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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스턴트커피의 비밀…원래 '전투 식량'이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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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스턴트커피의 비밀…원래 '전투 식량'이었다고!

[판다곰의 음식 여행·16] 밥 먹고 차 한 잔

예전에는 밥을 먹고 나면 뜨거운 숭늉을 한 그릇 마시는 게 후식이자 차와 같은 의미였다. 요즘도 무쇠솥으로 밥을 하는 음식점에서는 식후에 따로 숭늉을 주기도 한다. 돌솥에 밥을 주는 식당에서는 눌은밥을 다 푸지 않고 식후에 물을 부어 마실 숭늉을 만들게도 한다.

하지만 가정에서는 전기밥솥이 밥 짓는 일상적 도구가 된 뒤로는 숭늉 마시기가 쉽지 않다. 애써 숭늉을 마시려면 힘들게 솥 밥을 따로 하거나, 아니면 가게에서 파는 누룽지를 사다 끓여야 한다. 그렇기에 이제는 식후에 커피, 홍차, 녹차 같은 것을 마시는 게 보통이다.

그렇다고 숭늉을 차로 볼 수 없다는 뜻은 아니다. 차에는 분명 보리차, 옥수수차 같은 곡차도 있으니 숭늉도 쌀차라 부르지 못할 이유가 없다. 실제로 잎차에 볶은 쌀을 넣어 차 맛과 곡식의 구수함을 함께 즐기게 한 상품도 있다.

우리가 숭늉을 마시게 된 것은 예전에 부엌에 걸려 있던 무쇠솥과 관련이 있는 것 같다. 우리네 부엌 구조는 취사용 아궁이가 있고 그 위에 무쇠솥이 걸린다. 밥을 짓고 난 열은 방의 온돌로 이어져 난방용으로 쓰인다.

이 무거운 무쇠솥은 장작으로 밥을 지을 때 열의 변화에 민감하게 반응하지 않고 일종의 압력솥 역할도 하기에 밥맛이 좋아진다. 무쇠솥에서 밥을 퍼내고 나면 밑바닥에 눌은 누룽지는 따로 긁어내야만 한다. 그러고도 남은 누룽지는 물을 붓고 끓여서 솥을 씻을 수밖에 없다. 여기서 나온 것이 바로 숭늉이다. 밖에 따로 솥을 걸고 밥을 해야 하는 더운 여름에도 숭늉을 끓이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식량이 귀했기에 누룽지나 밥풀 하나도 소홀히 할 수 없었던 것이다.

예전에 우리의 차 문화가 발달하지 못한 이유로 '물이 맑고 좋아서 차의 필요성이 없다'느니, '구수한 숭늉이 차를 대신할 수 있었다'는 등의 이야기가 있었지만, 실제로는 생활 환경이나 여유에서 차를 즐길 만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가진 이들의 사치품이었던 차

차에는 두 가지 측면이 있는데, 하나는 여유로움, 윤택한 생활을 상징하는 기호품이라는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일상에 꼭 필요한 생활필수품이라는 것이다. 가령 귀족들이 찾았던 차나 신사들이 사교장에서 마시던 커피는 전자의 의미일 테고, 고기와 기름만을 먹었던 유목 민족의 차나 산업혁명 때에 에너지원으로 설탕을 홍차에 넣어 먹던 노동자들의 차는 후자의 의미가 될 것이다.

차가 인도와 동아시아를 중심으로 발달했다면 서양에서는 커피를 들 수 있다. 커피는 아랍인들이 아프리카에서 가져다 세계적으로 보급한 기호식품이다. 아랍인들에게는 이 커피가 술을 대신하는 '아라비아의 와인' 정도의 역할을 한 것 같다. 더군다나 종교의식에서는 커피에 포함된 카페인의 각성 작용이 커다란 역할을 했기에 일상적인 음료로 자리 잡을 수 있었다.

아랍인들한테서 커피를 받아들인 유럽에서는 커피가 일종의 사치품이었다. 빈부터 런던에 이르는 커피하우스들은 여유 있는 귀족들이나 신사들의 배타적인 사교 장소였으며 커피는 이들 사이에서 사교의 매개체 역할을 한 고급스럽고 이국적인 사치품이었다. 오랜 기간 사치품이던 커피는 현대의 시민사회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일반 대중이 향유할 수 있게 되었다.

차의 원조라 할 중국에서도 사정은 크게 다르지는 않아 차가 예전에는 약용으로 썼고 아마도 원래는 차 이파리를 거의 생식하다시피 한 것 같다. 중국에서 차를 우려 마시는 것은 위진남북조 시대에 성행하기 시작한 듯하다.

<삼국지연의>의 도입부를 보면 유비가 어머니를 위해 차 한 덩어리를 비싼 값에 사는 이야기가 나온다. 이 소설을 쓴 나관중은 원명 교체기에 살았으니 그때까지만 해도 차가 무척이나 귀한 사치품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중국도 돈 많고 권세 있는 식자층이 즐겨 마시다가 시대가 흘러감에 따라 차츰 아래로 확산되었을 것이다.

시대에 따른 중국 차의 변천사

차나무는 본디 한 종류다. 홍차나 녹차나 우롱차나 차의 종류는 많지만 차나무는 한 종류뿐이다. 물론 차나무도 육종을 해서 여러 가지로 품종을 개량하기는 하지만 생물학에서는 한 종으로 치는 것이다.

그렇지만 과거 중국에서 찻잎을 가공한 차는 지금과는 전혀 달랐다. 지금의 차는 대개 차 이파리를 따서 뜨거운 철판 위에서 그대로 덖은 맑은 차거나, 아니면 발효를 시킨 뒤에 덖어 말린 차다. 보이차 같은 덩어리 형태의 차도 요즘에는 대부분 발효시켜 말린 것을 덩어리로 만들어 놓은 것이다. 하지만 차의 이러한 모습은 근대에 들어와서의 모습이다.

차를 마시는 풍습이 꽤 성행하게 된 당나라 때의 기록을 보면 당시의 차는 주로 찻잎을 따서 시루에 찌고 절구에 찧어 형틀에 넣고 모양을 만들어 말린 병차(餠茶)다. 병차뿐 아니라 아예 가루 형태로 가공한 말차(抹茶)도 있었다. 가루차는 찻잎을 찌고 말려 가루로 곱게 간 것이다.

마시는 방법도 요즘과 달랐다. 병차는 적당한 양을 덜어 곱게 간 다음에 물에 넣고 끓인다. 요즘의 차와 대별되는 가장 큰 차이는 찻잎을 찐다는 것이다. 중국과 한국은 이렇게 쪄서 가공하는 형태가 요즘은 사라져버렸지만 당나라의 유풍을 간직한 일본에는 아직도 쪄서 가공한 차가 남아 있다.

가루차도 물에 넣고 끓여 마신다. 더군다나 여기에 소금으로 간을 해서 먹었다. 이런 방법을 보면 차를 마시는 것이 요즘처럼 풍류를 즐기는 것보다는 일종의 약이나 음식 역할을 하지 않았나 하는 의심이 든다.

그 뒤로 송대에 이르러서는 차의 제조법이 더욱 정교해져서 찻잎을 찌고 식혀 차에 물기를 주고 말리기를 반복한 다음, 물과 함께 곱게 갈아 향을 가미하고 모양을 뜨고 건조해 정제한 것에 금으로 용과 봉황의 문양을 새겼다. 이렇게 만든 것이 연고차(硏膏茶)로, 용봉단(龍鳳團)이라 불렀다.

우리나라 고려시대에 마신 차도 이 용봉단 같은 중국산 차를 수입해서 마신 것이다. 중국 차가 지금과 같은 모습을 가지게 된 것은 명대부터다. 명의 태조인 주원장이 복잡한 차 제조법 때문에 백성의 노고가 심하니 엽차를 그대로 진상하도록 했기 때문이다. 이때부터 차는 덖은 차가 주로 쓰이게 된다.

차의 종류에는 발효한 차와 반만 발효한 차, 또는 홍차나 보이차 같은 것이 있다. 또 찻잎을 딴 시기를 기준으로 나누기도 하고, 찻잎의 크기나 생산지에 따라 구분하기도 한다. 일본은 비교적 당대의 모습을 아직도 많이 간직하고 있기에 쪄서 말린 차나 가루차를 아직도 생산하고 있다.

생활필수품으로서의 차

이런 고급스러운 차와는 별도로 티베트 같은 지역은 차가 생활필수품으로 전래되었다. 당태종이 외교를 목적으로 문성공주를 티베트로 시집보내면서 함께 전해졌다고 한다. 처음에는 상류층에서 차를 즐겼지만 빠르게 하층민까지 전해져 차가 없이는 살 수 없을 정도가 되었다.

티베트의 차는 주로 운남에서 생산되던 질 낮은 보이차였는데, 유목민들은 기른 말과 가축을 팔아 차를 사다가 거기에 야크 젖으로 만든 버터를 넣고 소금을 넣어 마셨다. 이 차가 물이 귀한 유목민족에게는 마음의 위안과 함께 열량을 공급하는 귀중한 음식이었던 셈이다.

열량 공급이라면 홍차를 빼놓을 수 없다. 인도를 점령한 영국은 다르질링과 같은 다습한 지역에서 차를 재배해 유럽에 팔았다. 차를 싣고 먼 항해를 하는 바람에 차가 배 안에서 발효되어 붉은빛을 띠게 되었다. 제국주의 시대 삼각무역의 이윤을 채우려면 국내에서도 차의 일정 부분을 소비시킬 수밖에 없었다.

산업혁명기에 이르자 노동자들에게 값싼 에너지원을 공급해야 했는데, 이 용도로 카리브 해에서 노예들이 생산한 설탕을 홍차에 넣어 마시는 풍습이 퍼지게 된다. 이처럼 홍차는 노동자들로 하여금 열량원인 설탕을 마시게 하는 도구로 이용되었다.

차, 커피와 함께 세계 3대 기호식품으로 꼽히는 초콜릿은 어떨까? 우리는 초콜릿을 딱딱한 과자로만 알지만 20세기 중반까지 초콜릿은 음료였다. 잉카제국에서 화폐로 쓰일 만큼 귀중했던 카카오는 유럽으로 전해지면서도 그 품위를 잃지 않았다. 상류층 사람들의 고급 음료가 되었던 것이다.

20세기 중반에 이것이 대중적인 것으로 바뀌면서 딱딱한 고형물의 초콜릿으로 거듭났다. 우리나라에서는 미군이 들어오면서 초콜릿이 보급되었다. 카카오는 남미가, 커피는 아프리카가 원산이다. 하지만 지금은 커피는 브라질과 콜롬비아 같은 남미에서 더 많이 생산되고, 반대로 카카오는 아프리카의 코트디부아르나 가나 같은 나라에서 더 많이 생산된다. 자본주의의 탐욕은 커피와 카카오의 주 생산지마저 바꾸었다.

ⓒ프레시안(손문상)

대중화되지 못한 우리나라 차 문화

우리나라에도 신라 때 벌써 중국에서 차의 씨앗을 얻어 지리산에서 재배했다는 기록이 <삼국사기>에 있고, 가락국 김수로왕의 왕비가 친정인 인도에서 가져다 심은 것이 김해의 죽로차라는 전설이 있는 것을 봐서는 차나무가 우리나라에 일찍부터 자라고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

술을 금기시하는 불교에서는 차가 술을 대신하는 음료인 만큼 불교가 융성했던 삼국시대와 고려 때에는 차가 귀족들의 일상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고려 때에는 국산 차가 품질이 떨어져 잘 마시지 않는다고 했다. 아마도 찻잎의 질이 떨어졌다기보다는 이렇게 차를 만드는 제법이 복잡하고 까다로워 생산하지 못했을 가능성이 훨씬 크다.

어쨌거나 고려시대에는 왕궁이나 귀족, 승려들이 차를 애용했다. 우리가 추석과 설에 조상에게 차례를 올린다고 하는 것은 불교 의식인 다례에서 나온 말이다. 다반사(茶飯事)라는 말이 유래했을 만큼 불교 의식에서는 차가 중요하다.

고려 때 팔관회, 연등회 같은 국가 의식이나 왕비와 세자의 책봉의식에 차를 올리던 풍습이 조선 초기 서거정, 김시습, 김종직 등의 문인들에게 이어지기는 했으나, 억불정책으로 일상생활에서 차가 차츰 사라지고 산사의 선승들만 차를 마시는 풍습을 유지한다.

여기서 산사라 하더라도 차를 기를 수 있는 대흥사, 화엄사, 쌍계사, 선암사 등 남도에 있는 절에서만 차를 마시는 유풍을 지속할 수 있었다. 이때는 중국에서 수입한 비싼 차를 마실 수도 없으니 선방을 중심으로 손수 차나무를 기르고 찻잎을 따다 덖어서 차를 만들어 마셨다. 산사의 차가 비교적 단순한 맑은 차가 중심이 된 것도 이런 연유에서 그랬을 것이다.

그러다가 19세기에 들어서 남도의 혜장, 초의와 같은 선승들과 정약용, 김정희, 이상적 등의 문인들에 의해 차가 다시 유행하게 된다. 특히 초의선사는 <동다송(東茶頌)>이라는 책을 지어 차를 재배하고 마시는 방법을 정리했다. 정약용은 스스로 호를 다산(茶山)이라 짓고 강진에 차밭을 일구며 '걸명소(乞茗疏)'라는 글을 지을 만큼 차를 아끼고 즐겼다. 하지만 이런 조선 후기의 유습도 혼란한 조선말과 구한말을 넘기지 못하고 그 명맥이 사라지고 말았다.

차 문화의 부흥, 인스턴트커피

우리나라에 기호품으로 차가 다시 등장하게 되는 것은 일제강점기 때 일본을 통해 커피와 홍차 같은 기호품이 들어오면서부터다. 하지만 이때의 커피와 홍차는 새로운 문물을 접한 도시 사람들의 사치품이었을 뿐 일반 서민에게까지 확산된 것은 아니었다.

커피가 본격적으로 자리 잡기 시작한 것은 한국전쟁 때로, 전쟁에 참가한 미군의 전투식량 가운데 하나가 커피였다. 커피는 원두를 볶고 갈아서 다시 물에 침출시키는 복잡한 과정을 겪어야 하는데 전장에서는 이런 과정을 행할 여유가 없으니, 이때 병사들을 위해 만든 것이 바로 인스턴트 커피였다. 우리는 이것을 받아들였기에 우리에게 커피는 곧 인스턴트인 것이다.

전쟁이 끝나고 삶의 여유는 사라졌지만 인스턴트커피는 살아남았다. 집안에 마땅한 사교 공간 없는 사람들은 길거리의 다방으로 나왔으며 그 다방에서 마시는 것이 커피 한 잔이었다. 물론 집에서는 아직 숭늉 한 잔에 만족해야 했지만 전기밥솥의 등장과 함께 이 숭늉도 보리차에 그 자리를 내주고 만다. 전기밥솥에서는 누룽지가 생기지 않으니 보리를 볶아 보리차를 마시게 된 것이다.

커피를 파는 다방이 그 명맥을 유지하는 동안 인스턴트커피는 차츰 가정을 공략하기 시작한다. 밥을 먹고 난 뒤의 커피 한 잔은 아주 일반적인 일이 되었다.

인스턴트커피가 기호품으로 자리 잡은 나라는 그리 많지 않다. 아마 우리나라도 커피 도입의 특수성이 그렇게 자리 잡게 했던 것일 테다. 그렇기에 인스턴트커피의 품질에 민감한 것도 우리나라가 가장 으뜸이다.

인스턴트커피도 그 품질은 먼저 끓이는 커피의 질에 좌우되니 좋은 원두를 볶아 커피를 우려낸 것으로 만들어야 좋다. 다른 나라의 인스턴트커피는 커피 원두를 갈아 뜨거운 물을 내려 마실 수 없을 때 마시는 비상용이기에 그다지 좋은 원두를 쓰지 않는다. 우리나라 인스턴트커피가 세계에서 가장 좋은 원두로 만든다.

숭늉 한 그릇의 따스함을 그리며

생활수준의 향상으로 차는 이제 일상화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 내용도 다양해지고 있다. 커피는 인스턴트커피의 오랜 전성시대가 거의 마침표를 찍고 있다. 예전의 다방은 거의 찾아보기 어려우며, 길에는 무수한 원두커피 전문점이 우후죽순으로 나타나고 있다.

물론 간편한 자동판매기는 여전히 인스턴트커피가 주종이지만 최근에는 즉석에서 원두를 갈아 커피를 뽑아내는 자동판매기도 생겼다. 원두커피에다 생크림, 계피, 술 등의 다양한 부재료를 이용한 커피도 유행한다. 홍차도 이제 그냥 홍차가 아닌 브랜드 홍차가 유행하며, 여러 가지 다양한 허브차도 우리를 유혹한다. 차도 중국과 일본에서 수입되는 여러 종류의 차에다 우리나라에서 생산되는 차까지, 눈부시게 발전했다.

젊은이들이 찻집에 앉아 커피나 홍차 같은 차를 마시며 담소를 즐기는 모습은 이제 지극히 일상적인 풍경이 되었다. 테이크아웃 커피숍에서 파는 커피를 이곳저곳에 들고 다니며 마시는 모습도 익숙해졌다. 커피와 차는 거리와 가정에 넘치지만 그래도 늙은이들은 군불을 땐 방안에서 구수한 누룽지 냄새와 함께 가마솥에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던 따끈한 숭늉 한 그릇 마시던 시절을 더 그리워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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