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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방송은 계속되어야 하는가?

[모 피디의 그게 모!] 선배에게 보내는 편지 1. 초심

Queen이 부릅니다, 'The Show Must Go On'

"Does anybody know what we are living for."
우리가 무엇을 위해 사는지 누가 알까요.


형, 우리가 같이 연극 무대를 세우던 날이 떠오릅니다. 서툰 망치질로 목재를 이어 붙여 배경 막을 만들어 세워 놓으니 그럭저럭 무대 같아 보였지요. 아무 것도 아니었던 텅 빈 단상이 무언가 이야기를 품을 만한 배경으로 탈바꿈해간다는 것이 퍽 감동적이었습니다. 또 그걸 허랑방탕한 백수 같은 우리의 손으로 만들었다는 자부심. 거 참 뿌듯합디다.

공연 시간이 다가옵니다. 우리가 세워 놓은 배경 막 뒤에서 관객이 입장하는 소리를 듣고 있자니 그야말로 심장이 배 밖으로 튀어 나올 것만 같았지요. 가슴을 퍽퍽 쳐서 심장을 단속합니다. 내가 해야 할 연기와 대사를 되새깁니다. 차례가 왔습니다. 늦지도 빠르지도 않게, 드디어 조명 아래로 뛰쳐나갔을 때 훅 하고 온 몸을 덮쳐 오던 관객들의 첫 호흡이 아직도 잊혀 지지 않습니다.

3일 후, 우리는 3일 전에 그렇게 뿌듯해 했던 무대를 부수었습니다. 무대 의상을 대충 벗어던진 채로 장도리로 못을 뽑아내면서 와그작 와그작 모든 것을 납작하게 만들어서 밖에다 쌓았습니다. 우리가 두 달에 걸쳐 쌓았던 세계는 3일간 꽃 피운 후 다시 사라졌습니다. 그날 밤 밤새 술잔을 기울이며 우리는 지독한 허무에 시달렸습니다. 형, 이게 우리가 두 달 간 다른 모든 걸 포기할 만한 가치가 있었던 일이었을까요? 우리는 뭘 한 거죠?

내가 하고 있는 짓거리가 헛짓거리라는 자조가 들어 괴로워할 때 형은 말하곤 했습니다. The show must go on이라고. 공연은 계속되어야 한다! Queen의 노래 제목이기도 하지요. 꼭 Queen의 노래를 듣지 않더라도 그 문장은 묘한 힘을 불어넣어 주었습니다. 회의와 자조를 접고 현재의 작품에 충실하게 만드는 힘을요. 그래, 가보는 거야. 계속 가다 보면 무대에 선 날 알게 되겠지. 인생의 의미를 미리 알 수는 없는 거잖아. 하긴, 노래 가사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무엇을 위해 사는지 누가 알겠습니까. 그저 무엇인가를 간절하게 추구하고 있는 과정에 있다는 것만큼 사람에게 생명력을 불어넣는 일은 없을 테니까요.

다 같이 만드는 무대라는 게 그렇더군요. 우리가 왜 이 짓거리를 하는지 명확하게 알고 하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런데 하고 나니 왜 그렇게 고민하며 괴로워했는지 조금은 알 것 같은 느낌이 들데요. 그래서 Show는 계속되어야 하는 것인가 보다, 하고 생각했지요. Show를 계속 같이 만들어가고 있는 한 우리는 늘 대화를 했으니까요. 그게 서로가 좋아서이건 미워서이건, 삐쳐서이건 질투해서건 말입니다. 우리가 왜 이걸 하고 있는지 계속 서로에게 묻는 일. 서로를 믿고 질문을 던지는 것을 포기하지 않으면서 자기완성을 향해 가는 일. 그런 게 삶에 대한 태도와도 연관되나 보다 하고 거창하게 생각했더랬습니다. 거창한 이야기 참 많이 했지요. 삶이니 사랑이니 사람이니 예술이니 정치니 역사니 아이고 민망합니다.

시간이 흘러 어른 구실을 해야 했을 때, 다들 뿔뿔이 흩어진 가운데 우리는 운 좋게도 제도권 안으로 들어왔지요. 드라마PD. 연출하면서 먹고 살 수 있다는 거, 참 행복한 일이지요. 솔직히 드라마PD라는 인간들은 연출을 꿈꾸는 사람들 중에서는 소위 '꽃보직' 아니오. 이를테면 1920-30년대 헐리우드 시스템을 한국에서 재현하고 있는 거지요. 꿈의 공장. 스튜디오 시스템에서의 고용 감독들. 일정하게 정해져 있는 생산 물량(드라마 편수)에 맞추어 컨베이어 벨트 돌아가듯 정해진 예산 안에서 뚝딱뚝딱 영상물을 생산해 내는 제작자들. 일상적 노동으로서의 연출. 좋잖아요. 그럼 우린 사실 행복한 줄 알아야 하는 사람들이지요. 그야말로, 삶이 계속되듯 연출 행위도 계속할 수 있게 만들어주는 곳이니까요.

그런데 형은 지금 행복합니까? 대답하기 어렵나요? 다시 물을게요. 우리는 왜 이 짓거리를 하는 겁니까? 아, 돈을 주기 때문이라고요? 그렇죠. 방송사로부터 돈을 받으니까 만드는 거고, 방송사에 돈을 벌어줘야 하니까 만드는 거지요. 그래서 우리는 더 이상 허무에 대해 토로하지도, 이유에 대해 치열하게 질문하지도 않아요. 우리의 목표는 확실합니다. 시청률과 광고. 최대한 높은 시청률과 많은 광고를 보장하는 내용을 만드려면 성공 사례들을 누덕누덕 잘 기워서 모양새 좋은 이야기를 뚝딱뚝딱 뽑아내야지요. 주제든 소재든 스토리텔링이든 너무 구체적으로 묻지 맙시다. 피차 민망하잖아요. 한국에서 시청률 잘 나오는 이야기란 뻔하다면서요. 일인데, 그냥 열심히 하는 거죠. 그래서 우린 기술적인 완성도와 세련미에 대해서는 열을 올리면서도 정작 서로에게 왜 이 짓거리를 하는지 묻지 않고 삽니다. 처음엔 잊은 척 하다가, 나중엔 진짜 잊어버립니다. 그냥, 방송은 계속 되어야 하니까, The Show Must Go On이니까.
▲ 찰리 채플린의 <모던타임즈>.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든 드라마는 방송이 된다는 사실에. 우리가 하는 일이 치열한 질문도 없이 정해진 상품을 위한 공정을 돌리는데 그친다면, 우리의 의미란 건 결국은 방송사가 돌아갈 수 있도록 돈을 벌어주는 것뿐입니다.

그래서 오히려 화가 났어요.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든 드라마는 방송이 된다는 사실에. 우리가 하는 일이 치열한 질문도 없이 정해진 상품을 위한 공정을 돌리는데 그친다면, 우리의 의미란 건 결국은 방송사가 돌아갈 수 있도록 돈을 벌어주는 것뿐입니다. 그런데 그 돈으로 돌아가는 방송사가 그나마 제 역할마저 제대로 못한다면 우리는 도대체 얼마나 허무한 존재일까요. 형은 오늘도 열심히 촬영에 대본 회의에 노동을 합니다. 제가 형의 말을 따랐던 건, The Show Must Go On이라고 믿었던 것은 그것이야 말로 우리 삶의 의미에 대해 끊임없이 질문을 하는 행위였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노동이 그 모든 질문을 멈추는 데 쓰인다면 우리가 계속해야 할 것은 과연 무엇입니까. 멈추지 말아야 할 것은 방송입니까 방송의 의미입니까.

요새 게이트 키핑이 유행입니다. 드라마도 예외는 아니어서 기획이 꽂혀 내려오고, 힘겹게 쓴 대본과 찍어온 그림은 난도질당하기 일쑤입니다. 상명하복과 불합리가 횡행하는 가운데, 언론사로서도 제작사로서도 방송국은 요즘 낙제점입니다. 그 놈의 게이트 키핑은 이제 상명하복과 불합리를 포장하는 단어가 되어버렸어요.

사실 게이트 키핑을 해야 하는 것은 우리에요, 형. 자본으로부터, 권력으로부터의 음험한 욕망이 시청자에게 여과 없이 나가는 것을 필사적으로 막아야 합니다. 우리가 헌신해야 하는 패트론(patron, 후원자)은 권력도, 사주도, 광고주도 아닌 시청자이지요. 저는 과거, 형에게 연출가로서의 책임감을 배웠습니다. 어떤 일이 있어도 공연을, 질문을 멈추지 말 것. 그 태도야 말로 가장 소중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요즘 저는 그 다음 단계를 봅니다. 어떤 일이 있어도 방송의 의미를 포기하지 않을 것. 시청자를 향하는 부조리한 욕망을 막아내는 최후 단위의 사람으로서의 책임감을 놓지 않을 것.

요즘 여기저기서 방송 공장들이 종종 멈춥디다. 다들 못 견디겠는 거지요. 부끄럽거든요. 우리가 똑 같은 걸 만들더라도, 어느 순간 그 감동과 재미가 결국엔 희롱과 위선으로 밖에 느껴지지 않는 상황들이요. 드라마쟁이들은 드라마쟁이들일 뿐이라고, 애써 외면하며 그저 늘 하던 대로 뚝딱 뚝딱 한 편씩 만들어내는 형을 보며 저는 다시 묻습니다. 우리가 같이 외쳤던, 형이 제게 가르쳤던 그 모토를 진정 실현하기 위한 행동은 무엇일까요.

정치의 계절입니다. 너무 자주 분노의 감정을 접하고, 너무 자주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되네요. 좋은 시절은 아니지만 이럴 때일수록 선명하게 두 눈 부릅뜨고 똑똑히 보고 있으라고 우리 같은 사람들이 밥 벌어 먹고 사는 것 아닐까요. 우리의 꿈이 있지 않았습니까. 처음 이 짓거리에 발을 들여놓을 때 품은 초심이요.

공론의 장이 끊임없이 형성이 되고
창의성과 예술성이 넘치면서
한 시대의 문화적 보편에서 전위까지를 담당하는 매체를 만들어 가는 것.

형, 우리 진정으로 멈추지 말아야 할 것을 멈추지 맙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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