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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진실은 디테일에 있다

[철학자의 서재] 다니엘 아라스의 <서양 미술사의 재발견>

살아가면서 우리는 말로 설명하기 힘든 매혹을 느낄 때가 있다. 그 대상이 사람이건, 사물이건, 예술 작품이건 간에, 설명하기 힘든 어떤 매혹의 힘에 이끌려 전공이나 직업을 선택하기도 하고, 친구나 배우자를 선택하기도 한다. 어찌 보면 우리가 살아가면서 하게 되는 중요한 선택의 대부분은 참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이유들로부터 기인한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나의 경우 이 설명하기 어려운 부분들은 대체로 사소하고 작은 것의 외피를 쓰고 나타난다. 아주 미세한 눈빛의 떨림, 우연히 마주한 햇빛과 바람, 어떤 단어나 음악의 선율처럼 사소하게 보이는 것들. 너무 작아서 사소해보이고 또 그것이 무엇인지 설명하기도 어려운 그 무언가 속에 어쩌면 합리적 설명과 판단들을 뛰어넘는 본질적인 무언가가 섬광처럼 드러났던 것은 아니었을까.

순식간에 빛나며 지나갔지만 오래도록 우리 삶에 남아 사로잡았던 그 무언가를 밝히고 싶어 하는 마음은 비단 나만의 것은 아닐 것 같다. 우연히 마주하게 된 <서양 미술사의 재발견>(다니엘 아라스 지음, 류재화 옮김, 마로니에북스 펴냄)에서 이런 비밀을 해명하고자 하는 저자의 마음과 생각을 만났고, 그래서 기뻤다.

▲ <서양 미술사의 재발견>(다니엘 아라스 지음, 류재화 옮김, 마로니에북스 펴냄). ⓒ프레시안
이 책은 그저 서양미술사에 관해 서술하는 일반적인 미술사책이 아니다. 이 책에는 그림들을 마주하면서 저자가 느꼈던 애정과 감동과 비밀스러운 힘들이 지적인 분석과 판단 속에 묻혀 사라져버리는 것이 아니라 그 모든 지적 해명의 원동력으로 작동한다.

지금까지 읽었던 미술 관련 책들에서 만족스러움을 느낀 적이 많지 않았다. 역사적인 맥락에서 작품을 이해할 수 있게 해주거나, 그 작품이 속한 사조의 특징 등 그림에 대한 중요한 정보들을 전달해주는 책들은 많이 있었지만, 어떤 작품이 왜 그토록 매혹적이었는지 설명해주는 책을 본 기억은 거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뭔가 해소되지 않는 듯한 답답함이 늘 남아 있었다.

그 답답함을 날려준 이 책의 저자는 다니엘 아라스이다. 그는 프랑스의 대표적 미술사학자이자 미술 비평가이고, 국내에도 이미 <서양 미술사의 재발견> 외에도 <디테일>, <베르메르의 야망과 비밀>, <명화 속으로 떠나는 여섯 가지 모험> 등 4권이 번역되어 출간되었다. 그 중 <서양 미술사의 재발견>은 저자가 프랑스 라디오에서 대중을 대상으로 한 25회의 강연방송을 사후에 묶어낸 책이다.

대중들을 대상으로 비교적 쉽게 이야기를 풀어가고 있는 이 책이 어떻게 나의 그 오래된 답답함을 날려준 것일까. 그 이유는 아마도 그의 지적이고 세밀한 분석과 더불어 그의 그림에 대한 태도와 학문적 태도 때문이 아니었을까 싶다. 자는 자신이 어떤 그림에 대해 연구하게 된 동기에 대해서 솔직하게 이야기한다. "좋아한다"는 표현을 서슴지 않고 사용한다.

물론 일상생활에서는 무언가를 좋아한다거나 무언가에 매혹당했다는 표현을 쉽게 하지만, 이론적인 분석 대상에 대한 그런 식의 감정적인 표현을 보는 것은 사실 매우 드문 일이다. 필자를 포함하여 대부분의 경우 학문적인 의의나 사회적 함의와 같은 정당화 가능한 이유와 근거들을 통해 자신의 연구를 시작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물론 이런 태도가 잘못된 것은 아니지만, 논리적이고 이성적인 기준에만 갇혀서 자칫 논리 너머에 있는 무언가를 무시하는 태도가 바탕에 깔려있다면 문제일 수 있을 것이다. 다니엘 아라스는 자신이 느꼈던 매혹의 감정을 드러내고, 그것을 출발점으로 치밀한 지적 분석을 수행한다. 그의 이런 솔직한 태도는 지금껏 무시되어 왔던 '감정 혹은 감성'을 복권시키고자 하는 현대 철학자들의 시도와도 일맥상통하지 않을까.

다니엘 아라스는 르네상스 미술 전문가이다. 이 책의 상당 부분 역시 르네상스 미술에 할애되어 있다. 당시의 그림들은 대부분 도상학적인 엄밀성을 바탕으로 그려져 있기 때문에, 의미가 알쏭달쏭한 현대 미술에 비해 해석 가능한 의미들을 더 많이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당시의 모든 그림들은 이야기와 주제를 함축하고 있으며, 많은 경우 종교적인 주제들을 담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림을 보는 사람들에게 그것이 전달하려는 의도를 명백하게 드러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림들 속에는 쉽게 해석되지 않는 무언가가 존재한다. 그림 속에 전개되어 있는 이야기와 주제들에서 감동을 받기는 쉽지 않다. 말하자면 그것은 이해의 대상이지 감동의 대상은 아니다. 그림에서 감동을 받게 되는 부분은 언어로 번역되거나 해석되는 부분을 넘어서 있는 그림 속의 해석되지 않는 비밀과 연결되어 있다.

저자는 바로 이런 부분의 힘을 '그림에 마음이 사로잡히는 것', '작품이 우리를 불러 세우는 것' 혹은 들라크루아의 표현을 빌려 '그림의 침묵의 힘'이라고 표현하면서, 책 전반에 걸쳐 우리에게 감동을 불러일으키는 '그림이 일어서는 순간'에 대해 그림들을 통해 구체적으로 분석한다.

언어적 논리의 영역을 벗어나는 것을 설명하고자 시도한다고 해서 그의 분석이 주관적인 평가나 감상에 치우칠 것이라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오히려 다른 어떤 책들에서보다도 그림 한편 한편에 대한 자세한 분석이 이루어진다. 저자는 미술사, 역사학, 문헌학, 종교학 등 다양한 영역을 넘나들면서 그림에 대한 철저한 분석을 시도한다. 특히 여러 장에 걸쳐 다루어지고 있는 여러 화가들의 수태고지 작품들에 대한 분석에서 나타나는 저자의 학문적 폭과 깊이는 이 책이 대중서라는 사실을 잊게 만들기도 한다.

다니엘 아라스의 논의들을 이제 조금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도록 하자. 그는 관객이 그림을 마주했을 때 가능한 두 가지 종류의 감동에 대해 이야기한다. 첫째, 한순간에 오는 충격적인 감동으로서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순수 감정과 같은 감동이 있다. 예를 들어 마티스의 <춤>과 같은 그림에서 표현된 푸른색을 보았을 때의 느낌은 순수한 감각에서 비롯되는 충격으로서 감각적이고 주관적인 감동이다. 사실 이 주관적인 감동은 분석이나 설명이 거의 불가능해 보이는 그러한 감동이다.

둘째, 계속해서 그림을 보고 생각하는 경험에서 비롯되는 것으로서, 그림을 계속해서 다시금 생각하게 만들고, 그림의 기호적, 상징적 의미들이 겹치고 쌓이고 고찰되고 명상되면서 나타나는 감동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처음 그림을 보게 되었을 때에는 자신이 왜 감동받았는지 설명하거나 심지어 무엇 때문에 감동이 생겨났는지 가리키지 못할 때가 있다. 이러한 감동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그림의 한 면이 들춰지고, 이어 또 다른 면이 들춰지면서 생겨나는 작품의 밀도 있는 내밀함에서 오는 것이다. 점차 작품의 의미에 대해 설명할 수 있게 되지만 이러한 감동 역시 자신의 모든 내밀한 부분들을 다 해명되도록 놓아두지는 않는다. 어쩌면 마음속에서 우러나오는 감정을 표현한다는 것은 도달할 수 없는 아득히 먼 것으로서, 우리로 하여금 계속하여 사유하게 하는 생각의 밀도와 두께라고 할 수 있다. 이 두 번째의 감동은 어디에서 비롯되는가.

그림과 마주했을 때, 우리의 시선은 한꺼번에 전체를 지각할 수는 없다. 어느 특정한 부분에서 시작하여 그림들을 훑어간다. 부분들 사이의 관계들과 부분들이 어떠한 전체 속에 자리하고 있는지를 살펴보고, 그 의미를 해석하고자 시도한다. 시간이 경과하면서 그림은 우리가 아는 지식들과 결합하여 각 부분들의 의미와 전체의 의미들이 윤곽을 드러낸다. 결국 전체를 관통하는 의미의 관계망과 규칙들이 서서히 드러나고 그에 따라 각 부분들의 의미가 포착되기 시작한다.

전체의 의미의 통일성 속에서 우리는 작품을 관람한다. 하지만 우리의 시선이 사로잡히는 곳, 혹은 우리가 감동을 받는 곳이 과연 전체의 통일성인지를 자문해 본다면, 그렇다고 말하기는 힘들 것이다. 우리의 시선을 잡아채어 머물게 하는 것은 반짝이는 머리칼, 펄럭이는 커튼자락 혹은 눈에 잘 띄지도 않게 자리하고 있는 어떤 사물의 이미지일 수도 있다. 다시 말해 감동은 그림 전체의 통일성과도 물론 관계를 맺긴 하지만, 우리를 사로잡는 요소가 의미의 통일성은 아닐 것이다. 해석된 모든 것은 이제 더 이상 신비스러운 비밀을 가지고 있지 않다.

다시 말해 우리로 하여금 어떤 그림을 계속 보도록 만드는 것은 통일적인 의미망으로 포섭되지 않아 언어화되지 않고 끈질기게 남아있는 부분일 것이다. 아라스의 표현처럼, 그림이 관객을 부르고 끌어서 그를 사로잡을 때, 따라서 그림이 효과를 발휘할 때 그림은 스스로 세분화된 관계 속에서 조각으로 지각된다. 전체의 의미망을 벗어나서도 끈질기게 살아남은 부분(디테일) 자체가 어쩌면 전체보다 더 큰 힘을 가지는 것. 아라스에 따르면 이것이 바로 문학이나 음악에 대해서 회화가 갖는 특징이자 우월성이라고 할 수 있다.

좀 더 구체적인 예를 통해 그의 견해를 이해해보자. 아라스는 이 책에서 그림의 원근법적 구성에 대한 자세한 분석들을 하고 있다. 특히 르네상스 시대에 많이 그려진 '수태고지'를 중심으로 원근법적 구성의 의미와 역할에 대해 논의하고 있다. 수태고지가 원근법적 양식을 통해 많은 작품으로 그려진 이유에 대해, 저자는 수태고지에서 이루어지는 (신이 인간의 형상으로 육화되는) 성육화의 순간과 무한을 유한으로 표현하는 원근법적 시각 양식과의 친연성(親緣性) 때문이라고 분석한다.

아라스의 논의는 가능한 한 아나크로니즘을 벗어나려고 한다. 즉 당시의 문헌들과 양식들에 대한 치밀한 연구를 통해 그 시대로 되돌아가 화가가 무엇을 표현하고자 했는지를 분석하고자 시도한다. 섣불리 과거의 그림을 현재와의 연관성에서 논의하는 것은 역사적 의의를 찾는 시도라기보다는, 오히려 역사적인 맥락을 무시하는 논의를 끌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그의 연구는 철저히 역사적이다.

하여간 다시 수태고지로 돌아와, 현대의 우리의 눈에는 그저 단순한 이미지에 불과한 여러 가지 형상들이 당시의 맥락에서 어떠한 풍부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를 꼼꼼히 분석한다. 수태고지에는 두 주인공 가브리엘 천사와 마리아 이외에 기둥, 문, 원주, 회랑 같은 중요한 이미지들이 존재한다. 특히 코르토나에 있는 프라 안젤리코(Fra Angelico)의 <수태고지>와 시에나에 있는 암브로조 로렌제티(Ambrogio Lorenzetti)의 <수태고지>에 등장하는 기둥은 매우 흥미로운 사례를 제시한다.

▲ 암브로조 로렌제티(Ambrogio Lorenzetti)의 <수태고지>. ⓒ프레시안
먼저 로렌제티의 수태고지를 보면 벽면과 천정은 무한을 상징하는 금색으로 칠해져 있고, 바닥면은 흰색과 검은색의 타일로 이루어져 있다. 그리고 천사와 마리아 사이에는 금빛 기둥이 천장과 바닥면을 연결하고 있다. 신성한 것이 유한한 것으로 변하는 신비인 성육화의 순간이 무한이자 정신적인 금빛 천장과 유한이자 물질적인 바닥 타일 사이를 연결하는 기둥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이 기둥은 그저 하나의 장식이나 배경이 아니라 신비의 순간이 이미지로 육화되어 나타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이 기둥이 그림의 구도에서 위치하고 있는 지점을 보자. 원근법적 소실점을 찾기 쉽도록 그려져 있는 바닥면의 타일들로부터 소실점을 찾아나가면, 대략 그림의 중앙에 소실점이 위치하게 됨을 알 수 있다. 바로 그 소실점을 정확히 가리고 있는 것이 천상과 지상을 잇는 기둥이다. 이 기둥은 마리아의 수태를 통해 구현되는 성육화의 신비가 이미지로 드러난 순간일 것이다.

대략 100여년 후에 제작된 그림인 프라 안젤리코의 <수태고지>에서도 이 성육화의 신비가 기둥을 통해 드러난다. 천사의 말과 성모의 말이 그들 사이의 기둥 근처에 금빛 글씨로 쓰여 있다. 천사의 말 전부와 마리아의 거의 대부분의 말은 다 알아볼 수 있게 쓰여 있으나, 마리아의 말 중 성육화의 바로 그 순간을 의미하는 가장 중요한 부분 'fiat mihi secundum(제게 이루어지도록 하소서)'만 쓰여 있지 않다. 기둥 뒤에 가려져 있는 것도, 기둥 색이랑 글씨 색이 비슷해서 보이지 않는 것도 아니다. 그 말은 이미 기둥으로 화한 것이다.

▲ 프라 안젤리코(Fra Angelico)의 <수태고지>. ⓒ프레시안
또한 이 그림의 원근법적 중심점은 마리아와 천사가 있는 공간 바깥의 어두운 잔디밭과 맨 위쪽에 작게 묘사된 아담과 이브의 동산의 경계 지점쯤에 위치한다. 우리의 시선을 모아주는 원근법적 중심점은 아담과 이브의 원죄를 환기시키고 있고, 그 원죄를 대속하기 위해 마리아가 예수를 수태하게 되었다는 것을 그림의 구성을 통해 파악할 수 있다.

또 이 그림에서 대각선이 교차하는 정중앙에는 동정녀 마리아의 방으로 통하는 문이 있고, 어두운 방에 있는 붉은 커튼과 침대 모서리를 볼 수 있다. 그런데 침대가 놓인 바닥면을 건물과 비교해 보면 침대는 구도상 그렇게 높게 놓일 수가 없다. 이것은 단순한 오류가 아니라 동정녀의 몸의 신비는 원근법으로 측정가능한 모든 기준을 벗어나 있기 때문에 원근법적 측정을 일부러 벗어나게 묘사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원근법을 활용한 구성과 구도를 파악해 나가는 저자의 치밀한 분석을 따라가다 보면 마치 추리소설을 읽는 것과 같은 지적인 흥미를 느끼게 된다.

그런데 사실 이 그림에서 흥미로웠던 부분은 성육화의 신비가 드러난 기둥 주변으로 쓰인 글씨에 관한 부분이다. 사실 문맹이었던 당시의 대부분의 관람객들은 쓰여 있는 글씨를 읽어도 이해하기 힘들었을 뿐만 아니라, 작게 쓰인 글씨는 육안으로 확인하는 것조차 힘들었다. 그러므로 얼핏 보아서는 그림에 쓰여 있는 글씨를 통해 이 그림의 핵심적인 이야기로 접근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해 보인다. 관람객에게는 보이지도, 이해되지도 않을 이 세부적인 글은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사실 이 정도의 간략한 분석은 저자가 책에서 행하고 있는 세밀한 분석의 출발조차도 되지 못한다. 또한 아라스의 원근법적 구성 원리를 통한 베르메르의 작품들에 대한 분석은 르네상스 종교화에 대한 분석과는 또 다른 흥미로운 분석들을 제공해 주고 있다.

미술학도가 아니라 철학도인 필자에게 그림의 디테일들에 대한 아라스의 분석이 갖는 의미는 무엇일까.

첫째, 분석 대상에 대한 엄밀하고도 실증적인 분석과 이해이다. 지금 시대는 철학을 연구하는 학자들이 철학책과 논리 안에만 머물러서는 의미 있는 이야기를 하기 어려운 시대이다. 자신이 분석하고자 하는 대상에 대한 구체적인 지식과 앎을 통해 철학이 추상과 구체 사이를 오갈 수 있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아라스의 글은 분석 대상에 대한 아주 꼼꼼한 분석과 연구의 예를 보여주고 있다.

둘째, 감동과 매혹과 같은 주관적으로 치부해버리기 쉬운 동기를 학문의 출발점으로 삼고 있다는 점이 필자에게는 매우 중요한 지점으로 느껴졌다. 이 책에서는 현대 철학에서 많이들 언급하고 있는 이성에 의해 억압되어 왔던 감성의 복권이라는 주장을 느낄 수 있다. 하지만 이 주장은 논리를 통해 전개된 것이 아니라 감성을 출발점으로 하여 감동과 매혹의 실체를 논리적이고 분석적으로 전개해 나가고 있다.

이 점이 바로 바로 아라스 글의 가장 큰 장점이자 매력이라고 생각한다. 이성적이고 논리적인 분석이나 테제가 우위에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이성적이고 논리적인 분석의 출발점이 바로 논리나 언어로 포섭되지 않는 감동, 매혹 그리고 이미지와 같은 감성적인 것이라는 점은 미술사적인 맥락뿐만 아니라 현대 철학적인 맥락에서도 중요성을 띤다고 볼 수 있다.

셋째, 자신이 연구하는 학문에 대한 애정과 성실하고 진지한 연구 태도를 들 수 있겠다. 그는 미술사 전문가임에도 불구하고 르네상스 시기가 아닌 다른 시기(예를 들어 17세기)의 화가에 대한 글을 의뢰받았을 경우엔 자신이 전문가가 아니기 때문에 최소 몇 달에서 몇 년의 시간을 투자해서 그 분야를 연구하고 글을 썼다는 이야기들이 나온다. (대중강연을 모아놓은 글이라 이런 개인적 기억들이 책에 들어 있다.)

사실 우리나라의 경우 아주 많은 수의 학자들이 특정한 분야의 책 한권을 번역하거나 논문 한두 편만으로도 스스로 전문가임을 자처하거나, 심지어 자신의 연구 분야가 아닌 경우에도 마치 다 안다는 듯 수준미달의 책들을 출판하는 경우를 드물지 않게 목격할 수 있다. 전문가가 아주 쉽게 된다는 것. 그것은 그만큼 학문적 풍토의 취약성을 말하는 것이리라. 우리의 이런 상황에서 아라스의 겸손한, 아니 학문에 대한 투명한 태도는 우리나라의 이른바 전문가들이 배워야 할 태도가 아닐까라는 생각이 든다.

마지막으로, 글을 읽으면서 그가 연구를 통해 느꼈던 행복감을 함께 느낄 수 있었다. 물론 이는 대부분의 연구자들이 꿈꾸는 바이지만, 사실 지금의 우리 현실에서 그것은 개인의 노력만으로는 성취되기 힘든 행복이라는 생각이 든다. 시간강사라는 신분적 불안정과 제도권에서 학자로 남기 위해 필요한 많은 제한들을 고려했을 때, 아라스가 연구를 통해 느꼈을 행복은 그저 먼 무지개처럼 아련하게 부러울 뿐이다.

자신의 감동에 솔직한 학자의 성실한 연구를 마주할 때의 감동이 바로 필자가 이 책을 선택하게 되었던 가장 중요한 점이었음을 밝힌다. 필자는 아라스라는 우회로를 통해 지금껏 살아오면서 만나게 되었고, 또 그로 인해 삶의 방향이 바뀌게 되었던, 정말 중요한 삶의 진실일 수도 있는 매혹에 대한 비밀들이 밝혀질 수도 있을 것 같다는 희망을 보았었다는 말로 글을 마치고자 한다.

'철학자의 서재'는 <프레시안>과 한국철학사상연구회가 공동으로 진행하는 서평 연재입니다. 매주 주말 한국철학사상연구회 철학자들이 심사숙고해 선정한 책을, 철학자가 직접 심혈을 기울여 쓴 서평으로 소개합니다.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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