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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연못에 퍼진 파문, 큰 물결을 만들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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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연못에 퍼진 파문, 큰 물결을 만들 것

[뷰포인트] 영화 <작은 연못> 리뷰

상업영화적 관점에서 보면 영화 <작은 연못>은 도무지 사람들을 끌만한 구석을 갖추고 있지 못한 작품이다. 그것도 허무맹랑한 토크쇼와 버라이어티만이 판치는 세상에서 갑자기 얼굴에 각을 잡고 1950년대의 한 마을 '노근리'를 살피라는 건, 다분히 시대착오적이라는 소리를 듣기 일쑤다. <작은 연못>은 1950년 7월, 6.25 전쟁 초반에 충청북도 영동군 황간면 노근리 마을에서 미군에 의해 자행된 양민학살사건을 그린 내용이다. '요즘 같은 시대'에 언뜻 듣고서는 일부 사람들이 이건 386의 정치적 강박증의 영화이며 심지어 MB시대에 정면으로 도전장을 내미는 '빨갱이' 영화라고들 할만한 작품이다.

▲ 작은 연못

설혹 그렇게까지 '골통 보수'의 발언까지는 아닐지언정 영화는 웬지 불편할 것이라는 선입견을 준다. 뼈아픈 상처의 역사는 들쑤실수록 아픈 법이니까. 기억하거나 혹은 알고는 있을지언정 되풀이 해서 자꾸 그것을 얘기하고 싶지 않은 것이 사람들의 심사니까. 따라서 <작은 연못>을 보러 간다는 건 결국 역사에 대한 인식과 실천의 문제까지 확대되는 사안일 수 있다. 과거의 역사를 인식하는 것과 그걸 가지고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 가도록 실천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일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영화 <작은 연못>은 그 모든 편견을 뒤집는다는 데에 발칙한 반어법이 담겨져 있는 작품이다. 사람들은 이럴 것이다. "그걸 가지고 이렇게 만들었어?" 영화를 다 보고 나면 상업영화권에서 흔히들 얘기하는, 잘빠진 웰메이드(well-made) 영화 한편을 본 것같아 흡족하고 유쾌한 심정까지 들게 된다. 물론 영화의 내용이 그렇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 잔혹했던 시대의, 굴절의 역사를 부담없는 마음으로 응시하게 한다. 무엇보다 영화는 매우 역설적으로 서정적인데, 돌이켜 보면 지금 이 영화를 보는 관객들, 특히 젊은 관객들에게 마냥 역사적 책임을 부과하게 할 수 없는 노릇이다. 그들로 하여금 좀더 편한 마음으로 과거의 '흉한' 사건을 바라보게 하는 게, 방법론적으로 오히려 옳고 맞다는 생각을 갖게 한다.

▲ 작은 연못

<작은 연못>은 그런 면에서 영리한 영화다. 어쩌면 그건, 오랜 연극연출가로서 명성을 갖고 있지만 지금껏 영화연출을 단 한번도 한 적이 없는 이상우 감독 자체가 영리한 사람이기 때문일 수 있다. 86분이라는 비교적 짧은 러닝타임동안 주요 등장인물이 무려 57명이나 나오는 <작은 연못>은 어쩌면 가분수형 인간의 모습을 한 영화다. 잘못했다가는 인물 한명한명을 설명하는데 시간을 다 허비할 수 있기 때문인데, 이상우는 영화가 시작하자마자 초반부에 그 모든 인물들을 한번에 설명해 내는 놀라운 기교를 부린다. 노름을 좋아하는 민씨가 그와 더이상 살 수 없다며 짐을 꾸린 처를 잡고 집으로 가자고 애원하며 티격태격 걸어가는 긴 논두렁 신에서, 극중 등장인물 모두가 등장하기 때문이다. 마을 지주인 문씨네를 비롯해 개비네와 꾸리네, 자야네의 가족들은 때론 혀를 끌끌차면서 또 때로는 마냥 재밌어 하면서 민씨 부부와 아이들을 만나고 헤어진다. 마을 어른들은 그 중간쯤에서 나름 심각한 척, 바둑을 두면서 어느 나른한 오후에 펼쳐지는 마을 소동극을 중계하고 평가한다. 거기에는 전쟁이나 이념의 광기가 없다. 인생의 한 조용한 편린이 흘러갈 뿐이다.

<작은 연못>은 뛰어나지만 뒤늦게 데뷔하는 영화감독의 작품치고 카메라 촬영기법 면에서도 놀라운 테크닉을 선보이는데 그게 또 이 영화를 보면서 감탄하게 되는 요소다. 영화는 때론 논리가 아니라 직관으로 만드는 것이란 점을 일깨워 주기 때문이다. 인상적인 장면 중의 하나는, 소개 명령을 받고 마을을 떠나 노근리 철길에 다다른 마을 사람들이 미군에 의해 집중 총격을 받는 신이다. 이상우의 카메라는 피난민 행렬의 맨 앞줄부터 헨드 헬드의 트래킹 샷으로 사람들 맨 끝줄까지, 학살의 현장을 담담하고 상세하게 담아 낸다. 연출과 카메라와 주조연이 뒤섞인(아니 아예 없는) 배우들 연기의 합이 최고조로 그 빛을 발하는 장면이다. 지금껏 6.25의 피투성이 현장을 다룬 영화장면 가운데 가장 직설적이면서도 가장 리얼한 장면이라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닐 정도다. 이상우 감독은 이 장면을 단 두번의 테이크에 완성했다고 한다. 그렇게 될 수 있었던 데는 아마도 이 영화를 통해 얘기하려고 한 주제의 진정성을 제작에 참여한 모든 사람들이 공유했기 때문일 것이다. <작은 연못>을 두고 한 개인의 독창적 예술혼에 의해 만들어진 작품이라기 보다 이른바 '집단이성'의 힘에 의해 완성된 영화라고 얘기되는 건 그때문이다. 그렇다면 <작은 연못>은 국내 현대영화사에 중요한 획을 그은 작품이라는 평가를 받을 만하다.

▲ 작은 연못

어스름한 달빛 아래 노근리 마을 사람들의 지친 피난 행렬을 롱 샷으로 잡고서는, 밝혀 가는 별들 사이로 어미 고래와 아기 고래가 밤하늘을 유영하게 하는 판타지 신은 이 영화의 키워드를 담고 있는 장면이다. 아무리 거대한 구조적 폭력이 진행된다 한들 그것을 이기는 길은 또 다른 대응의 폭력이 아니라 바닷 속에서 노니는 어미와 아기고래의 모습마냥 서정성을 회복하는 데서 시작된다는 점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반전(反戰)의 힘은 예술에서 나온다는 것, 지금의 시대에서 우리가 기댈 곳은 새로운 정치나 경제 구조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순수한 자연주의로의 회귀에서 나온다는 것을 강조한다. 근데 그게 지겹고 식상하며 진부한 얘기일 뿐이라고? 작은 연못같은 작은 영화 <작은 연못>에서 당신의 순수성을 되찾아 보기를 권한다. 한 알의 불씨가 광야를 불태우는 법이며 작은 연못에서 시작된 파문이 큰 물결을 만들어 내는 법이다. 한편의 영화가 시대를 바꾸기도 한다. <작은 연못>은 바로 그런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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