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기 부추긴 박정희 정부…그런데도 경제 대통령?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188> 유신의 몰락, 열아홉 번째 마당

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쉽게 흔들리지 않는 법이다. 사회 전반의 분위기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이른바 진보 세력 안에서도 부박한 담론이 넘쳐나는 이 시대에 역사를 깊이 있게 이해하는 것이 절실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러한 생각으로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를 이어간다. 서중석 역사문제연구소 이사장은 한국 현대사 연구를 상징하는 인물로 꼽힌다. 매달 서 이사장을 찾아가 한국 현대사에 관한 생각을 듣고 독자들과 공유하고자 한다. 열세 번째 이야기 주제는 유신의 몰락이다.

'위대한 경제 대통령'이라는 허상

프레시안 : 젊은 독자들의 상당수는 박정희 집권 말기에 경제 문제가 심각했다는 사실을 잘 모르는 것 같다. 박정희 집권 18년 동안 노동자들에게 병영 같은 작업장에서 저임금 장시간 노동을 강제한 것, 저곡가 정책 같은 것을 통해 농민들을 체계적으로 배제한 것 등의 문제들이 지속된 것에 더해 유신 체제 말기에는 경제 지표 자체도 나쁘지 않았나.

서중석 : 박정희한테 따라붙는 경제, 바로 그 경제가 유신 체제를 붕괴시키는 데 아주 중요한 작용을 했다는 것도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1979년 10·26이 일어났을 때 초·중·고등학교를 다니던 학생들 중 상당수는 '이제 우리나라 큰일 났다. 이 위대한 대통령이 죽었으니 나라가 어떻게 되겠나'라고 하면서 나라의 장래에 대해 절망적인 느낌이라고 할까 두려움, 불안감 같은 걸 가졌다. 일부 여학생들은 울기도 했다. 학생들이 그런 반응을 보인 건 그런 식으로 교육을 받았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박정희가 18년이나 집권하지 않았나. 당시 초·중·고등학생들이 보고 겪은 대통령은 한 사람밖에 없었기 때문에 그 한 사람이 그야말로 위대한 지도자로 비칠 수밖에 없는 면이 있었다.

학생들뿐만 아니라 특히 TV를 열심히 보던 사람들은 '박 대통령이 없으면 우리나라가 어떻게 되는 거냐', 이런 생각을 갖지 않을 수 없었다. 박정희가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수출 목표를 달성하라고 독려하고, 공장을 시찰하고, 높은 수치의 경제 성장률을 달성하겠다고 하고, 물가를 잡겠다고 역설하는 모습이 TV에 참 많이 나오지 않았나. 그런 모습을 보면서 '우리 경제가 전부 박정희 때문에 이렇게 발전하고 좋게 되는구나. 박정희 공로다', 이런 생각을 갖게 된 경우가 많았다. '박정희는 정말 위대한 경제 대통령이다'라고 이 사람들은 믿어 마지않았다.

프레시안 : 경제 실상은 그와 많이 다르지 않았나.

서중석 : 빨리빨리 성장해야 한다고 대통령이 계속 다그치지 않았나. 그런데 유신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그렇게 단기 성장을 목표로 수출 목표 달성 같은 것을 조급하게 독려한 것은 오히려 경제에 해를 끼치기 쉬웠다. 성과주의에 급급해 경제 성장을 외형적으로 보여주는 데 초점을 맞추기가 쉬웠다.

독재자가 국민한테 과시하기 위해 과도하게, 무리하게 경제 성장률을 높이려고 하다가 오히려 경제 전체를 멍들게 하고 경제 성장을 멈추게 할 수도 있다. 또 독재자가 그런 모습을 보이면 관리들이 허위로 보고하는 경우도 많을 수밖에 없다. 목표를 달성하지 못하면 질책을 당하고 쫓겨날 수도 있기 때문이다. 허위 보고와 관련해 대표적인 사례로 들 수 있는 것이 믿기 어려운 농업 통계 같은 것이다. 이처럼 유신 말기에는 정권 안보를 위해 여러 가지 경제 목표를 무리하게 높게 잡았는데, 그것이 오히려 심각한 부작용을 낳고 정상적인 경제 발전에 재앙이 돼버리면서 유신 체제가 몰락하는 데 큰 영향을 끼치는 걸 볼 수 있다.

정치적으로는 인도차이나 사태, 경제적으로는 중동 특수를 유신 체제의 양대 횡재라고까지 얘기할 수 있을 정도로 인도차이나 사태와 중동 특수가 당시 큰 영향을 끼쳤다. 특히 중동 특수는 호박이 넝쿨째 굴러온 것처럼 우리 경제를 좋게 하는 데, 호황으로 가게 하는 데 큰 영향, 직접적인 영향을 끼쳤다. 그렇게 좋은 기회가 있었는데도 유신 말기에 경제는 아주 나빴다.

유신 정권의 무모함과 조급함에 상처를 입을 대로 입은 농촌

ⓒ오월의봄
프레시안 : 그러한 경제 문제가 1978년 12·12선거 결과에도 상당한 영향을 끼치지 않았나. 여권이 도시에서는 말할 것도 없고 텃밭으로 여기던 농촌에서도 쓴맛을 보며 고전한 건 경제 문제와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는 것 아니었나.

서중석 : 12·12선거에서 드러난 농민들의 이반 현상에 상당한 영향을 끼친 것이 노풍(통일벼 계열 신품종) 피해다. 노풍 피해가 발생한 데에는 박정희의 조급하고 과도한 쌀 증산 욕구가 상당한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다.

농민들은 처음에는 통일벼를 다들 안 심으려고 했다. 그러다가 나중에 널리 보급되는데, 정부에서 통일벼 재배를 강제한 것도 작용했지만 더 큰 요인은 이중 곡가제였다. 이중 곡가제를 시행하면서 정부에서 수매할 때 통일벼를 우선 받아준 것에 크게 힘입어서 통일벼는 쌀 증산 그리고 주곡 자급의 상징적인 위치에 서게 된다.

이른바 수확량 4000만 석을 달성했다고 하는 1977년도에는 정부에서 유신벼를 보급했다. 통일벼 품종을 개량한 것이었는데, 이 유신벼가 그해에 상당한 문제를 일으켰다. '마디썩음병'이 발생하면서 소출에 큰 손실이 있게 되는데 특히 경기도에서 피해가 컸다. 유신벼도 통일벼도 일손이 많이 들어가는 등의 문제가 있어서 농민들이 심기 싫어한 것이었는데, 정부에서 심으라고 해서 심었더니만 그런 결과가 나온 것이다.

그런 속에서 1977년 노풍이 나오게 된다. 박정희 대통령은 작물 시험장 책임자인 박노풍의 이름을 따서 노풍으로 불린 새 볍씨에 굉장한 관심을 보였다. 그런데 새로운 볍씨가 나왔으면 실험 단계를 충분히 거치고, 한꺼번에 다 심게 하는 대신 부분적으로 일부 지역에 먼저 심게 했어야 하는 것 아닌가. 그렇지만 그런 것들을 거치지 않았다. 빨리 다수확을 하기 위해 1978년 대대적으로 재배를 강제했다.

김영미 교수가 발굴한 평택의 한 농민, 공화당 당원이기도 했고 이장도 했고 새마을운동 일꾼이기도 했던 이 사람이 쓴 일기에도 노풍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그걸 보면 1978년 봄 정부가 강경하게 신품종을 강제했다고 돼 있다. 어느 정도였느냐 하면, 신품종 조사를 나온 면 직원들이 신품종 이외의 품종을 하는 농가를 발견하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묘판을 파헤쳤다. 그런데 냉해에 약한 이 신품종이 5월 묘판에서 계속 죽어가기 시작했다. 이 농민은 분노했다. 지역적으로 안 맞는 것을 정부에서 권고했고, 정부의 지나친 강요에 어쩔 수 없이 쫓아갔다가 이렇게 실패했다고 본 것이다.

6월이 되니까 벼의 40퍼센트가 죽었다. 염기에 약해서 그렇게 된 것이다. 7월에는 도열병과 문고병이 심해 극심한 농약을 살포해야 했는데, 농약 피해로 이 사람은 앓아누웠다. 심지어 이웃 마을 농민은 사망했는데 이 사람의 일기에는 "전일 농약 치고 약해로 오늘 죽었다고. 참으로 농약 피해가 많다", 이렇게 쓰여 있다. 8월에는 벼멸구 떼가 신품종을 덮쳤다. 그야말로 엎친 데 덮친 격이었는데, "논에서 죽어가는 신품종을 보면서 그의 스트레스는 극에 달했다"고 이 사람의 일기를 토대로 김영미 교수가 썼다.

결국 12·12선거 직전인 1978년 12월 8일 농수산부는 노풍을 1979년부터 당분간 재배하지 않기로 했다고 발표했다. 그렇지만 노풍 피해로 농촌은 이미 상처를 입을 대로 입은 상태였다. 1978년에 78만 명이나 농촌을 떠났다고 돼 있다. 그렇게 이농 현상이 크게 일어났고, 그러면서 박정희 최대 치적이라고 얘기되는 새마을운동이 쭉정이만 남게 된 것 아니냐는 얘기를 듣게 된다. 무모할 정도로 강제로, 너무 급하게, 그것도 대대적으로 심게 했기 때문에 이런 현상이 일어난 것으로 볼 수 있다.

프레시안 : 부가가치세 문제도 중요한 사안 아니었나.

서중석 : 부가가치세도 12·12선거는 물론 1979년 부마항쟁 등에 많은 영향을 끼친 것으로 나온다. 이것도 조금 늦춰서 시행했어야 할 일인데 고도성장을 위한 재정 강화책으로 조급하게 시행한 것 아니냐는 얘기를 들을 수 있다.

김정렴이 회고록에 쓴 걸 보면, 부가가치세 시행을 한 달여 앞둔 1977년 5월 하순에 물가 정책 실무 담당자들이 물가 안정을 이유로 문제를 제기했다. 그해 7월 1일에 부가가치세를 도입하는 것으로 돼 있었는데, 그것에 이의를 제기한 것이다. 사실 이해에도 물가가 계속 솟구치고 있었다. 나중에 발표되는 것이지만 이해에 도매 물가 상승률은 10.1퍼센트, 소비자 물가 상승률은 10.9퍼센트를 기록했다. 주요 경제 단체도 시기상조론을 폈다. 거기서도 물가 억제선, 즉 물가 상승률 10퍼센트를 유지하기 힘들다는 것을 이유 중 하나로 제시했다.

이렇게 물가 정책 실무 담당자들도, 주요 경제 단체에서도 부정적인 의견을 표출한 가운데 박정희 주재 아래 1977년 6월 13일 청와대에서 회의가 열렸다. 이 회의에서도 연기를 지지하는 의견이 다수를 차지했는데도 결국 박 대통령이 단안을 내려서 예정대로 시행하도록 한 것이다. 이런 것도 유신 체제가 아니라면 이렇게 될 수 있었겠느냐고 볼 수 있다.

12·12선거 후 중앙정보부, 공화당 등에서 김정렴 비서실장을 그만두게 해야 한다는 보고를 올렸다고 전에 말하지 않았나. 이것에 대해 김정렴은 그 보고들에서 비서실장을 교체해야 한다고 얘기한 제일 큰 이유가 부가가치세에 대해 논의할 때 '연기하지 말고 시행하자'고 자신이 적극 주장했다는 바로 그 점이었다고 썼다.

(청와대 회의 다음 날인 1977년 6월 14일 자 경향신문은 한 달여에 걸친 부처 간 부가가치세 공방 경위와 뒷얘기를 보도했다. 이에 따르면, 이 사안은 크게 보면 정부 관계 부처와 재계 그리고 여론이 묘하게 얽힌 싸움이었지만 물가 당국인 경제기획원과 세제를 담당한 재무부의 대결이기도 했다. 재무부는 시행 연기도, 13퍼센트로 잡은 기본 세율을 인하하는 것도 있을 수 없다고 강경한 태도를 취했다. 이에 대해 경제기획원의 물가 정책 실무자들은 "선진국에서도 기본 세율은 낮게 잡고 있으며, 물가 충격과 서민 부담을 줄이기 위해 생필품 등에는 부담이 적은 다단계 세율을 적용하고 있다"며 "그런데 우리나라에서는 시행 초기부터 세율이 너무 높고 무차별적"이라고 비판했다.

경제기획원 상층의 기류는 또 달랐다. 6월 7일 경제 4단체장이 남덕우 경제기획원 장관을 방문해 실시 연기 또는 세율 인하를 강하게 요구했지만, 남 장관은 기존 방침대로 강행하겠다고 강조했다. 경제 4단체 쪽에서 "물가를 잡을 자신도 없으면서 어떻게 강행한다는 소리만 하느냐"는 강도 높은 이야기가 나올 정도였다.

그런 가운데 시중에서는 정부가 이야기하는 세율로 부가가치세가 도입되면 물가가 더 크게 오를 것이라는 얘기가 돌면서 일부 물품에 대한 매점매석, 품귀, 가격 앙등 현상이 발생했고 집값도 덩달아 뛰었다. 이런 우여곡절을 거쳐 '7월 1일 시행, 기본 세율은 10퍼센트로 조정'으로 귀결된다. 한편 12·12선거 후 김정렴뿐만 아니라 남덕우도 경제 실패에 대한 책임을 지고 물러나게 된다. '편집자')

초창기 투기의 주인공은 유신 정권이었다

프레시안 : 박정희 집권기 경제를 살필 때 놓칠 수 없는 것이 투기 문제 아닌가.

서중석 : 1970년대 중후반 경제에서 가장 심각한 현상으로 얘기할 수 있는 건 투기라고도 볼 수 있다. 물론 고도성장 자체가 인플레이션을 유발하기 때문에 물가가 높아질 수밖에 없는 면이 있고, 그 점에서 사람들이 가진 돈을 투기 쪽으로 가게끔 하는 면이 있다고 볼 수 있는 점이 전혀 없는 건 아니다. 그렇지만 그 시기에 투기 문제가 그토록 심각했던 건 유신 정권이 경제 성장률을 급속히 높이기 위해 건설 경기를 진작하는 정책을 많이 쓴 것이 기본적으로 작용했다고 볼 수 있다. 건설 경기를 진작하기 위해서는 기업들이 그것에 부응해 막 뛰어들게끔 해야 했고, 그러려면 투기를 부추기는 정책을 안 쓸 수 없었던 것이다.

기본적으로 서민을 위한 주택을 정부 재정으로 건설하려는 생각이 박정희 정권한테는 없었다. 물론 당시 재정이 충분하지 못했던 점도 작용하긴 했을 것이다. 그런데 당시 주택 수요는 엄청날 수밖에 없었다. 이래서 민간 기업들이 대거 주택 건설에 응하도록 하기 위해 정부는 건설 경기를 부양할 수밖에 없었다. 이것이 투기 방조 또는 조장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는 요인이 됐다. 이 경우 투기가 따라붙을 수밖에 없을 뿐만 아니라, 강남 아파트 건설이 단적으로 말해주듯이 건설 기업들은 큰돈이 되는 대형 아파트를 건설하려고 하지 소형 아파트를 건설하려 하지는 않는다. 서민 주택은 건설하려 하지 않았다, 이 말이다. 정부 재정으로는 주택을 충분히 건설할 수 없으니까 엄청난 주택 수요에 맞춰 민간 기업으로 하여금 짓게 한다는 논리였는데, 사실 그게 그대로 되지도 않았다.

투기 문제와 관련된 대표적인 정책이 구획 정리 사업이다. 구획 정리 사업이라는 방식은 박정희가 강력하게 추진했던 경부고속도로 건설 사업에서 이미 나타났다. 건설 사업에 필요한 재원을 충분히 확보하지 못한 정부는 그때 구획 정리 사업을 통해 비용을 조달했다.

프레시안 : 구획 정리 사업을 통한 비용 조달, 구체적으로 어떤 방식이었나.

서중석 : 구획 정리 사업이라는 건 일정한 지역을 대상으로 무질서하게 존재하는 땅을 정부에서 합리적으로 구획하고 도로, 공원, 학교 같은 기반 시설을 건설해 기존 토지의 가치를 높이는 사업을 말한다. 그러면 땅 주인은 이 사업 덕분에 토지 가치가 상승하는 이득을 보게 되지 않나. 그렇기 때문에 땅 주인은 이 사업을 위해 토지 일부를 내놓게 된다. 정부는 그 땅의 일부에 공공시설을 건설해 땅의 부가가치를 높이고, 남은 땅을 소유하게 된다. 무상으로 소유하게 된 이 남은 땅을 체비지라고 얘기한다. 그 체비지를 팔아서 정부는 개발 비용을 충당한다.

강남 개발에서 주로 이런 방식이 많이 활용됐다. 유현 PD는 강남 개발의 경우 구획 정리가 정부 주도형 개발 사업으로 이뤄졌는데, 땅값이 올라야 개발 비용이 나오는 방식이라 정부가 땅값 상승을 원할 수밖에 없었고 개발 지상주의 정책으로는 필연적으로 투기를 불러올 수밖에 없었다고 썼다. 그래서 초창기, 이건 1970년대 중후반을 가리키는데 그러한 초창기 투기의 주인공은 바로 유신 정권이었다고 얘기했다.

어떤 식으로 투기가 조장됐는가를 보자. 경부고속도로 건설 확정 이후 강남 일대에 지정된 토지 구획 정리 지구는 총 900만 평이었는데, 이건 전 세계 도시 계획 사상 유례가 없는 거대한 구획 정리 사업이라고 한다. 여기서 건설 경기를 진작하고 땅값을 올리기 위해 여러 가지 정책이 나타난다.

▲ 1981년 12월 10일, 잠실 주변에서 아파트 등 개발이 한창인 가운데 개발에서 소외된 수서동에 수확한 볏단들이 쌓여 있다. 1970년대 강남 개발이 본격적으로 이뤄지기 전 오늘날 강남 지역의 상당수는 이런 모습이었다. 수서동 역시 얼마 지나지 않아 사진 속 모습과는 전혀 다른 풍경으로 재탄생한다. ⓒ연합뉴스


8학군의 탄생과 '강남 공화국'

프레시안 : 어떤 정책을 썼나.

서중석 : 이때는 강북 사람들이 강남에 이주하는 걸 꺼렸다. 잘 모르는 데니까. 그래서 이런 것에 대한 대책으로 영동 지구 개발 촉진법을 만들고 서울의 중심이 되는 시청, 상공부 등 관청의 강남 이전을 구상했다. (영동 지구는 영등포 동쪽이라는 뜻으로 오늘날 강남을 가리킨다. '편집자') 시청, 상공부를 실제로 이전하지는 않았다. 반대로 강북에는 강력한 개발 억제책이 시행되면서 유흥업소 같은 것들이 억제됐고 그 대신 강남에는 그게 허용돼서 강남이 룸살롱, 카바레로 유명하게 된다고 유현 PD는 썼다.

강남 쪽 건설 경기를 띄우기 위해 지하철 노선도 바꿨다. 그 당시 서울 인구는 대부분 강북에 살지 않았나. 당연히 그쪽 수요가 많을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지하철 2호선을 건설할 때 처음에 나온 안은 강북 중심의 일자형(왕십리와 영등포를 직선으로 잇는 노선)을 취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걸 버리고 구자춘 서울시장의 주장에 따라 강남을 통과하는 순환선으로 결정했다.

아주 중요한 게 또 있다. 우리가 8학군, 8학군이라고 그 후 참 많이 사용하는데, 강북에 있던 이른바 명문고들을 강남으로 다 이전시켰다. 그러면서 소위 신흥 명문 학군이라는 8학군이 생기게 되는데 이것도 강남 투기 분위기를 얼마나 높였겠는가, 이 말이다.

그러면서 땅값, 아파트 값이 강남에서 천정부지로 뛰게 된다. 1974년경부터 강남 아파트 투기 바람이 불었는데, 거기에다가 1976~1978년에 중동 특수로 큰돈이 유입되면서 강남 투기 열풍은 투기 광풍으로 바뀐다.

전국의 지가가 1976년에 26퍼센트, 1977년에 34퍼센트 올랐는데 1978년에는 무려 49퍼센트나 올랐고 특히 서울은 135.7퍼센트로 투기 역사상 또는 지가 역사상 기록적이었다. 이것 가운데서도 강남의 경우는 아주 심했다. 1963년부터 1979년까지 강남구 학동의 지가는 1333배, 압구정동은 875배, 신사동은 1000배 올랐다고 한다. 그러면서 말죽거리 신화가 얘기되고 8학군이 위세를 떨치는 그런 때가 오게 되는 것이다. 또한 '강남 특별시', '강남 공화국'이라는 말까지 나오게 된다. 그런데 같은 기간에 강북을 보면 중구 신당동, 용산구 후암동의 경우 지가가 25배밖에 오르지 않았다.

프레시안 : 오늘날 이런저런 조사 결과를 보면 돈이 없어서 결혼을 못한다는 응답이 꽤 높게 나오는 경우가 있다. 그런 응답을 할 수밖에 없게 만든 사회 문제 중 하나가 부동산 투기다. 투기꾼 천국이라는 말이 심심찮게 나올 정도로 투기가 오랫동안 성행하면서 말 그대로 '미친 집값'이라는 결과를 낳았기 때문이다. 박정희 정권을 거치면서 한국 사회가 그렇게 변했다는 점은 박정희 평가에서 두고두고 염두에 둬야 할 대목이라는 생각이 든다.

서중석 : 그렇게 투기 광풍이 벌어져서 이제는 유신 체제 자체를 위협하게 되니까 박정희는 1978년 8월 8일에 가서야 부동산 투기 억제 및 지가 안정을 위한 종합 대책이라는 걸 발표했다. 8·8 조치라는 건데, 부동산 양도세를 강화하고 토지 거래 허가 제도를 실시하고 전매를 제한하는 정책을 썼다.

그러나 투기로 이미 큰돈을 벌었고, 이런 제약이 있다고 하더라도 아파트 추첨에 당첨만 되면 여전히 큰돈을 벌 수 있는 상황에서 투기꾼들이 가만히 있을 리가 없었다. '한국에서 투기는 어떤 권력도 잡을 수가 없다'고 할 정도로 1970년대 후반부터는 투기가 계속해서 성하게 된다. 1980~1990년대에도 투기는 심했고 2000년대에 들어서도 계속 나타나는 걸 볼 수 있다.

역사학자 서중석의 진단

☞ "박근혜는 유신의 허깨비가 결코 아니었다"

☞ "박정희 신드롬, 박근혜가 지울 수도 있다"

☞ "<조선> 말대로면, 이명박·박근혜 정부는 빨갱이"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백여든아홉 번째 편도 조만간 발행됩니다.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1·2권 서평 바로 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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