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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꾼의 넋두리, "술에 세금 붙이는 더러운 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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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꾼의 넋두리, "술에 세금 붙이는 더러운 세상"

[판다곰의 음식 여행·19] 술, 신이 내린 이슬

인간이 마시는 음료 가운데 술만큼 우리에게 친숙한 것이 있을까? 다른 먹는 음식들은 우선 생존에 필수 불가결했으며 그 식욕을 채우다 식도락으로 발전했지만, 술은 식도락 이전에 사람에게 즐거움을 주는, 신이 내린 액체였다.

술을 언제부터 마셨을까 하는 질문에 대답하기는 어렵다. 술의 기원에 늘 등장하는 예화는 원숭이가 담근 술이다. 원숭이가 숨겨둔 과일이 자연의 효모 작용으로 술이 되었고 그것을 맛보고는 탐닉했다는 것이다. 원숭이를 인간으로 대체해도 전혀 어색하지 않은 이야기다. 선사 시대에 수렵과 채집으로 연명하던 때에도 자연의 섭리는 인간에게 술을 주었던 것이다.

인류 초기의 술

술의 원료는 바로 당분이다. 자연에서 가장 손쉽게 얻을 수 있는 당분의 원료는 당연히 과일과 꿀이다. 저장해둔 과일과 꿀은 자연 효모를 받아들여 술이 되었고, 이 술은 사람을 취하게 하여 신과 함께하는 황홀감을 맛보게 했다.

하지만 자연 발효 술은 오래가지 않았다. 당분이 알코올로 변했지만, 알코올은 다시 초산균이 시큼한 맛으로 변화시켰다. 이 과정을 제어하는 일은 이때의 지식으로는 무척이나 어려웠을 테다. 그러니 술 익을 때를 맞춰 마시는 것만이 최상의 선택이었다.

농경 생활이 시작되면서 술의 재료로 곡식이 추가되었다. 과일도 이제는 채집하던 데에서 벗어나 나무를 심어 계획적으로 기르게 되면서 술을 생산할 수 있는 충분한 여력을 확보했다. 어찌 되었든 시작은 곡식으로 만든 곡주보다는 과실주가 우선이었다. 곡식은 전분을 당화시키는 또 하나의 과정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포도주로 상징되는 과실주는, 여름이 덥고 건조해 당도 높은 과일을 생산할 수 있는 지중해성 기후에서는 상당 기간 우세를 점할 수 있었다. 하지만 동아시아에서 술의 대중화는 곡물이 생산되기 시작한 농경 시대의 시점으로 갈 수밖에 없었다. 기후 탓에 당도 높은 과일이 흔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곡주가 본격적으로 개발된 것은 농사의 시작과 관련이 있다. 이집트의 보리농사가 맥주의 출현으로 이어지고 동아시아의 중국 화북 지방과 우리나라는 우선 조와 기장이 곡주의 대상이었다.

하지만 여기에는 뚜렷한 차이가 있다. 이집트를 비롯한 서쪽은 전분의 당화를 위해 보리를 싹 틔운 맥아를 썼지만, 동양에서는 밀을 가루 내어 누룩곰팡이를 붙인 누룩을 썼다. 하지만 이런 곡주와 과실주는 알코올의 함량이 아무리 높아도 15도를 넘어서기 어렵다. 양조 기술도 좋지 않아, 보리나 기장, 조로 만든 술의 알코올 함량은 평균 2, 3도에 그쳤으니, 요즘으로 보면 정말로 밍밍한 술이었다.

그래서 주당들이 술에 취한 기분을 맛보려면 정말로 엄청난 양을 마셔대야 했다. 그때 술을 마시던 술잔이 이러한 사실을 증명한다. 보통 술 한 잔의 용량이 지금의 밥그릇을 훨씬 능가하는 커다란 크기였다. '작(爵)'이라 부르는 중국 은대의 술잔은 크기가 어마어마해서 지금으로 치면 1000시시짜리 맥주잔만큼 술이 담긴다.

지금의 맥주는 양조 기술이 좋아져 알코올 도수가 5도까지 높아졌지만 그래도 생맥주잔의 보통 크기가 500시시 정도니 큰 잔에 속한다. 빨리 취하려면 정말 많이 마셔야 하고 포만감도 훨씬 크게 나타난다.

영하 40도에는 40도의 알코올을

도수가 센 술을 마시는 것은 거의 모든 주당의 바람이었던 것 같다. 특히 추운 지역에서는 독한 술로 겨울철 추위를 견디려고 하는 걸 보면 독한 술에 대한 인간의 욕심은 거의 생존 본능인 것 같다. 증류라는 위대한 발명이 있기 전에는 이런 독한 술을 마시기가 쉽지 않았다. 하지만 궁하면 통하니, 주당들은 불가능한 가운데서도 방법을 찾아낸다.

겨울에 춥고 여름에 더운 대륙성 기후 지방에서는 사과와 같은 과일로 술을 만들었다. 이 술은 대체로 알코올 농도가 10도에서 12도 정도밖에는 되지 않았다. 하지만 이 정도의 술이 추운 겨울이 되면 부분적으로는 얼 수밖에 없다. 액체 가운데 물이 가장 먼저 어니까 얼음만을 걷어내면 거의 40도에 이르는 술을 만들어낼 수 있었다. 이런 술은 쉬이 변하지도 않아 오래 보관할 수 있기까지 하니 술꾼들에게는 정말 좋았다.

독한 술을 찾는 술꾼들에게 가장 기쁜 소식을 전한 사람들은 몽골 사람들이었다. 몽골 사람들은 유목 민족이었기에 술을 만드는 재료는 동물의 젖밖에 없었다. 하지만 동물 젖에 들어 있는 유당은 농도가 옅어 좋은 술을 마시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더군다나 이 젖술은 도수도 낮아 쉽게 상했다. 독한 술이라는 오랜 숙원은 칭기즈칸의 서역 원정이 해결해주었다.

칭기즈칸이 서쪽에서 가장 먼저 점령한 곳은 아랍 세계였다. 당시 아랍은 세계 최고의 선진 과학기술을 지녔던 나라였다. 칭기즈칸의 군대는 아랍을 점령하여 그 많은 기술자를 손에 넣을 수 있었으며 여기서 얻은 군사 기술은 다른 지역을 점령할 때 큰 힘을 발휘했다.

이 당시 아랍에서는 아연을 만들어낼 때 증류법을 쓰고 있었다. 아연은 이 힘든 제련법 때문에 가장 뒤늦게 원광에서 분리되기 시작한 금속 가운데 하나다. 이 아연을 제련하던 증류법이 몽골인의 젖술 증류에도 사용되었다.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증류한 젖술은 조금만 마셔도 금세 취할 정도로 대단했으며, 변질하지 않아 오래 지니고 다닐 수 있었다.

ⓒ프레시안(손문상)

대세는 증류주

몽골대제국의 위세가 계속되면서 증류주는 세계 각국으로 퍼져 나가기 시작했다. 중국도 술을 증류하기 시작했으며, 여기서 고량주와 같은 증류주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몽골의 침략을 받은 고려에도 비로소 소주가 등장했다. 한국에서 안동소주가 유명한 것은 안동이 몽골의 도호부가 설치된 곳이라 소주 기술이 일찍 도입되었기 때문이다. 안동만이 아니라 몽골의 지배를 직접 받았던 개성도 소주가 유명했다.

증류주의 위력은 몽골에 직접 지배받지 않은 지역까지 퍼져 나갔다. 포도주를 증류해 브랜디를 얻고, 보리로 만든 맥주를 증류해 위스키를 만들었다. 거기에다가 석탄을 태우거나 오크통 속에 넣어 여러 가지 향기를 배게 하는 등 다양한 기술을 통해 증류주를 발전시켜 나갔다. 러시아는 보드카라는 증류주로 발전했고, 설탕의 전성기에는 선원들을 위해 값싼 럼주를 개발했다. 멕시코의 테킬라도 선인장 수액으로 만든 술을 증류한 것이다.

동아시아로 방향을 바꿔보면 대륙성 기후가 극심한 화북 지방은 고량주를 위시해 도수가 센 술이 주류로 자리를 잡았다. 우리나라도 안동소주를 비롯해 증류주들이 점차 확고하게 자리 잡아가기 시작했다.

우리의 술이 쌀을 주원료로 했다고 해서 단순하기만 했던 것은 아니다. 술을 빚으며 한약재를 넣어 약양주를 빚기도 했고, 꽃향기를 첨가하여 가향주를 빚기도 했다. 소주의 등장은 과실의 향기와 맛을 원재료가 상하지 않게 술에 침출시켜 다양한 술의 가능성을 엿보게 했다.

소주와 양조주를 섞고 배합하는 등 증류주와 전통의 술이 함께 어우러져 아주 다양한 술을 빚어냈다. 이강주, 노산춘, 호산춘, 송화백일주, 과하주, 진도홍주, 법성포소주, 죽력고, 계당주, 안동소주, 김천과하주, 김천청명주, 오가피주, 감홍주, 벽향주 등의 술이 지방마다 특색을 발휘하며 자리 잡게 되었다.

일본은 몽골의 말발굽을 피한 유럽처럼 조선을 통해 간접적으로 증류주를 받아들였다. 대략 조선 시대 초기에 소주의 기법이 일본으로 건너가게 되었다. 하지만 이렇게 뒤늦게 전래된 증류주는 일본에서 그다지 활발하게 전파된 것 같지는 않다. 그 뒤로 일본은 쌀로 주조한 '사케'가 전통술로 오랫동안 터를 잡았고 소주는 그다지 흔하지 않았다.

요즈음 일본 각 지방에서 특색 있게 만들어내는 여러 종류의 다양한 사케를 보면 부러운 기분도 든다. 하지만 일본술은 결국 우리에게서 건너가 꽃을 피운, 같은 원류를 가진 술이다.

멸종 위기의 한국 전통술

풍부했던 한국 술을 말살시킨 것은 바로 일본이었다. 1905년 을사늑약으로 국권을 탈취한 일본은 한일병합을 한 해 앞둔 1909년에 주세법을 발효하여 술의 제조와 판매를 제한하기 시작했다. 마땅한 세원을 확보하기 어려웠던 그 시대에 술이라는 생필품을 이용해 간접세로 세수를 확보하고자 했던 것이다.

자연히 술의 제조를 통제해야 했으며, 먼저 손댄 것이 술 담그는 데에 없어서는 안 될 누룩의 제조에 제한을 가한 것이다. 결국 1927년에는 통합적인 곡자제조회사를 통해 일정한 누룩을 쓰게 하니, 술은 이제 질을 우선으로 하는 상품이 될 수 없었고 양조업의 여러 좋은 전통도 사라졌다. 술에 술다운 품위가 깃들 여지가 더는 없어져버렸다. 집에서 만들어 마시는 술까지 단속할 정도였으니 가양주의 전통까지 다 허물어져갔다.

우리나라의 술은 청주, 소주, 맥주, 막걸리 이외에는 별다른 특색도 없는 그저 취하려고 마시는 술밖에 남지 않았다. 1945년 해방이 되고 나서도 식량 부족이 술의 뒷덜미를 잡았다. 막걸리조차 쌀을 쓰지 못하게 하여 조와 밀가루로 막걸리를 만들었고, 소주는 고구마로 만든 주정을 쓰다가 값싼 대만 주정이 그 자리를 차지했다.

소주는 주정에 물을 부어 도수를 맞추고 감미료와 향료를 넣는 공정으로 바뀌게 되었다. 이것이 이른바 희석식 소주다. 주정까지 석유에서 뽑아내려다 술꾼들의 노여움에 그렇게는 되지 않았지만, 지금 나오는 소주 대부분이 희석식으로 만든 술이다. 우리 전통주를 망가뜨린 일본에서, 증류주가 아닌 값싼 방법으로 만든 희석식 한국 소주가 열풍을 일으킨다니, 아이러니하기까지 하다.

술꾼의 넋두리

생활이 넉넉해지며 술의 양태도 많이 바뀌었다. 하지만 희석식 소주의 도수가 조금 낮아지고 소주의 자리에 맥주와 위스키가 비집고 들어왔으며 과실주인 와인이 점점 더 많이 수입되는 것 말고는 특별한 변화가 없다. 백세주나 산사춘 등 새로운 형태의 술이 등장하기는 했어도 아직 주류를 이루지는 못하고 있다. 옛 모습을 재현한 술들이 나오고는 있지만 특별히 찾지 않는 한에는 손쉽게 접할 수도 없다.

가장 아쉬운 것은 일제가 만든 주세라는 형태의 간접세가 아직도 술에 부과된다는 점이다. 중국과 일본에서는 소비재인 술에 세금을 붙이는 관행이 오래전부터 있었지만 우리나라는 그런 일이 없었다. 조선조에 흉년으로 양식이 부족할 때에 고통을 나누자는 뜻에서 금주령을 내린 적은 여러 번 있었지만 술을 세금으로 통제하지는 않았다. 금주령도 술에 대한 술꾼들의 탐닉을 막기는 어려웠다. 금주령 기간에도 몰래 술을 담그거나 몰래 담근 술을 사 먹는 일이 흔했다.

그렇지만 그렇게 몰래 마시는 일에 양심의 가책을 받기는 받았나 보다. 술꾼들은 다른 방법을 생각해냈다. 술에 약재를 넣어 빚거나 하면서 술 앞에 '약'이라는 이름을 하나 더 넣었다. 술로 마시는 게 아니라 약으로 마신다는 뜻인데, 술로 마시나 약으로 마시나 취하기는 마찬가지다. 하긴, 약으로 마시려고 집에서 담근 술까지 탓하기는 어려웠다. 다만 기근이 와서 금주령이 내려지면 술에 취해 거리를 활보하지는 못했으니, 집에서 조용히 마시고 깨어나면 그뿐일 테다.

소금에 염세를 붙이거나 술에 세금을 매기는 것처럼 생필품에 세금을 매겨 국가 재정을 충당하는 것은 능력 없는 정부에서나 할 일이다. 음주를 우리 삶의 일부분으로 받아들이고 삶의 아름다운 동반자로 생각한다면 여기에 세금을 매긴다는 것은 수치스러운 일이다. 음주로 말미암은 국민 건강 훼손을 걱정한다면 세금을 붙여 술을 비싸게 할 게 아니라 세금을 없애 사람들이 더 좋은 술을 마실 권리를 보장해야 한다.

소주 값 올랐다고 주당들이 술 덜 마시겠는가? 주세를 없애는 것은 좋은 술을 만들어내는 지름길이다. 명품주를 만들어 세계시장을 공략하려거든 주세부터 없애야 한다. 일제 강점기에 좋은 술이 많이 없어지기는 했어도 우리는 몇 천 년을 술과 함께해온 좋은 전통이 아직도 있다. 공장에서 생산한 물품에 세금을 붙여야 한다는 논리라면 술에는 주세가 아닌 부가세로 족하다.

막걸리 열풍에 덧붙여

요즘에는 다시 막걸리가 대세라고 한다. 예전에는 집에서 담근 막걸리를 마시던 것이 일제 강점기를 거치면서 양조장 막걸리를 마시게 되었다. 그나마도 요즘처럼 쌀이 남아돌기 전까지는 부족한 식량 사정에 고구마나 좁쌀, 밀가루로 만든 막걸리를 마셔야 했다. 그래서 한동안 막걸리는 술이 깨면 머리가 아프고 냄새 나는 고약한 술이었다. 양조 방법이 발달하고 쌀로 담그게 되면서 요즘은 꽤 괜찮은 막걸리를 마시게 되었다.

막걸리가 다시 유행을 타면서, 일본 사람들이 좋아하니 막걸리를 고급화하자는 이야기도 나온다. 하지만 막걸리는 원래 고급스러운 술이 아니다. 술지게미를 마구 걸렀다는 뜻에서 막걸리라는 이름이 붙었듯 본디부터 대중적인 술이다. 요즘의 막걸리 붐을 타고 호황을 맞은 것은 대규모 양조장뿐이라고 한다. 자본력이 미치지 못하는 지방의 소규모 양조장은 별반 달라진 게 없다는 이야기다.

막걸리의 성쇠가 주세법 때문에 흔들렸던 것을 생각할 때, 지금이라도 좋은 막걸리를 마시려면, 되지도 않는 '고급화' 정책보다는 특색 있는 지방의 막걸리 양조장을 지원하는 게 먼저일 것이다. 일본의 사케가 지방마다 그 풍부한 술맛을 보여주듯 말이다. 그래야 우리 술이 주세법의 질곡에서 벗어나 좀 더 술다워지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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