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프레시안 |
도시와 도시의 경계에 선 어느 허름한 집, 여명이 어슴푸레한 새벽의 그 집에는 이선과 한보가 있다. 그들은 무언가로부터 도망친 듯 불안하고 초조하다. 거인의 발걸음과도 같은 파열음이 들리고 한보는 이선을 남겨둔 채 밖으로 뛰쳐나간다. 그리고 얼마 뒤 낯선 부자(父子)가 들어온다. 이들 역시 평범한 일상의 인물들과는 거리가 멀다. 곧 아들이 아버지를 죽인다. 이제 이선과 아들만 남았다. 이들은 얼핏 하나의 인격체가 아닌 듯하다. 조각으로 모자이크 것처럼 그들의 정신은 파편화돼있다. 이선은 아들을 만났을 때 자신과 같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모든 것을 그대로 드러내는 거울처럼 스스로를 나타낼 수 있는 무언가를 찾으려한다. 철저하게 비어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공허는 타인으로 인해 채워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영원히 비어 어두움으로 남아있다. 원초적이고 잔혹하다. 어둠의 미학이다. 연극은 그러한 세계를 갈망한다.
연극 '옥수수 밭에 누워있는 연인'에서 선명한 것은 거인의 발자국 소리와도 같은 울림과 자유로 상징된 나비다. 나비는 작은 핀으로 박제돼 있다. "그래, 작은 핀을 잘 꽂으면 한동안 나비는 죽지 않아. 하지만 그 핀을 빼고 나면 곧 죽어버리지. 상자 밖으로 나오려고 날갯짓을 계속하다간 몸뚱이가 다 찢겨져 버릴 거야." 핀이 너무도 가늘고 날카로워 눈치 채지도 못한 나비는 이선을 닮았다. 더불어 한보, 그리고 자유를 꿈꾸는 모두를 닮았다. 이선이 끝없이 무언가로부터 탈출하려는 지점마다 나비의 거대한 날개가 일으키는 바람이 분다. 붉은 피가 흐른다. 핏방울은 공간을 울리는 공포의 소리로 극대화된다. 모두를 두렵게 하는 그 소리는 아마도 나무가 쓰러지는 소리일 것. 숲을 지탱하는 나무가 단번에 넘어지듯, 자유를 꿈꾸는 인간의 무엇이 힘없이 꺾인다. 그 소리가 공포다.
사막 한 가운데서도 살아 버티는 나비를 꿈꾸는 이 연극은 '2010 서울연극제' 공식참가작 마지막 작품이다. 그 마지막 장식이 나비의 날개처럼 매혹적이다. 연극 '옥수수 밭에 누워있는 연인'은, 창작초연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촘촘히 짜여있다. 현실과 환상의 경계는 짜릿하다. 어지러운 연극을 미동도 없이 지탱하고 있는 배우들 남명렬, 김호정, 민경진, 이명호의 이름이 숲 속의 안개보다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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