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이처럼 짧은 시간 동안에도 전자음악은 록, 소울, 댄스, 재즈 등 다양한 장르와의 화학작용을 통해 최근 대중음악계를 지배하는 장르로 성장했다. 장르라기보단 스타일이라고 말하는 게 더 어울리겠지만, 전자음악 내부에서도 다양한 하위 장르가 생성됐다. 테크노, 빅 비트, 드럼 앤 베이스(정글), 라운지, 트립합, 하우스 등이 그것이다.
이제 페스티벌에서 전자음악은 빠져서는 안 되는 장르로 자리잡았다. 1990년대 기타팝이 남긴 여파가 아직 세계음악신을 주무르던 당시 푸 파이터스(Foo Fighters)의 데이브 그롤이 수준 이하의 기타팝이 득세하는 미국 음악신을 두고 "어서 빨리 프로디지(Prodigy)가 미국에 상륙해 이 빌어먹을 판을 다 정리해버렸으면 좋겠다"라고 말한 건 주류권력의 변화를 상징했다.
90년대부터 세계 음악계를 주름잡아온 전자음악계의 최고 스타들이 나란히 새 앨범을 발표했다. 신인들의 주목할 만한 데뷔앨범도 최근 들어 쏟아져 나오고 있다. 전자음악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조망할 앨범들을 소개한다.
▲케미컬 브라더스 [Further]. ⓒ워너뮤직코리아 제공 |
이 장르의 최고 스타라면 누가 뭐라해도 케미컬 브라더스(Chemical Brothers)다. 이들은 비슷한 시기에 등장한 프로디지와 마찬가지로 전자음악에 록의 질감을 섞어 1990년대 말, 이미 사형선고를 받은 얼터너티브 열풍을 잠재워버렸다.
프로디지가 록의 날카로움을 테크노와 결합해 '하드코어 테크노 밴드'라는 소리까지 들었다면, 케미컬 브라더스는 록의 풍성한 질감과 그루브감을 도입해 '빅 비트(Big Beat)' 사운드를 세계적으로 퍼뜨렸다. 이들의 두 번째 앨범이자 이 장르 최고의 명반으로 꼽히는 [Dig Your Own Hole]은 주류음악의 주인공이 바뀌는 시기를 가장 명확히 포착한 앨범이다.
신보 [Further]는 지난 2007년 발매한 범작 [We Are The Night] 이후 3년 만에 내놓은 이들의 일곱 번째 스튜디오 앨범이다. 옛 앨범만 들은 이들이라면 생소함을 느낄 것이다. 로킹(Rocking)했던 과거의 느낌은 희미해졌다. 대신 이들은 전자음악 본연의 세계로 돌아갔다. 몽환적인 음들이 사운드가 재조해낸 공간 안을 끊임없이 부유한다. 반복적인 리듬으로 청자를 환각 상태로 몰아간다. 속도감은 오를 듯 말 듯 하다 갑자기 빨라지고, 변화를 감지하기 이전에 돌연 최고조로 달려간다. 록적인 비트가 줄어든 자리를 힙합, 테크노 등이 메웠다. <Escape Vellocity>, <Swoon>, <Wonders of the Deep> 등은 변화를 상징하는 수작들이다.
▲케미컬 브라더스. ⓒ워너뮤직코리아 제공 |
<피치포크>는 "앨범 전체가 [Dig Your Own Hole]의 몽환적이었던 마지막 세 트랙의 확장판처럼 작용한다"며 "케미컬 브라더스는 더 이상 [Dig Your Own Hole]을 만들 때처럼 실패를 모르던(do-no-wrong zone) 시기에 머무르진 못한다. 그러나 [Further]는 예상을 완전히 뒤엎고 케미컬 브라더스를 (대중에) 친숙한 존재로 만들었다. 최근 그들이 슬럼프에 빠져 있었다고? 이제 끝났다"라고 호평했다. 재킷 디자인이 정말 잘 어울리는 앨범이다.
▲엘시디 사운드시스템 [This Is Happening]. ⓒ워너뮤직코리아 제공 |
엘시디 사운드시스템 [This Is Happening]
요즘 가장 잘 나가는 전자음악 밴드 엘시디 사운드시스템(LCD Soundsystem)이 세 번째 음반 [This Is Happening]을 발매했다. 사십줄에 접어든 제임스 머피가 이끄는 원맨 밴드 엘시디 사운드시스템은 전자음악을 추구하면서도 그루브감 대신 보다 직선적인 로큰롤 사운드를 형상화했다. 여기에 다양한 장르적 요소를 곡 곳곳에 빌려와 귀를 끊임없이 자극하는 재기발랄한 음악을 만들었다.
<롤링 스톤>이 2000년대 최고의 100대 앨범 중 12위로 이들의 두 번째 앨범 [Sound Of Silver]를 올려놓으며 "엘시디 사운드시스템의 극성 팬들도 그가 이 앨범과 같은 명반을 만드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을 것이다. 모든 곡들이 이전과 다른 밴드에서 만든 하나의 히트곡 모음집처럼 들린다"고 극찬한 건 입에 발린 소리가 아니다.
[This Is Happening]은 펑키함이 단연 돋보이는 산뜻한 앨범이다. 곡들은 전작과 변함없이 9곡만을 수록했음에도 앨범 플레이 타임은 한 시간을 가볍게 뛰어넘는다. 그럼에도 대중적인 노선을 포기하지 않았다. 오히려 전작보다 더욱 강화한 느낌이다. 디페시 모드(Depeche Mode)의 밝은 버전인 듯한 <I Can Change>는 신스팝의 유산을 한껏 빨아들였고 <All I Want>는 팝적인 로큰롤과 같다. 앨범에서 가장 짧은 트랙인 타이틀곡 <Drunk Girls>에서는 블러(Blur)가 가장 활기찼을 때의 기운마저 묻어난다.
해외 팝음악을 좋아하는 이라면 누구나 부담 없이 즐길 수 있는 앨범이다. <피치포크>는 10점 만점에 9.2점을 부여하며 "첫 앨범에서 제임스 머피는 냉정을 유지하면서도 자유로워질 수 있는 법을 보여줬다. 이제 그는 완전히 무너지지 않으면서도 무너지는 법을 깨달았다"고 극찬했다.
제임스 머피가 올해 초 <뉴 뮤지컬 익스프레스>와 인터뷰에서 이 앨범을 두고 "마지막 앨범이 될 것"이라고 했는데, 그런 일은 제발 일어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아, 엘시디 사운드시스템은 오는 7월 말 열릴 펜타포트 록 페스티벌에 참석한다.
▲슬레이 벨스 [Treats]. ⓒ소니뮤직코리아 제공 |
슬레이 벨스 [Treats]
앨범을 재생하자마자 강력한 드럼머신의 킥과 귀를 찢을 듯한 기타음이 폭발한다. 곧바로 청자를 무너뜨리는 사운드를 타고 가녀린 여성의 목소리가 속삭이듯 스며든다. 날카로움과 선연함의 간극이 넓다.
온 신경을 곤두서게 만드는 노이즈와 달콤한 팝. 데뷔앨범 [Treats]에서 단 수 초 만에 청자를 무력하게 만들어버리는 솜씨를 보여준 슬레이 벨스(Sleigh Bells)는 브루클린 출신의 듀오다. 아마존닷컴은 이들을 두고 '미래의 로큰롤 혹은 로큰롤의 종말'이라고 평가했다. 해외 다수의 음악매체는 '신스 펑크'라고 묘사한다. 펑크의 공격성과 전자음악의 사이키델리아를 모두 갖춘 밴드라는 의미다.
순수한 치어리더들의 얼굴을 의도적으로 훼손한 앨범 재킷은 이들이 추구하는 음악의 성격을 훌륭하게 상징한다. 노이즈는 찌그러지고 뭉개진 채로 뿜어져 나오고, 매우 폭력적이다. 그런데도 보컬 알렉시스 클라우스의 목소리는 콕토 트윈스(Cocteau Twins)의 보컬 엘리자베스 프레이저처럼 듣는 이를 꿈속에서 헤매는 기분으로 만든다.
이쪽 계열에 관심이 있는 이라면 첫 곡을 듣는 순간 바로 스리랑카 출신의 엠아이에이(M.I.A.)를 떠올리게 될 것이다. 실제 이들은 엠아이에이가 만든 레이블 N.E.E.T. 소속이다. 엠아이에이의 신보 [Maya]에도 참여했다. 이 앨범의 유일한 단점이기도 하다. 엠아이에이의 음악을 좋아하는 이라면 이 앨범이 매우 좋게 들릴 테지만, 한편으로는 그녀의 이미지가 너무 강하게 겹친다.
<뉴 뮤지컬 익스프레스>는 이들의 첫 싱글 <Tell 'Em>을 '금주의 필청 트랙 10선'에 꼽으며 "슬레이 벨스는 불쾌함을 완화시키기 충분한 멜로디를 추가한 불협화음으로 귀를 확 잡아당긴다"며 "스피커가 녹아버리지는 않았는지 확인하고 싶어질 것"이라고 평가했다.
달콤한 팝을 선호하는 국내 음악팬들은 거부감을 느낄 수도 있겠으나, 이들의 데뷔앨범은 발매되자마자 빌보트200 앨범차트 39위까지 올랐다. 상당수 언론의 호평이 이어지는 것은 분명 주목할 만하다.
▲펫 숍 보이스 [Pendemonium]. ⓒ워너뮤직코리아 제공 |
80년대 신스팝 폭발을 이끌었던 펫 숍 보이스의 두 번째 라이브앨범 [Pandemonium]이 국내에 지각 라이센스됐다. 이 앨범은 작년 12월 21일 런던 O2 아레나에서 열린 공연 실황을 담았으며 시디와 디비디가 한 묶음으로 들어 있다.
펫 숍 보이스는 국내에서 저평가된 대표적인 거물급 뮤지션의 하나다. 메탈리카가 헤비메틀에 두뇌를 달았듯, 이들은 댄스음악에 철학을 녹여 넣었다. 팝의 자존감을 한껏 끌어올린 '춤추며 고뇌하는' 음악을 이들은 25년 내내 만들어 왔다.
이들이 데뷔 앨범 [Please]를 내기 전만 해도 디스코(유로디스코)는 육체의 쾌락만을 극단적으로 좇는 음악으로 취급받았다. 그러나 이들은 신시사이저와 샘플링을 강조한 음에 따뜻한 기운을 가진 닐 테넌트의 보컬, 그리고 게이 공동체에 대한 자긍심과 사회주의 혁명의 희망을 놓지 않은 가사(닐 테넌트는 저널리스트 출신이다)로 성찰하는 팝 음악의 위상을 대내외에 과시했다.
특히 이들은 동성애 문화를 혐오하는 영국 주류 사회를 서정적이고 밝은(국내에도 유명한 <Go West>도 게이 문화에 대한 애수의 심정을 담은 것으로 해석된다) 멜로디의 팝음악으로 헤쳐 나가 오늘까지 살아남았다. 듣는 이를 불편하게 만들 수 있는 메시지를 담았음에도 사운드는 철저하게 디스코가 추구했던 소비(대중)지향성을 따랐기 때문이다. 닐 테넌트는 항상 자신이 팝음악을 하는 뮤지션임을 자랑스러워했으며, 마초적인 록 커뮤니티에 소속되지 않았음을 떳떳이 말하곤 했다.
이 라이브 앨범은 이 거장의 역사를 제대로 돌이켜 볼 수 있게 만들어준다. 듀오는 갖가지 기상천외한 장치로 무대를 꾸미고, 공들인 무대 위에서 심드렁한 모습으로 히트곡들을 연주한다. 그들의 라이브 무대를 쉽게 접하기 힘들었던 국내 팬에게는 페스티벌을 앞두고 맞은 소중한 예습 자료다. 이들은 올해 지산밸리 록 페스티벌에 참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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