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지역과 세대가 한국 정치를 이해하는 핵심이지만 지역의 영향이 상당히 약화되고 세대의 차이가 강화된 원인으로 정책의 문제에 주목할 것을 강조했다. 이번의 지방선거는 이명박 정부와 한나라당이 잘못된 정책을 잘못된 방식으로 강행하고 있는 것에 대한 준엄한 심판이었다.
내 말을 잘못 인용한 기사의 제목은 "이념 성향 다른 중앙·지방정부 '불편한 동거', 보수-진보 마찰 필연적…창조적 협력 절실"이다. 그런데 내 관점에서 보자면, 이 제목은 큰 문제를 안고 있다. 문제의 핵심은 '이념 성향'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번의 선거에서 '보수' 쪽의 전술로 가장 두드러졌던 것은 '천안함 침몰'을 활용한 것이었다.
사실 전통적으로 한국의 '보수'는 이념 전술을 전가의 보도처럼 휘두르는 세력이다. 그 핵심은 반대 세력에게 '좌파'라는 이념 공격을 퍼붓는 것이다. 불행한 현대사로 말미암아 한국에서 '좌파'라는 용어는 극히 심각한 의미를 지니게 되었다. 나는 그것을 '처벌적 용어'로 설명한다.
'좌파'는 '국가의 적' 또는 '체제의 적'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어서, 사실 여부와 상관없이 '좌파'로 규정되면 커다란 타격을 입을 수 있다. 이 때문에 '보수'는 정책에 대한 토론을 회피하고 이념 전술을 강력히 전개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번의 지방선거에서는 이 전통을 자랑하는 이념 전술이 별 효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이념을 중심으로 사회와 사람을 평가하는 것은 비현실성의 문제에 빠지기 십상이다. 한국처럼 불행한 현대사로 말미암아 우파와 좌파, 보수와 진보라는 대표적인 이념 용어가 크게 왜곡되어 있는 상황에서는 더욱 더 그렇다. 이런 상황을 올바로 헤쳐가려면 추구하는 정책의 실제 내용에 주목해야 한다.
사실 이것은 이미 2500년 전에 공자가 제시한 평가의 방법이기도 하다. 공자는 어떤 사람을 올바로 평가하기 위해서는 그 사람의 말이 아니라 행동을 보라고 가르쳤다. 이념은 정책에 대한 평가의 결과로 제시되어야 한다. 오늘날처럼 급변하는 시대에서는 더욱 더 그렇다. 200년 전 또는 100년 전에 성립된 교의로 현실을 설명하고 개혁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교의는 현실에 의해 부단히 폐기되거나 갱신되어야 하며, 이렇게 해야 우리는 이념이 안고 있는 비현실성의 문제에 걸리지 않을 수 있다. 이런 점에서 앞의 제목은 "정책 방향 다른 중앙·지방정부 '불편한 동거', 보수-진보 마찰 필연적…창조적 협력 절실"로 바뀌는 게 좋을 것이다.
사실 정치사의 맥락에서 보면, 우파와 좌파는 프랑스 대혁명에서 봉건제의 혁파를 둘러싼 노선의 대립에서 나타났다. 온건한 노선을 추구한 것이 우파였고, 급격한 노선을 추구한 것이 좌파였다. 요컨대 우파보다 더욱 보편적인 자유와 평등을 추구한 것이 좌파였다. 보수와 진보는 조금 맥락이 다르다.
본래 보수는 봉건제의 유지를 뜻했다. 그러나 봉건제가 혁파된 뒤에 보수는 새로운 체제의 유지를 뜻하게 되었고, 진보는 새로운 체제의 문제를 개혁해서 더욱 새로운 체제를 추구하는 것을 뜻하게 되었다. 19세기를 지나면서 전자는 자본주의를, 후자는 사회주의를 뜻하게 되었다.
이렇게 해서 보수-우파, 진보-좌파의 쌍개념이 성립되었다. 그리고 20세기에 들어와서 다시 큰 변화가 이루어졌다. 보수-우파와 진보-좌파는 민주주의 안에서 정책의 차이를 뜻하게 되었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독재 세력이 불행한 현대사를 배경으로 진보-좌파를 적대시하는 차원을 넘어서 아예 죄악시한 결과로 진보-좌파에 대한 강력한 왜곡이 이루어졌다.
한국에서 좌파는 '처벌적 용어'이기 때문에 한국의 '보수'는 반대 세력에 대해 좌파라는 낙인을 즐겨 찍는다. 그러나 사실 여기에는 큰 문제가 있다. 먼저 선진국에서 잘 볼 수 있듯이 좌파를 적대시하거나 죄악시하는 것은 민주주의를 위배하는 큰 잘못을 저지르는 것이다. 또한 좌파는 '처벌적 용어'이기 때문에 좌파라고 낙인찍는 것은 반민주와 반민주의 문제를 넘어서 불법성의 문제까지 낳을 수 있다.
무고나 명예 훼손의 범죄를 저지르는 것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좌파는 곧 '친북'이라는 주장은 더욱 더 그렇다. 이 주장은 무식한 차원을 훌쩍 넘어서 가장 현격한 불법의 문제를 안고 있다. 이런 점에서 보자면 한국의 '보수'가 반대 세력에 대해 좌파라는 낙인을 즐겨 찍는 것은 스스로 자신의 무능과 문제를 입증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번의 지방선거에서 한국의 '보수'는 이제 시대착오적인 이념 전술을 버릴 때가 되었다는 것을 배워야 한다.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누구나 자유롭게 우파와 좌파, 보수와 진보를 주장하고 선택할 수 있어야 한다. 좌파는 곧 '친북'이라는 주장에서 잘 볼 수 있듯이, 좌파가 '처벌적 용어'로 악용될 수 있는 상태 자체가 민주주의의 확립을 위한 중요한 과제이다. 그러나 나는 여기서 더 나아가 가능하면 우파와 좌파, 보수와 진보라는 용어를 쓰지 않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이 용어는 이를테면 아주 커다란 '자루'와 같다. 잘 알다시피 중요한 것은 자루 자체가 아니라 그 내용물이다. 그러나 우리는 자루에 지나치게 주목하면서 정작 그 내용물에 대해서는 소홀해지기 쉽다. 한국의 '보수'는 불행한 현대사를 배경으로 이념 전술을 전가의 보도처럼 구사해서 자루에 지나치게 주목하며 내용물에 소홀해지는 문제를 더욱 더 악화시켰다. 한국의 '진보'도 진보라는 용어에 초점을 맞추면서 내용물을 잘 만들어서 제시하지 못하고 있기는 마찬가지이다.
▲ 이른바 '4대강 살리기' 사업에 적극적인 이들을 과연 보수-우파라고 볼 수 있을까? ⓒ프레시안(손문상) |
강을 자연 그대로의 모습으로 유지하는 것이 보수에 해당되는 것이다. 강을 급격히 변모시키는 것도 온건한 변화를 추구하는 우파에 해당되는 것이 아니다. 사실 이런 일은 루스벨트의 테네시강 개발 사업이나 스탈린의 자연 개조 사업에서 잘 드러났듯이 진보-좌파에 해당되는 것이다.
한국의 보수-우파는 이 점에서도 아주 이상한 보수-우파이다. 그리고 한국의 진보-좌파는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에 대한 지지에서 잘 드러나듯이 극소수이다. 그러나 '4대강 살리기'를 반대하는 사람들은 전체 국민의 70퍼센트를 넘는다. 한국의 보수-우파는 이 점에서도 아주 이상한 보수-우파가 아닐 수 없다.
이번의 지방선거에서 한국의 보수는 어떻게든 보수-우파 대 진보-좌파의 구도를 만들어서 국민들을 그 속으로 몰아넣으려고 했다. 그러나 이 후진적인 이념 전술은 실패했다. 국민들은 후진적인 이념 정치가 아니라 선진적인 생활 정치를, 파괴적인 토건 정치가 아니라 생태적인 생명 정치를 선택했다.
이번의 지방선거에서는 4대강 살리기 저지와 친환경 무상 급식이 가장 핵심적인 사안이었다. 민주당은 두 사안을 중심으로 구체적인 정책의 변화를 추구했기에 국민들이 지지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이념이 아니라 정책으로 평가하는 국민들이 계속 늘어나고 있다. 생활과 생명은 이미 그 핵심적인 기준으로 정립되었다.
이 기준 위에서 이제 후진적인 이념 전술의 폐기와 선진적인 정책 경쟁의 강화가 이루어져야 한다. 망국적인 '4대강 살리기'의 조속한 중단은 그 진정한 출발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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