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명 사망 삼청 교육…가해자들은 바로 풀려났다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210> 12·12쿠데타와 오월 광주, 열아홉 번째 마당

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쉽게 흔들리지 않는 법이다. 사회 전반의 분위기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이른바 진보 세력 안에서도 부박한 담론이 넘쳐나는 이 시대에 역사를 깊이 있게 이해하는 것이 절실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러한 생각으로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를 이어간다. 서중석 역사문제연구소 이사장은 한국 현대사 연구를 상징하는 인물로 꼽힌다. 매달 서 이사장을 찾아가 한국 현대사에 관한 생각을 듣고 독자들과 공유하고자 한다. 열네 번째 이야기 주제는 12·12쿠데타와 오월 광주다.

영장 없이 6만여 명 체포, 3만9000여 명에게 '순화 교육' 강제

프레시안 : 이번에는 국보위에서 시행한 대표적인 사업으로 꼽히는 삼청교육대 문제를 짚었으면 한다. 일각에서는 삼청교육대를 사례로 들며 '전두환이 다른 건 몰라도 깡패 문제는 확실하게 처리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 '검은 과거 씻는 참회의 땀방울…인간 재생'이라는 제목으로 삼청 교육을 왜곡·미화한 1980년 8월 13일 자 동아일보 7면 기사. 이 시기를 전후해 동아일보뿐만 아니라 각종 일간지, 방송사들이 삼청 교육 현장을 찾아 왜곡 보도를 쏟아냈다. ⓒ동아일보
서중석 : 삼청교육대는 전두환·신군부의 인권 유린과 잔혹함을 상징하는 사안이다. 그러한 삼청교육대 문제로 가보자. 당국은 1980년 8월 1일부터 12월 29일까지 6만755명을 체포했다. 원래 2만 명 정도 체포할 것이라고 했는데 그것의 무려 3배나 체포한 것이다. 그것도 법원이 발부한 영장도 없이 그렇게 했다.

이 중 3252명이 재판에 회부됐고 1만 7761명이 훈방 등의 조치를 받았다. 이 사람들을 제외한 3만9742명이 1980년 8월 4일부터 1981년 1월 21일까지 11차에 걸쳐 전국 각지의 군부대에서 소위 순화 교육이라는 걸 받았다. 이 순화 교육을 받은 사람들을 삼청 교육을 받은 사람이라고 하고, 그래서 순화 교육과 관련된 사건을 삼청교육대 사건이라고 부른다. 국보위 상임위원장인 전두환의 재가를 얻어 이렇게 처리된 것이다.


(국방부 과거사위의 2006년 발표와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 위원회'의 2010년 상반기 조사 보고서에 따르면, 전두환은 국보위 사회정화분과위원회에서 입안한 '불량배 소탕 계획(삼청 계획 5호)'을 1980년 7월 28일 결재하고 그다음 날(7월 29일) 계엄사령부에 하달했다. 이에 따라 삼청 교육의 근거가 되는 계엄 포고 제13호가 8월 4일 발령됐다. 계엄 포고 제13호는 국무회의에 부의(附議)되지도 않은 채 시행되는 등 적법 절차를 거치지 않았고, 헌법이 규정한 죄형 법정주의에도 어긋났다. '편집자')

삼청이라는 이름이 생긴 건 이걸 주관한 국보위 사회정화분과위원회가 종로구 삼청동에 있었던 것과 관련 있다고 한다. 국보위 사회정화분과위원회에서 소위 불량배 소탕 계획에 따라 전반적인 사항을 통제했는데, 그 작업에 삼청 계획이라는 이름을 붙이면서 삼청 교육으로 불리게 됐다고 그런다.

중학생부터 70대까지 닥치는 대로 잡아들인 전두환·신군부

프레시안 : 쿠데타로 권력을 훔친 다음 사회악을 일소하겠다고 목청을 높이며 이른바 불량배를 쓸어버리겠다고 나서는 건 1980년 전두환·신군부뿐만 아니라 1961년 박정희를 중심으로 한 5·16쿠데타 세력도 보인 모습이다. 국보위 사회정화분과위원회가 삼청 계획을 만들 때 5·16쿠데타 직후 상황을 참고한 것으로 돼 있는데, 여러 가지를 생각하게 만드는 대목이다.

서중석 : 박정희의 5·16쿠데타 이후에도 소위 깡패 단속이라는 걸 대대적으로 벌였다. 이정재를 비롯한 주요 깡패들을 서울 시내에서 행진을 시키면서 조리를 돌리기도 하지 않았나. 사실 이승만 정권 때 활개를 치던 깡패들을 대거 잡아들이기 시작한 건 1960년 4월혁명 후 허정 과도 정부 때다. 4월혁명으로 깡패 시대는 사실상 끝난 것이었고 5·16쿠데타 정권이 깡패를 잡아들인 것은 그렇게 대단한 건 아니라고 볼 수 있는데, 5·16쿠데타 세력이 깡패들한테 거리 행진을 시키고 한 것이 당시 사람들 눈에 확 들어온 측면이 있다.

1980년 국보위 사회정화분과위원회가 소위 불량배 소탕 계획을 만들 때 5·16쿠데타 이후에 있었던 국토건설단을 참고한 것으로 돼 있다. 당시 박정희 군사 정부는 국토건설단으로 1만6000여 명을 동원할 계획이라고 발표했는데, 실제로 동원한 인원이 얼마였는지에 대해서는 연구자에 따라 견해 차이가 난다. 1만6200여 명이라고 보는 사람도 있고, 1만4900여 명이라고 보는 사람도 있다. 1980년에 삼청 교육과 관련해 체포한 인원 6만여 명은 5·16쿠데타 이후에 국토건설단으로 동원한 인원의 4배 정도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이 국토건설단으로 간 사람들의 다수가 소위 불량배 또는 부랑아였던 건 아니다. 여기에 동원된 사람들의 다수는 병역 기피자들이었고 직업을 가지고 있는 경우가 많았다. 교사, 공무원 등 당시 고학력자로 분류되던 사람들도 상당수 포함돼 있었다.

하여튼 삼청 교육 관련 포고로 발령된 것이 1980년 8월 4일에 나온 계엄 포고 제13호다. 그런데 체포 작업은 그 이전인 8월 1일부터 이뤄졌다. 계엄 포고 제13호 자체도 문제가 많은 것이었지만, 그것조차 지키지 않은 것이다. 법령이라는 걸 제대로 지키는 사람들이 아니지 않았나.

그러면 어떤 사람들이 잡혀갔느냐. 체포된 6만755명을 분류한 것을 보면, 폭력으로 분류된 사람이 4만9066명으로 80퍼센트가 넘었다. 그런데 이 경우 언제, 어떤 범죄를 저질렀느냐 등이 구체적이지 않았고 그런 속에서 '재범 우려자', '주민 지탄을 받는 자'라고 돼 있는 사람들을 잡아들여 폭력으로 분류한 것으로 나와 있다.

체포된 사람들 중 순화 교육이라는 걸 받은 3만9742명도 대부분 폭력으로 분류된 사람들이다. 그런데 체포된 사람들을 보면 13세 소년에서 70대 노인까지 골고루 있었고 군 장성, 언론인, 노조원, 대학생은 물론 중·고등학생까지 포함돼 있었다.

여기서 군 장성이 무슨 소리냐, 이상하다고 할는지 모르지만 이건 바로 보안사령관을 지낸 강창성을 가리킨다. 강창성은 1973년 윤필용 사건을 박정희 지시로 조사하면서 군 사조직인 하나회를 대대적으로 수사하지 않았나. 전두환·신군부가 그것에 앙심을 품고 보복을 한 것이다. 그래서 나이도 많이 먹었고 이미 예편한 강창성을 연행해 삼청 교육을 받게 한 것이다.

(1988년 치안본부가 국회 5공 특위에 제출하기 위해 마련한 자료에는 삼청 교육을 받아야 했던 사람들을 직업별로 분류한 내용이 담겨 있다. 고교생 980명, 대학생 429명, 교원(교수 포함) 13명, 공무원 32명, 언론인 36명, 의사 7명, 약사 3명, 축산업자 55명 등으로 분류돼 있다. 처음에 치안본부는 '삼청 교육 이수자 명단을 모두 파기해서 숫자 파악이 불가능하다'고 오리발을 내밀었지만, 그 명단이 치안본부에 보존돼 있다는 사실이 국정 감사에서 드러나자 뒤늦게 이 자료를 마련했다.

그런데 이 가운데 고교생 부분을 보면, 10대인 고교생이 그토록 많이 들어가 있었던 것도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지만 '고교생 980명'은 정확한 통계가 아니었다. 국방부 과거사위에 따르면, 이 980명 중 17명은 중학생이었다. 또한 국방부 과거사위는 '불량배 소탕'이라는 명분과 달리 체포된 사람들 중 35.9퍼센트는 전과 사실이 전혀 없었다고 밝혔다. '편집자')

극심한 가혹 행위와 인간 이하 취급으로 사망자 속출

프레시안 : 삼청 교육, 어떻게 진행됐나.

서중석 : 삼청 교육은 아주 특이하게 운영됐다. 국방부 과거사위 보고서에 의하면, 오전 6시에 기상하게 해서 오후 6시까지는 순화 교육을 진행했다. 오후 6시 이후에는 어떠했느냐. '구치소'에서, 국방부 과거사위는 '구치소'라는 표현을 썼는데, 밤 10시부터 자정까지 2시간 취침시킨 다음에 깨워서 훈련을 시키고 다시 잠깐 눈을 붙이게 하는 걸 2시간 간격으로 반복했다. 예컨대 자정에 기상을 시켜서 30분간 PT 체조, 팔 굽혀 펴기, 쪼그려 뛰기 등 심한 육체적 고통을 주는 특수 훈련을 시킨 다음 1시간 30분 후에 다시 일어나게 했다. 그런 식으로 자정, 오전 2시, 오전 4시에 깨운 것이다. 그런 일이 오전 6시까지 세 차례에 걸쳐 반복됐다.

그러니까 밤 10시부터 자정까지 2시간 동안만 그래도 좀 편안하게 눈을 붙일 수 있게 하고 나머지 시간에는 편하게 잠자는 것도 어렵게 만든 것이다. 순화 교육에서 휴식 및 자유 시간은 일절 허가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취침 시간에도 이런 방식으로 제약을 가했다.

삼청 교육이라는 건 아주 심한 가혹 행위의 연속이었다. 구타, 얼차려 같은 걸 통해 육체적 고통을 주는 일이 계속됐다. 일종의 고문 행위와 비슷할 정도로 고된 것이었기 때문에 사망자, 부상자가 속출했다.

특히 입소 당일에는, 일종의 기선 제압용으로 하는 것이었겠지만, 강한 훈련과 구타가 있어서 입소 후 3일 이내에 발생한 사망 사건이 12건으로 나타나 있다. 삼청 교육 전 과정에서 발생한 사망자는 54명으로 돼 있는데, 이 중 절반이 넘는 28명이 순화 교육 과정에서 사망할 정도로 아주 가혹한 훈련을 시켰다. 사실 54명은 공식 사망자이고 이것 말고도 많은 사망자가 있다고 하는데, 그건 누군지 명단도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기 때문에 여기서는 일단 공식 사망자 54명을 가지고 이야기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이 54명을 보면 그중 36명은 병으로 죽은 것으로 처리됐고 단 10명만 구타에 의한 사망으로 돼 있는데, 여러 증언을 보면 이보다 사망자가 훨씬 많을 수 있다고 볼 수도 있다. 예컨대 경기도 파주의 1사단에서 삼청 교육을 담당한 한 조교는 자신이 속한 연대에서만 11명이 사망했다고 하는데 모두 구타로 인해 사망했고 다 암매장했다고 증언했다고 한다. 사망자 대부분은 가족이나 연고자가 없는 노숙자 또는 부랑인이어서 그것에 항의할 사람도 이제는 없는 셈이다. 그런데 국방부가 발표한 1사단 사망자는 3명으로 돼 있다. 이런 식으로 차이가 난다고 채환규 PD가 쓴 글에 나온다.

순화 교육은 남성만 받은 게 아니라 여성도 받았다. 1차 입소자로 입소한 여성이 273명이었고 2차로 46명이었는데 1차는 3주간, 2차는 2주간 순화 교육을 받았다. 이렇게 319명의 여성이 순화 교육이라는 걸 받아야 했는데, 이 가운데 217명은 전과가 없는 사람이었다.

순화 교육을 받은 사람 가운데에는 민주 노조 활동을 한 사람들도 포함돼 있었다. 1980년 당시 원풍모방 노조 총무부장이었던 사람의 증언에 따르면, 소위 노동계 정화 차원으로 합수부에 끌려간 민주 노조 간부 중 일부는 강제로 사직서를 제출해야 했고 그러면서 원풍모방을 비롯해 1970년대 민주 노조 운동에 앞장섰던 노조 간부 22명이 삼청교육대에 끌려가 4주간 순화 교육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노조 활동가를 비롯해 독재 권력을 비판해온 이들을 표적으로 삼아 삼청교육대에 끌고 가는 경우도 많았지만, 사회 운동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사람들을 마구잡이로 끌어가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각 경찰서에 인원을 할당한 것에 더해 '주민 지탄을 받는 자' 식으로 대상자를 모호하게 규정한 점 등이 작용해 벌어진 일이다. 심지어 짜장면 내기 화투판을 구경하던 사람을 끌고 가거나 사적으로 악감정을 품은 사람을 '삼청교육대에 보내라'고 고발하는 등의 어처구니없는 일이 곳곳에서 생긴 것도 그 때문이다. '편집자')


▲ 이른바 목봉 체조를 하는 삼청교육대원들의 모습. ⓒ연합뉴스

지옥 같은 삼청 교육 후 닥친 또 다른 재앙, 보호 감호 처분

프레시안 : 전두환·신군부는 사회악 일소, 사회 정화를 명목으로 삼청 교육을 밀어붙였다. 그런데 이들의 행적을 살펴보면 과연 사회 정화를 운운할 자격이 있는 자들이었나 싶다. 어쨌건 그렇게 해서 수많은 사람이 삼청교육대에 끌려갔는데, 삼청 교육이 끝난 후에도 고통은 계속되지 않았나.

서중석 : 삼청교육대에 끌려간 사람들 가운데 상당수는 삼청 교육을 받은 후에 또 보호 감호 처분을 받았다. 순화 교육 자체가 정말 있을 수 없는 인권 유린이었는데, 그것에 더해 보호 감호 처분까지 받은 것이다.

사회보호법은 1980년 12월 18일 제정됐는데, 이건 국가보위입법회의에서 만든 악법이다. 죄를 범한 자로서 재범 위험성이 있고 특수한 교육, 개선 및 치료가 필요하다고 인정되는 자에 대해 보호 처분을 해 사회 복귀를 촉진하는 법이라고 내걸었지만, 실상은 그와 달랐다. 특히 전과자들에 대해 아주 가혹한, 죄형 법정주의를 넘어선 처벌을 가하는 악법으로 알려져 비판을 계속 받게 된다.

삼청 교육 피해자들이 그러한 사회보호법의 또 다른 대상이 된 것이다. 사회보호법 부칙 제5조 1항에 순화 교육을 받은 사람 중 재범 위험성이 있다고 인정되면 일정 기간 동안 또 보호 감호에 처할 수 있다는 조항이 있었다.

1981년 1월 16일 사회보호위원회는 삼청 교육 관련자 중 7578명에 대해 보호 감호 처분을 내렸다. 그런데 아직 감호소 건물이 신축되지 않았기 때문에 군 시설을 대신 사용했다. 그러다가 1981년 12월 2일 청송보호감호소가 신축되자 그 직후 여기로 2416명을 이송했다.

그러니까 사회보호법을 먼저 만들어놓고 그다음에 청송보호감호소를 세운 건데 감옥 못지않은, 그것과 사실상 똑같은 것에 감호소라는 이름을 붙여놓고 거기에 사회보호법이 적용된 사람들을 가둔 것이다. 그중에는 지금 말한 것처럼 삼청 교육을 받은 사람들도 들어 있었다.

(삼청 교육 후 보호 감호 처분을 받은 사람들은 그 과정에서 재판 한 번 받을 수 없었다. 재판 같은 절차도 없이 1~5년의 보호 감호 처분을 당국이 정하면 그대로 따라야 하는 상황으로 내몰렸다. 아울러 청송보호감호소는 그 후 '격리된 절해고도'로도 불리며 인권 사각지대로 악명을 떨치게 된다.

삼청 교육 이외에 감당해야 했던 고통은 보호 감호 처분만이 아니었다. 삼청 교육 대상자 중 순화되지 않았다고 당국이 지목한 사람들은 전방 부대에서 근로 봉사라는 걸 해야 했다. 구타와 얼차려 등 가혹 행위를 당하며 근로 봉사를 해야 했던 사람은 1만 16명에 달한다.

국보위에서는 삼청 교육을 마치면 기록을 말소하겠다고 약속했지만, 그것 역시 거짓말이었다. 삼청 교육을 받은 사람들의 기록은 경찰로 고스란히 넘어갔다. 경찰은 범죄 수사용이라는 명목 아래 노태우 정권 초기까지 그 자료를 활용했다. 그뿐 아니라 거주 지역의 동사무소, 면사무소에도 관련 기록이 따라다니며 삼청 교육을 받은 사람들을 계속 괴롭혔다. '편집자')

삼청 교육 후 20년이 넘도록 국가는 피해자들을 외면했다

ⓒ오월의봄
프레시안 :
부당하게 삼청교육대에 끌려가 고통을 겪은 이들에 대해 국가는 어떤 조치를 취했나. 피해자들의 망가진 인생을 온전한 상태로 되돌릴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국가의 이름으로 사과하고 그 상처를 어루만지는 건 당연한 일 아닌가.

서중석 : 삼청 교육을 받은 사람들의 피해는 아주 심각한 문제였기 때문에 전두환이 대통령에서 물러날 즈음, 그러니까 1987년 6월항쟁 이후에 문제가 됐다. 그런 속에서 대통령에 취임한 노태우가 1980년에 공직자로 해직된 자, 광주민주화운동 관련자 등과 함께 삼청 교육으로 인권 침해를 당한 사람들에 대해 피해 보상 및 명예 회복을 시켜주겠다고 약속하는 특별 담화를 1988년 11월 26일 발표했다.

그에 따라 삼청 교육 관련자들에게 피해자 신고를 받았다. 삼청 교육 과정에서 발생한 공식 사망자가 54명이라고 앞에서 말했는데, 이때는 그러한 사망으로 52명의 신고가 접수됐다. 그 외에도 삼청 교육 후유증을 앓다가 사망한 397명, 행방불명 4명, 삼청 교육으로 인한 상이자, 즉 다친 사람들 2768명 등 총 3221명이 피해 신고를 했다.

이처럼 대통령이 특별 담화를 발표하고 그에 따라 피해 신고도 접수했지만, 후속 조치는 여러모로 부실했다. 피해 보상도, 명예 회복도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 2000년대 초반까지 그런 상태였다가 노무현 정부에 들어와서 '삼청교육대 피해자의 명예 회복 및 보상에 관한 법률'이 제정됐다. 그것에 따라 2004년 9월 16일부터 2005년 7월 30일 사이에 다시 삼청 교육 피해자들을 대상으로 명예 회복 및 보상금 신청을 받았다. 그 결과 4644명(교육 중 사망자 44명, 후유 사망자 884명, 상이자 3697명, 행불자 19명)이 신청을 했다. 이 가운데 68.4퍼센트인 3177명이 2006년 11월 초까지 보상 결정자로 처리됐다. (2015년 2월 기준으로 4644명 중 994명은 신청이 기각됐다. 신청이 인용된 3650명 중 3518명에게는 보상금 등이 지급됐고 132명의 경우 시효 문제로 소멸됐다. '편집자')

이러한 삼청교육대 문제에 대해 일각에서는 '깡패를 시원하게 척결했다'는 식으로 오랫동안 받아들인 것으로 보이는데, 그렇게 생각할 문제가 아니다. 지독한 인권 유린이 있었다는 점을 깊이 생각할 필요가 있다.

(후유증으로 인한 사망자까지 포함하면 삼청 교육 희생자는 400명이 넘는다고 볼 수 있다. 피해자들은 기나긴 시간 동안 고통 속에서 몸부림쳐야 했지만, 가해자들에 대한 처벌은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 이와 관련, 한국일보는 삼청교육대인권운동연합이 발간한 <2001 삼청교육대 백서>를 바탕으로 "1980~1981년 삼청교육대에서 민간인 3명을 폭행 치사한 군인 7명이 군법회의에서 유죄가 확정돼 실형 판결을 받았지만 정호용 씨 등 당시 소속 부대 지휘관에 의해 형 집행이 면제된 사실이 당시 군법회의 판결문 등을 통해 밝혀졌다"고 2002년 1월 4일 보도했다. 이에 따르면 당시 민간인을 숨지게 한 군인 8명에게 1년 6개월에서 4년의 징역형이 선고됐지만, 집행 유예가 선고된 1명을 제외한 7명은 군법회의 관할관인 부대 지휘관 재량으로 열흘 이내에 형 집행 면제 처분을 받았다. 그중에는 판결 다음 날 풀려난 경우도 여럿 있다.

일선에서 삼청 교육 대상자들을 직접 다룬 실무자들뿐만 아니라 삼청 계획을 만들고 실행한 윗선도 제대로 처벌을 받지 않았다. 중앙정보부 감찰실장으로 국보위 사회정화분과위원장을 맡았던 김만기를 비롯한 몇몇 인사가 노태우 정권 초기에 국회 5공 특위 증인으로 출석해 추궁을 받은 정도였다. '인간 재생', '악으로 얼룩진 과거를 씻고 새 사람이 되는 곳', '개과천선의 장' 등으로 삼청 교육 현장을 묘사하며 왜곡 보도를 쏟아냈던 다수의 언론이 반성하는 모습도 찾아볼 수 없었다.

상황이 이러했기 때문에 30여 년이 지난 박근혜 정부에 들어와서도 삼청교육대 문제는 불거질 수밖에 없었다. 2015년 초 세간의 관심을 모은 이완구 국무총리 후보자의 삼청교육대 관련 의혹이 대표적인 사례다. 삼청교육대 관련 의혹 등 여러 문제점이 제기됐지만 이완구 후보자는 총리가 됐다. 이완구 총리를 끌어내린 건 삼청교육대 관련 의혹이 아니라 성완종 리스트였다. 이에 앞서 2014년에는 교육부가 EBS 수능 교재에서 삼청교육대 관련 내용을 제외하라는 지시를 내렸다는 보도가 나오기도 했다. 박근혜 정부에서 삼청교육대 문제를 어떻게 바라보는지를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만든 사안들이다. '편집자')

역사학자 서중석의 진단

☞ "박근혜는 유신의 허깨비가 결코 아니었다"

☞ "박정희 신드롬, 박근혜가 지울 수도 있다"

☞ "<조선> 말대로면, 이명박 · 박근혜 정부는 빨갱이"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이백열한 번째 편도 조만간 발행됩니다.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1·2권 서평 바로 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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