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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래떡에 얽힌 '떡국 괴담', 그 오싹한 사연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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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래떡에 얽힌 '떡국 괴담', 그 오싹한 사연은?

[판다곰의 음식 여행·12] 쌀은 우리의 로망이었다

이팝이라 불리는 나무가 있다. 한여름에 하얀 쌀밥과 같은 꽃을 피운다고 해서 이팝나무라는 이름이 붙었고, 이 꽃이 소담스러워야 풍년이 든다 해서 이 나무를 좋아했다. 배고픈 시절에는 흐드러진 그 꽃이 하얀 쌀밥으로 보였다는 이야기다.

그보다 조금 못한 나무로는 조팝나무가 있다. 조팝나무는 이른 봄에 꽃을 피우지만 꽃은 노란색이 아닌 하얀색이다. 하지만 관목인 까닭에 이팝나무보다는 초라하므로 조밥을 의미하는 조팝나무로 불린다. 어쨌거나 같은 하얀색 꽃을 피우지만 볼품이 조금 처지는 덕에 이밥보다 못한 조밥이 되었다.

탄수화물 없이는 허전해

먹는 것 하면 우리는 무슨 말을 가장 먼저 떠올릴까? 우선 '밥'이라는 단어가 떠오를 것이다. 이 '밥'에는 두 가지 뜻이 있다. 작은 의미로는 곡식으로 지은 밥을 뜻한다. 보리밥, 쌀밥, 조밥, 강냉이밥, 오곡밥처럼, 지은 재료에 따라 달라질 수 있지만 요즘의 일반적인 의미로는 쌀로 지은 밥을 이야기한다.

큰 의미로는 식사를 통칭한다. 밥과 반찬을 아울러 한 끼의 식사를 밥 먹었다고 표현한다. 풍성한 식사도 한 끼의 밥, 김치와 밥만의 소박한 밥도 밥이다. 이는 되짚어 생각하면 농경 시대 이후에는 주식의 비중이 그만큼 크다는 이야기이고, 반찬이 없는 밥도 한 끼의 역할을 해낸다는 것을 뜻한다. 지금도 나이 드신 어른은 아무리 반찬을 많이 먹었어도, 또는 빵이나 떡과 함께 풍성한 식사를 했어도 '쌀밥' 한 그릇을 먹지 않고서는 밥을 먹었다고 표현하지 않는다. 밥 한 그릇 없는 식탁은 이상한 것이다.

곡식을 주식으로 하고 나머지를 반찬으로 삼는 것은 농경 사회 이후에 전 세계에서 나타나는 현상이다. 유목민이나 수렵민처럼 짐승의 젖과 고기를 주식으로 하지는 않는 농경 사회에서는 거의 다 곡식이 주가 되었다. 농사가 시작되면서 활동에 필요한 에너지의 거의 전부를 탄수화물 위주의 곡식에서 얻는 삶이 된 것이다.

쌀을 주로 재배하는 곳은 밥으로, 밀을 주로 재배하는 곳은 빵으로, 옥수수를 주로 재배하는 곳이면 옥수수를 가공해서 주식을 삼는다. 구미의 육식 위주 식사가 확립된 것도 따지고 보면 200년 정도밖에 되지 않았으며 아직도 대다수 나라에서는 밥이나 빵을 먹지 않으면 무언가 허전하다는 생각이 드는 게 일상이다.

배고픈 놈이 이밥 조밥 가리랴

그렇다면 예전 서민들의 주된 곡식은 무엇이었을까? 먼저 떠오르는 작물은 보리다. '보릿고개'라는 말 때문일 것이다. 이 보릿고개는 춘궁기라는 뜻이 포함되어 있다. 가을걷이를 하고 그 양식으로 겨울을 나지만 벼를 소작료와 세금으로 내고 나면 얼마 남지 않은 곡식으로 연명해야 했다. 보리를 수확해야 가을걷이까지의 양식을 해결할 수 있는데 아직 낱알은 영글지 않았다. 양식이 떨어지면 덜 여문 이삭이라도 베어다가 죽이라도 끓여 먹어야 할 참이다. 아직 아무것도 수확할 수 없는 봄의 가장 어려운 때, 보릿고개는 이 시기를 뜻하는 말이다.

봄보리는 따뜻한 남도에서는 가을에 파종해 얼마간 자란 다음, 겨울을 나고 봄에 다시 생육을 시작해 초여름에 거둔다. 보리를 거둔 다음에는 논을 다시 갈아 물을 대고 모 심을 준비를 한다. 그렇다면 이는 이모작이 가능한 한반도 남부 지방의 사례일 뿐이다. 중부 지방으로 올라오면 이미 이모작이 힘들고 북부 지방은 아예 꿈도 꿀 수 없다. 요즘 보아도 겨울에 보리밭이 있는 지방은 거의 남부 지방인 삼남 지방뿐이다.

그렇다면 그루갈이가 되지 않는 북쪽에서는 과연 무엇이 이 보리를 대체하는 작물이었을까? 근대에 들어서면 쌀농사를 짓는 범위가 한참 올라가 압록강 유역에서도 쌀농사를 짓기는 하지만 그전에는 기껏해야 한강 유역을 넘지 못했다. 1930년경을 예로 들자면 평안도나 함경도와 같은 북부 지방에서는 이밥을 먹을 정도면 무척이나 잘살던 집이었고 보통은 주곡이 좁쌀이었다.

좁쌀은 동북아에서는 무척이나 오래된 곡물이다. 한랭한 기후를 견딜 수 있게 생육 기간이 짧으며 비교적 척박한 땅에서도 잘 자란다. 중국의 은주 시대 황하 유역의 주곡도 바로 이 좁쌀이었다. 이는 이 시기의 청동기에서 발견된 술의 찌꺼기가 좁쌀을 주원료로 했다는 사실이 밝혀짐으로써 증명되었다.

우리말에서 좁쌀은 '알갱이가 잘은' 쌀이라는 뜻이다. 좁쌀과 함께 주곡의 위치를 차지한 것은 기장이다. 기장과 좁쌀이 흔하지 않아 요즘 사람들은 잘 구분하지 못하지만 이 둘은 서로 교배가 되지 않는 확연히 다른 종이다. 낱알 크기는 기장이 좁쌀보다 조금 크다. 하지만 좁쌀과 기장은 모두 볏과 작물이다.

볏과의 대표 작물로는 강아지풀을 들 수 있다. 조밭을 보면 처음에는 강아지풀과 조를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비슷하다. 우리나라 전국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이 강아지풀은, 지금은 먹는다는 생각을 할 수 없지만 곡식을 구경할 수조차 없는 흉년에는 구황식물의 역할을 했다.

기장이나 조 모두 거름을 많이 주지 않아도 잘 자라고 벼에 비하면 일조량이 적어도 되니 재배하기는 쉽지만, 수확도 많지 않고 입맛에 깔깔해서 먹기는 쉽지 않은 곡식이었다. 하지만 이 조나 기장도 떡을 만들거나 술을 만들기에는 훌륭한 재료였다. 여하튼 조와 기장 이 둘은 한반도의 북부 지방과 산간 지방에서는 더더욱 친숙한 작물이었으며, 심지어는 남쪽이라 하더라도 비가 금세 땅속으로 스며들어 논을 만들기 쉽지 않던 제주도에서는 주곡의 위치를 차지한 것이 바로 좁쌀이었다.

보리도 보리쌀이라 부르고, 기장쌀, 좁쌀이라 부르는 것을 보면 '쌀'이 곡식 낱알을 의미하는 통칭이지 벼를 뜻하는 칭호는 아니었나 보다. 여하튼 한반도에서 벼를 재배한 역사는 대략 기원전 2000년 전쯤으로 추산하고 있지만 이 잡곡 삼총사 보리, 기장, 조의 위치를 제치고 벼가 주곡의 위치를 점령한 것은 대개 고려 시대쯤으로 잡고 있다.

그렇다고 해도 실제로 좁쌀과 기장, 보리가 지역에 따라 상당한 비중을 차지한 채로 있었다. 쌀이 주 작물이기는 하지만 지배층의 식량이었고, 보리와 좁쌀, 기장, 그리고 밀, 콩, 수수, 메밀 등의 곡식이 그 밑바탕을 떠받치고 있었던 것이다.

ⓒ프레시안(손문상)

여든여덟 번의 손길로 익어가는 한 톨의 쌀

그러면 이야기를 바꾸어 '이밥'을 먹는 일을 생각해보기로 하자. 요즘이야 '햇반' 같은 상품이 있어 전자레인지에 몇 분만 가열하면 바로 따끈따끈한 밥을 먹을 수 있고, 물만 붓고 바로 밥을 지을 수 있는 '씻은 쌀'도 팔며, 아무리 번거롭다 해도 기껏해야 정미소에서 기계로 도정하여 돌을 고른 다음 쌀을 물에 씻어 밥솥에 넣고 밥을 지어 먹는 세상이니 밥 짓는 어려움은 아예 잊고 산다.

하지만 쌀농사의 어려움은 이루 말할 수가 없다. 요즘은 이앙기, 콤바인 같은 기계로 모를 심고 추수를 하며 제초제로 김매기를 대신하지만 그래도 만만치 않은 게 벼농사다. 볍씨의 싹을 틔워 모판을 만들고, 봄에는 논에 물을 대고 모를 심고 김을 매면서 낱알이 익기를 기다려야 한다.

가뭄이나 홍수도 벼농사를 짓는 농부들을 괴롭히지만 병충해도 만만치 않은 적이다. 벼농사의 어려움에 빗대어 한 톨의 쌀이 익기까지는 여든여덟 번의 손이 간다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니 그 어려움이야 말할 것도 없다. 가을에 추수를 하고도 문제는 여전히 남는다. 추수한 뒤로 탈곡을 하고 햇빛에 잘 말려 볏짚으로 짠 가마니에 넣어 습기가 차지 않게 하고 쥐나 해충의 습격으로부터 안전한 곳에 잘 보관해야 한다.

밥을 지어 먹으려면 이 곡식을 절구에 넣고 찧어 이를 체에 걸러 겨를 대충 골라내고, 다시 키질을 해서 벌거벗은 알곡을 얻어내야 한다. 여기까지가 '이밥'을 얻어내기 위한 준비단계다. 절구에 찧는 일은 물레방아의 연자방아나 디딜방아가 좀 더 손쉽게 해줄지는 몰라도 정미소가 따로 생기기 전까지는 필수적으로 거쳐야 할 작업이었으니, 기계로 벼를 찧은 20세기에 와서야 해방된 과정이었다. 그렇게 힘들여 찧은 쌀을 다시 키를 써서 겨를 날리고 물로 씻어 밥을 지어야 한다.

한마디로 흰쌀밥을 먹기까지의 과정은 정말로 험난하다. 하지만 이렇게 번거로운 과정을 열거한 것은 그래도 벼가 가장 먹기 쉽고 밥을 짓기 가장 쉬운 것임을 설명하기 위해서다. 보리도 이 험난한 과정을 겪어야 하는 것은 물론이지만 밥을 짓는 과정은 벼보다 훨씬 어렵다. 좁쌀이나 기장은 아예 껍질 벗기기가 불가능하기에 도정은 하지 않지만, 낱알이 작기 때문에 탈곡을 하여 잡티가 섞이지 않게 하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또 쌀밥에 비해 입에 여간 깔깔한 것이 아니다.

벼의 생산이 증가하면서 고려 시대부터 지배층의 주곡은 자연히 벼를 도정한 쌀이 되었지만, 서민들은 여전히 명절 한때나 제사상을 올릴 때에만 하얀 쌀밥을 먹을 수 있을 정도였다. 나라나 지주에게 바치는 세금은 그들의 소용에 닿는 벼로만 해야 했으니 이처럼 귀한 쌀은 화폐의 구실까지 했다. 농민들은 농사지은 쌀은 이렇게 바치고 잡곡으로 연명하며 흰쌀밥을 그리워했다.

고려 후기에서 조선 시대에 걸쳐 논을 깊게 가는 심경법과 모를 내서 옮겨 심는 이앙법 등 벼농사 기술이 혁신적으로 발전하면서 생산력이 증대되었다. 국가의 부를 증대시키려는 노력으로 관개를 개선하고 땅을 개간하여 점차 논이 확대되자 드디어 벼는 우리의 주곡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떡국에서 찾은 쌀의 전래 경로

벼가 주가 되는 권역은 동남아시아와 한·중·일 삼국을 포함한 좁은 권역이다. 벼는 본디 여러해살이풀이었지만 인간이 길들여 한해살이풀이 되었다. 볏과 식물의 가장 큰 특색은 줄기 가운데가 비어 있는 것이다. 줄기 가운데가 비어 있으므로 물속에서도 숨을 쉴 수 있다. 대나무도 이 볏과 식물의 한 가지다. 벼는 물을 댄 논에서 자라는 식물로 알려졌지만 실제로는 밭에서 자라는 육도(陸稻)도 있다. 이 육도가 거의 소멸한 것은 소출이 적고 제초 작업이 어려우며 관개기술이 발전했기 때문이다.

벼의 원적지는 인도의 동북부, 방글라데시, 혹은 미얀마로 추측하고 있다. 중국에서 벼농사를 지은 것은 대략 기원전 5000년 전으로 추정한다. 중국에서 우리나라로 벼가 전래된 것은 대략 기원전 2000년 경이라고 한다. 이 경로에 대해서는 북방 전래설과 남방 전래설이 있어 혼선을 빚어왔다.

아마도 우리나라 기후로 보자면 남부 지방이 벼농사에 적합해서 먼저 벼농사가 시작되었을 것이다. 북방 전래설은 육지를 통한 왕래가 일반적이라는 점에 근거를 두고 있지만 쌀농사가 북쪽까지 확대된 것은 매우 늦은 시기였다는 점에서 문제가 있다. 북쪽을 경유해 남쪽으로 내려왔다면 처음에는 북쪽 지역이 쌀농사를 짓지 않았다는 점이 모순이다. 그리고 아주 이른 시기에 중국의 남방과 배를 통해 왕래했음을 입증하는 자료들도 있다.

또 우리 풍습에는 이 경로를 추측할 귀중한 단서가 있다. 설날에 먹는 가래떡이 바로 그것이다. 가래떡과 같은 모양의 떡을 중국에서는 '닝보 지역의 설 떡(寧波年羔)'이라고 부른다. 닝보는 양쯔강 하류의 쌀 주산지다. 그리고 중국 대다수 지역의 설날 음식에는 이 가래떡과 같은 음식이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는 설날에 가래떡을 넣은 떡국을 먹어야 한 살 나이를 더 먹는다고 여긴다. 두 지역의 같은 풍습으로 보아 우리 벼농사는 이 지역으로부터 전래되었음을 방증한다고 보아야 한다.

때로는 다른 어떤 것보다 풍습의 유사성이 확실한 유래를 전할 수 있다. 풍습은 단시간에 전래되는 것이 아니다. 이국의 풍습이 한 지역에 자리 잡기 위해서는 교류가 꾸준해야만 한다. 그 교류는 단순한 물품이 아닌 사람 사이의 교류도 포함된다.

벼농사의 도입은 단지 볍씨만을 덜렁 가져왔다 해서 해결되는 문제가 아니다. 특히 벼처럼 생장 조건이 까다롭고 주곡으로 중심 위치에 있는 작물이라면 더욱 그렇다. 벼농사를 짓던 사람이 오가며 볍씨뿐만 아니라 농사짓는 법도 알려주었을 테고 이 땅에 와서 살기도 했을 것이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풍습도 전해지고 설날에 가래떡을 먹게 되었을 것이다.

조랭이떡국에 담긴 전설

양쯔강 하류에 살던 이 고마운 사람들 덕분에 우리는 맛있는 쌀밥을 먹게 되었고 하얀 쌀밥이라는 새로운 '로망'을 품게 되었다. 어느덧 그 로망도 과거 일이 되었는지 쌀이 남아도는 시대가 되었다. 이제는 자유무역협정(FTA) 때문에, 짓던 벼농사를 그만두면 돈까지 주는 세상이다. 그래도 우리는 여전히 설날에 떡국 한 그릇으로 한 살을 더 먹게 된다.

가래떡에 관해 작은 여담 하나 더 하자면, 개성 지방의 조랭이떡국은 그 유래가 과연 무엇일까? 조랭이떡국은 일반 우리 떡국과는 달리 가는 가래떡을 토막 내어 잘록한 허리 모양을 하고 있다.

믿기지 않는 이야기지만 이성계가 조선을 세운 다음 이성계를 미워하는 개성의 부녀들이 떡국을 만들면서 가래떡을 그의 목으로 여기고 졸라서 그런 모양을 하게 되었단다. 지금도 보기 싫은 사람이 있거든 설날에 그 사람 목으로 여기면서 조랭이떡을 만들면 마음속의 카타르시스를 얻을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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