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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전(反戰)영화인가 전쟁 선동영화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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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전(反戰)영화인가 전쟁 선동영화인가

[뷰포인트] 전쟁의 비극 표현엔 역부족인 <포화 속으로> 리뷰

<포화 속으로>는 6.25 전쟁 당시 낙동강 사수를 위한 전략 요충지였던 포항에서 71명의 학도병들이 목숨을 걸고 포항을 지켜낸 실화를 소재로 한다. 말이 '학도병'이지, 이들은 고작 10대 중후반의 중, 고등학생 소년들이었다. 지금으로 치면 학교와 학원을 오가는 틈틈이 친구들과 컴퓨터 게임을 즐기고, 아침마다 거울 앞에서 머리를 스무 번도 더 빗으며 여드름에 짜증을 내고, 옆 반 여학생에게 짓궂은 장난을 치는 것으로 호감을 표현할 나이다. 그러나 당시의 아이들은 그렇지 못했다. 무려 "조국을 지켜야 하기에" 가족과 헤어져 제대로 쏠 줄도, 던질 줄도 모르는 총과 수류탄을 쥐어야 했다. 그리고 "사실상 포항에 버려진 채" 피비린내 나는 전투를 겪어야 했다.

<포화 속으로>가 노리는 비극도 여기에서 기인한다. 이제 막 세상에 눈을 뜨고, 자신의 정체성을 갖기 시작할 나이에 그들은 무려 전쟁을 겪고, 그 전쟁 속에서 심지어 군인 아닌 군인으로 전투를 하며 스러져간다. 전쟁 60주년을 기념하면서 이 사건을 소재로 영화로 만든 것은, 그렇게 스러져간 이들의 죽음을 기억하고 다시는 전쟁이라는 비극을 되풀이하지 말자는 교훈을 되새기자는 것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포화 속으로>가 이러한 비극을 소재로 할지언정, 그들의 죽음을 제대로 기리고 있는지, 나아가 60년 전 이 땅에 일어난 전쟁의 교훈을 제대로 전달하고 있는지는 의문이다.

▲ <포화 속으로>

사실 수많은 전쟁영화들이 참혹한 전투장면을 스펙터클로 소비하며 죄책감어린 쾌감을 느끼도록 설계하기 마련이다. 2차대전을 배경으로 한 수많은 전쟁영화들, 가까이는 스필버그 감독의 <라이언 일병 구하기>도 그랬고, 심지어 클린트 이스트우드 감독의 <아버지의 깃발>에 10분 남짓 나오는 전투씬도 그렇다. <포화 속으로>의 첫 시작을 장식하는 전투장면, 그리고 클래이맥스가 되는 전투장면도 이러한 시각적 쾌감 전달에 매우 공을 들인 흔적이 보인다. 그러나 그 뿐이다. 시종일관 스타일리시한 화면과 군복조차 최신 패션인 양 소화하는 배우들 사이에서, '머리에 뿔달린 도깨비'가 아닌 '엄마를 부르며 죽어가는' 같은 동족 간 전쟁, 더욱이 국군과 인민군 공히 어리디 어린 아이들을 총알받이로 내세웠던 전쟁에 대한 통찰력이나 성찰은 없다. 비극을 전달하기 위해 여러 설정들, 예컨대 '예쁜 간호병 누나'와의 에피소드나 '오마이'를 부르며 죽어가는 적에 대해 어머니에게 쓰는 편지, 군복에 총을 든 일곱 살 남짓한 어린 인민군의 에피소드 같은 것들이 이어지지만, 이러한 장면들은 그저 '나열'만 될 뿐 학도병들이 전쟁터에서 느꼈을 공포와 혼란을 제대로 전달해주는 장면으로 유기적으로 엮이지 못한다.

영화 속에서 국군을 표상하는 인물인 강석대 대위(김승우)는 71명의 학도병 아이들을 포항에 남겨두고 떠나면서 한 가지 질문을 남긴다. "학도병은 군인인가, 아닌가." 차마 학도병도 군인이니 희생하라고 강요하지 않는다는 면에서 양심적이라 해야 할까. 그렇지 않다. 인민군 부대장 박무랑(차승원)은 "학도병은 군인이 아니라 어린아이들일 뿐"이라 생각해 이들에게 전면적인 공격을 가하는 대신 시간을 주며 항복을 권한다. "그 아이들은 어린아이인 데다, '해방된 조국'의 미래를 이끌 재목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작 71명의 아이들은 "학도병도 군인"이라고 결론을 내리며 전투에 나선다. 어쩔 수 없이 전쟁터에 끌려오긴 했으나 스스로 군인이라 자각하며 전투를 택한 이들의 선택은 과연 윤리적이고 숭고하다 할 수는 있다. 그러나 과연 이 아이들을 이런 곳에 몰아넣은 어른들, 나아가 국가의 책임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그저 이들의 숭고한 죽음을 찬양하는 것만이 과연 국가와 후세의 역할일 뿐일까.

▲ <포화 속으로>

이 대목에서 2007년 <아버지의 깃발>을 내놓았던 클린트 이스트우드 감독이 던져준 교훈을 다시 상기해볼 필요가 있다. 이스트우드 감독은 <아버지의 깃발>에서 그 자신이 직접 출연한 캐릭터의 입을 빌어 "전쟁영웅, 특히나 소년영웅들을 신화화하며 전쟁을 부추키고 소비하는 행위"에 대한 위험성에 대해 경고한다. "그들은 결코 영웅이 아니었다"고 말하는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대사가 그들의 죽음이나 희생을 깎아내리는 말이 전혀 아님을 우리는 분명히 안다. 물론 <포화 속으로>의 이재한 감독에게 굳이 이스트우드 같은 명감독의 걸작이나 그만한 통찰력까지 바란 사람은 아무도 없었을 것이다. 이재한 감독 역시 그런 정도의 야심까지 갖고 있었던 것 같지는 않다. 그러나 전쟁 10주년도 아닌 60주년이라며 만들어진 전쟁영화가 그저 어린 학도병들의 전투를 소재로 한 스펙터클한 전투화면의 전쟁영화일 뿐이라면, 더욱이 2차 대전 직후부터 냉전 시기에 쏟아져나온 수많은 전쟁영화들에서 단지 스타일과 테크널러지만 화려해졌을 뿐이라면, 과연 우리가 전쟁영화를 만들고 봐야 하는 윤리적 정당성은 어디에서 찾아야 하는가. 헐리웃에서 만드는 전쟁'액션' 블록버스터들조차 전쟁에 대한 복잡다양한 성찰과 의미들을 형식적 차원이라도 드러내기 시작한 지 벌써 수 년인데, <포화 속으로>는 지나치게 퇴행적이지 않은가.

공교롭게도 천안함 사태를 두고 또 다시 전쟁의 기운이 고조되고 있는(정확히 말하자면 일각에서 부추켜지고 있는) 지금, 이 영화는 "다시는 이런 비극이 일어나지 말아야 한다"는 다짐보다는 오히려 <아버지의 깃발>이 소재로 삼았던, 전쟁을 선동하는 데 이용된 로젠탈의 사진처럼 보인다. <포화 속으로>가 가진 가장 나쁜 단점도 바로 이것이다. 충분히 흥미로웠던 캐릭터와 플롯 및 구도의 설정들이 입체적으로 발전되지 못한 채 평면적으로 고정돼 버린다거나, 마치 뮤직비디오들을 이어붙인 듯 시퀀스들이 유기적으로 연결되지 못한다는 것 따위가 아니라, 전쟁이 일어난지 60년이나 지났는데도 아무런 교훈도, 성찰도 얻지 못했음을 초라하게 드러내 버린다는 점 말이다. 그저 남는 것이라면, 최승현 혹은 탑이 누군지 몰랐을 사람조차 "괜찮은 젊은 신인배우 하나 나왔다"고 느끼게 만드는 발견 정도일까.

"모든 전쟁영화는 반전(反戰)영화다"라는 말이 있다. 딱히 반전을 주제로 내세우지 않았더라도, 전쟁의 끔찍함과 참혹함이 생생히 묘사되다 보니 역설적으로 평화의 가치가 자연스럽게 강조되기 때문이다. 그것이 직접적인 전투장면의 묘사이든, 전쟁이 쓸고 지나간 뒤의 참혹한 풍경과 인간의 모습이든. 그러나 <포화 속으로>를 보노라면 이 말이 언제나 참인 것은 아닌 것 같다. 오히려 "반전을 지향하고 원하는 관객"이 전제될 때에라야, "모든 전쟁영화는 반전영화"가 된다고 하는 것이 더 정확해 보인다. 그러나 해석의 책임을 온전히 관객들에게만 지우는 영화란 또 얼마나 무책임한가. 이 영화 속 강대위와 국군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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