의 진행으로 오늘날에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인식돼 왔다.
민주택시연맹과 민주노총은 27일 경기도 양주시에 소재한 택시회사 (주)양주상운이 대표이사 명의로 작성한 4장의 문건을 입수했다며 공개했다. 한 장의 공문과, 직원 이름과 전화번호 등이 적혀 있는 세 장의 붙임문서로 구성된 이 문건의 수신처는 지역내 22곳 택시업체로 명시돼 있다. 이 문건은 지난 19일 발송됐다.
이 문건의 첫 장에는 문서작성 경위가 비교적 자세히 적혀 있다. 문건은 "파업이 장기화되면서 일부 노조원들이 생계유지를 위해 의정부, 동두천 지역 택시업체에 취업하는 사례가 발생되고 있다"며 "각 업체에서는 운전기사 채용 시 양주상운 파업 참가자 명단을 참고하고 신분을 정확히 파악해 인사관리에 만전을 다하라"고 밝혔다.
문건은 또한 "만일 파업 참가자가 취업의뢰 시에는 양주상운이나 택시사업조합에 즉시 통보해주길 바란다"고 밝히고 있다. 이 문건과 함께 공개된 '붙임문서' 세 장에는 99명의 직원 이름과 주민등록번호, 집주소, 개인 휴대전화 번호가 '파업 참가자 명단'이란 제목 아래 나열돼 있다.
이 문건을 공개한 민주택시연맹과 민주노총은 △파업 참가자들이 다른 택시업체에 취업하는 것을 막기 위해 명단이 작성됐고 △문건이 다른 업체들에 전달됐다는 점에서 과거 1970~80년대에 노동현장에 횡행하던 '블랙리스트'와 별반 다르지 않다는 판단하고 있다.
민주노총의 조준호 위원장은 "최고급 승용차에 최고급 대리석이 깔려 있는 사무실에 앉아 택시노동자들의 최소한의 생활유지를 보장해달라는 요구도 묵살하고 이제는 블랙리스트까지 돌리는 작태를 보여주고 있다"며 이 문건을 노조 파괴용 '블랙리스트'로 못 박았다.
한편 민주택시연맹은 지난 21일 서울지방노동청 의정부지청에 '블랙리스트' 건 등을 포함해 (주)양주상운의 노동관계법 위반 여부를 가리기 위한 근로감독 진정서를 제출했다. 이에 의정부지청은 진정과 관련해 (주)양주상운의 법위반 행위에 대한 조사를 진행 중이다.
현행 근로기준법 제39조는 "누구든지 노동자의 취업을 방해할 목적으로 비밀기호 또는 명부를 작성·사용하거나 통신을 해서는 안 된다"고 돼 있어 '블랙리스트 작성' 등을 포함해 사측의 고의적인 취업방해 활동을 금지하고 있다.
그러나 (주)양주상운 측은 이에 대해 '노조의 확대해석'에 불과하다고 일축하고 있다.
이 회사의 한 관계자는 <프레시안>과의 통화에서 "회사에 사직서를 내고 다른 업체에 취직하는 행위라면 우리 회사에서 제지할 이유가 없다"고 전제한 뒤 "파업참가자 명단을 작성한 것은 장기파업 사태를 원만하게 풀기 위한 노력이었지 '노조탄압'을 위한 것은 결코 아니었다"고 주장했다.
한편 노동계에서는 이번 '블랙리스트' 사건에 상징적 의미가 크다고 보고 잔뜩 긴장하고 있다. 특히 최근 들어 노사갈등 현장에서 빈번하게 목격되는 용역경비들의 폭력행위에서 알 수 있듯이 사용자들의 노무관리 행태가 더욱 전근대적인 방식으로 전환하고 있다는 판단 때문이다.
민주노총의 이수봉 대변인은 "블랙리스트는 1970~80년대에나 볼 수 있었던 것"이라며 "이번 (주)양주상운 건은 노동 현장의 시계가 뒷걸음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상징적 사례"라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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