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여옥 의원의 해석이 타당한지 따져보기 전에 한 가지 짚어볼 사실이 있다. 이번 일과 같은 아동 성폭행은 과연 예전에도 공분의 대상이었을까? 피해자의 고통이야 옛날이나 지금이나 별 차이가 없었을 것이다. 아니, 옛날이 훨씬 더 컸을 것 같다. 옛날에는 피해자의 고통에 공감하려는 모습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프랑스의 역사학자 조르쥬 비가렐로의 <강간의 역사>(이상해 옮김, 당대 펴냄)의 몇 대목을 같이 읽어 보자. 옛날이라고 (남녀를 불문하고) 어린아이를 성폭행하는 일이 없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프랑스만 놓고 보면, 18세기 후반에 들어서야 아이를 성폭행한 범죄 기록이 눈에 띈다. 6세, 9세의 여자아이를 성폭행한 베뒤도 그 중 하나다(1784년).
두 아이를 수차례에 걸쳐서 강간한 베뒤는 공분을 사서 '거세'를 당하거나, 목숨을 잃었을까? 아니다. 그는 아이의 부모에게 금화 몇 푼을 쥐어주기로 약속했다가, 그나마 그 약속도 지키지 않았다. 물론 법의 심판도 피했다. 오랜 소송 끝에 무죄로 석방된 베뒤는 말 그대로 '잘 먹고 잘 살다' 세상을 떴다.
프랑스대혁명이 일어난 후에는 좀 달라졌을까? 기록만 놓고 보면 그렇지 않다. 1799년, 11세 소녀에게 "음부와 항문을 구별할 수 없을 정도로" 폭행을 한 도를로 역시 가족에게 보상하는 것으로 죄를 씻었다. 50명가량의 이웃은 법원에 탄원도 했다. 그를 영구 격리해 달라고? 정반대다. "나무랄 데 없는 집안의 자식으로 어쩌다 실수를" 한 그를 용서하자는 것.
그나마 베뒤, 도를로와 같은 이들에게 죄에 상응하는 처벌이 시작된 것은 100년 전쯤인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부터였다. 그러나 정작 이 때도 처벌의 이유는 오늘날과 달랐다. 당시의 판사, 의사들이 성폭행을 단죄한 이유는 그것이 "처녀성의 상실", "도덕적 타락" 등을 "부추기기" 때문이었다. 당연히 피해를 당한 아이는 '더러운 존재'가 되었다.
성폭행을 피해자의 정체성에 균열을 가져오는, 한 사람의 인생에 어떤 상처보다도 큰 상흔을 남기는 이른바 '정신적 살해'로 보는 관점이 널리 받아들여진 것은 고작 20년 정도밖에 안 된다. 성폭행 피해자의 증언이 하나둘씩 세상에 선보이고, 여성운동이 오랫동안 여론을 환기하면서 피해자의 고통에 대한 사람들의 감수성을 일깨운 것이다.
▲ 전여옥 의원(한나라당). ⓒ뉴시스 |
한마디 더 하자. 아무리 가증스러운 범죄자, 설사 어린 여자아이를 강간한 이라도 인간이라는 사실 자체가 부정당해서는 안 된다. 물론, 이런 온정주의가 그런 악을 원천적으로 봉쇄하지는 못할 것이다. 그러나 이런 온정주의가 낳는 타인의 고통에 대한 감수성이야말로 그런 악이 설 자리를 좁히는 가장 효과적인 무기다.
당장 피해자의 고통에 뒤늦게라도 공감하지 않았다면, 우리 역시 옛사람들이 그랬듯이 김모 씨가 말한 인간의 탈을 쓴 "욕망의 괴물"로 살고 있을 테니까. "물리적 거세", "화학적 거세" 운운하는 몇몇 국회의원은 달랐을까? 글쎄, 평소 목소리 높여 지지하는 법안만 놓고 보면 그랬을 것 같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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