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살 직후 격려금 준 전두환, 학살과는 무관하다?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206> 12·12쿠데타와 오월 광주, 열다섯 번째 마당

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쉽게 흔들리지 않는 법이다. 사회 전반의 분위기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이른바 진보 세력 안에서도 부박한 담론이 넘쳐나는 이 시대에 역사를 깊이 있게 이해하는 것이 절실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러한 생각으로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를 이어간다. 서중석 역사문제연구소 이사장은 한국 현대사 연구를 상징하는 인물로 꼽힌다. 매달 서 이사장을 찾아가 한국 현대사에 관한 생각을 듣고 독자들과 공유하고자 한다. 열네 번째 이야기 주제는 12·12쿠데타와 오월 광주다.

공수 부대의 만행은 전두환·신군부 시국 수습 방안의 일환이었다

프레시안 : 1980년 5월 광주에서 유혈 사태를 일으키고 키운 자들의 책임 문제를 더 살폈으면 한다. 그 문제에서 빼놓을 수 없는 사람이 전두환 아닌가.

서중석 : 광주항쟁에서 가장 큰 쟁점은 유혈 사태, 공수 부대의 만행이 전두환에 의해서 일어난 것이 아니냐는 것이다. 항쟁 당시 광주 시민들이 주장했던 바이고 그 이후에도 꾸준히 그런 주장이 있어왔다. 그렇지만 전두환은 '나는 보안사령관으로서 정보 수집, 수사만 했다. 광주사태 진압과는 명령, 지휘 계통이 다르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광주 학살에 책임이 없다', 이러한 태도로 일관해왔다. 이 두 가지 주장을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하는 문제다.

먼저 생각할 것은 공수 부대가 광주에 왔다는 것 자체가 유혈 사태 등 엄청난 피해를 초래하게끔 돼 있었다는 점이다. 영화 같은 걸 봐도 그렇고 이런저런 다른 자료를 통해서도 느낄 수 있는데, 한국뿐만 아니라 다른 나라에서도 공수 부대의 그런 면이 보이더라.

유신 말기 부마항쟁이 일어났을 때 박정희 정권이 부산에 공수 부대를 투입한 것과 연관해서 생각해볼 필요도 있다. 부산에서 시위가 사실상 거의 끝날 무렵인 1979년 10월 18일에 투입됐는데, 공수 부대가 그때 어떤 짓을 저질렀느냐 하는 것은 부산 사람들이 똑똑히 기억하고 있는 사항이었다. 대검을 꽂은 총을 앞세우고 돌진해 닥치는 대로 총을 휘두르지 않았나. 그런 공수 부대가 그로부터 일곱 달 후 광주에 온 건데, 광주에서도 심한 짓을 할 것이라고 짐작할 수 있었다.

그뿐 아니라 특전사는 이미 1980년 2월에 충정 명령이라는 이름 아래 강력한 '폭동' 진압 훈련을 실시했다. 지옥 훈련을 통해 인간 폭탄이라고 부를 수도 있는 상태로 만들고, 정신 교육까지 겸해서 상대방, 이걸 적이라고 표현할 수도 있는데 그런 쪽을 어떤 식으로 타격할 것인가를 훈련했다. 그리고 전두환·신군부의 핵심 인물이던 노태우, 정호용 등이 참석해 1980년 3월 6일부터 열린 충정 작전 회의에서 군 투입이 필요한 사태가 발생하면 강경한 응징 조치를 취하겠다는 이야기가 오가지 않았나.

이러한 점들도 생각해야 하지만, 이런 것을 넘어서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광주에서 공수 부대가 한 행위는 전두환·신군부의 시국 수습 방안의 일환으로 일어났다는 점이다. 그 점이 가장 중요하다고 볼 수 있다. '거의 모든 국민이 민주화를 열망하고 있는데 5·17쿠데타로 그러한 민주화 열망을 무산시키면 많은 학생, 시민들이 반발하고 투쟁과 시위를 할 것이다', 그런 예상 아래 서울과 광주 등 중요 지역에 공수 부대를 비롯한 병력을 이미 배치한 상태였다, 이 말이다. 그리고 그런 시위가 일어나면 무자비한 진압, 그러니까 시위대 해산 정도가 아니라 시민들을 공포로 몰아넣는 무자비한 타격을 가할 계획을 세워놓고 있었다.

그렇게 해놓고 5·17쿠데타를 일으켰는데, 서울에서는 시위가 일어나지 않았다. 그런데 광주에서는 규모가 크진 않지만 어쨌든 1980년 5월 18일 오전에 시위가 일어났다. 그러자 광주를 표적으로 삼아 집중하게 된 것이다. 광주가 시국 수습 방안의 일환으로 짜인 계획의 표적이 된 것이다. 그래서 경찰로 얼마든지 해결할 수 있는 시위였는데도, 광주에 이미 와 있던 7공수여단을 18일 오후 4시경 시내 한복판에 나가게 했을 뿐만 아니라 서울에 있던 11공수여단까지 광주로 보냈다. 나중에는 3공수여단도 보냈다.

그런 식으로 공수 부대를 보낸 자들이 광주 학살이 일어나고 광주에서 만행이 자행되는 데 최고 책임자, 지휘자들이라고 볼 수 있다. 그들이 누구인가에 대해서는 지금까지 쭉 얘기를 해온 바가 있지 않나.

광주항쟁 왜곡한 계엄사령관 담화문, 보안사에서 만들고 발표 방식도 정해줬다

ⓒ오월의봄
프레시안 : 전두환을 중심으로 한 신군부 이너 서클은 그 과정에서 구체적으로 어떤 역할을 했나.

서중석 : 1980년 5월 18일만 하더라도 11공수여단을 서울에서 광주로 보낼 때 정호용 특전사령관이 최웅 11공수여단장한테 뭐라고 얘기했나. "광주에 7(공수)여단 2개 대대가 계엄군으로 나가 있는데 소요 진압 작전을 못하고 매우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다", "광주에서 우리 애들이 밀리고 있고 유언비어까지 나돌고 있으니 조심하라", 이렇게 사실과 너무나도 다른 얘기를 하지 않았나. 그리고 육군 참모차장이자 계엄사 부사령관이던 황영시는 이날 '전교사' 사령관한테 강력히 시위 진압을 하라고 지시했다.

황영시는 5월 21일에는 육군기갑학교장 이구호 준장에게 전차를 동원해 진압하라는 지시를 지휘 체계까지 무시하면서 내렸다. 박충훈 국무총리 서리가 광주에 내려온 5월 22일에는 정호용이 광주에 내려와서 일정한 역할을 하고 갔다. 이러한 사항들은 전두환·신군부의 이너 서클이 광주항쟁 진압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걸 얘기해준다.

거기서 전두환의 역할이 뭐냐, 이게 중요한데 여러 가지로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는 행위가 있다. 하나씩 살펴보면, 자위권이라는 게 1980년 5월 21일 발동되지 않나. 그러한 자위권 발동을 국방부 장관에게 건의하는 형식의 회의가 그날 오전 10시 50분에 국방부에서 열리는데 전두환 보안사령관도 참석했다. 보안사에서 내부 문건으로 만든 <제5공화국 전사>, 이걸 <5공 전사>라고도 부르는데, 이 책을 보면 그 회의 장소에 이희성 계엄사령관, 주영복 국방부 장관, 전두환 합수부장 겸 보안사령관, 노태우 수경사령관, 차규헌 육사 교장, 정호용 특전사령관, 유병현 합참의장 등이 있었다고 나온다. 거기서 누가 가장 중요한 역할을 했겠나. 지금까지 나온 여러 자료를 쭉 보면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그렇게 해서 그날 오후 1시 이후 광주 시민들을 정조준해 발포가 이뤄지게 된다. 계엄 당국은 집단 발포를 시작한 이후인 그날 오후 2시 55분 국방부 장관실에서 열린 회의에서 '군은 자위권을 갖고 있다'고 천명하기로 결정한다. 이 회의에는 주영복 국방부 장관, 계엄사령관 이희성을 비롯한 각 군 참모총장, 유병현 합참의장 등이 참석했는데 전두환은 무슨 바쁜 일이 있었는지 참석을 못하게 됐다. 그래서 이쪽에서 '사령관이 못 오면 처장이라도 참석하라'고 해서 보안사에서는 정도영 보안처장이 참석했다.

그러고 나서 이날 저녁 7시 30분 이희성 계엄사령관 이름으로 자위권을 천명하는 담화문이 발표됐다. '광주에서 이런 엄청난 사태가 확산된 건 다른 지역 불순 인물 및 고정 간첩들 때문이다'라고 하면서 광주항쟁을 왜곡해 특정한 방향으로 몰아간 담화문인데, 이희성 계엄사령관 이름으로 나간 이 담화문을 건네준 사람이 누구냐 하면 정도영 보안처장이다. 명의만 이희성 이름으로 나간 것이고 실제로는 보안사에서 만들었다는 얘기다.

이것에 대해 이희성은 검찰에서 "(1980년 5월) 21일 오후 4시경 국방부 장관실에서 보안처장 정도영이 자위권 천명 담화문 문안을 건네주면서 '담화문 발표를 텔레비전과 라디오 등 언론을 동원해 생중계하도록 하자'고 했다", 이렇게 진술했다. 문안을 만들어준 건 물론이고 구체적인 발표 방법까지 보안사에서 제시한 것이다.

그렇게 정도영이 건네준 담화문을 주영복 등이 참여한 자리에서 검토하는데, 유병현 합참의장이 여기서 또 얘기를 했다. 5·17쿠데타 그날 국방부 장관, 3군 참모총장, 합참의장 간담회에서 유병현이 "국회 해산은 위헌인 만큼 그 문제를 논의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하면서 제동을 건 것으로 돼 있다고 전에 얘기했는데, 5월 21일 이때도 '일부 표현이 잘못됐다'고 하면서 다른 의견을 제시한 것이다. 담화문 초안의 내용과 표현은 굉장히 강경했던 것으로 보이는데, 유병현이 그런 의견을 내면서 표현이 일부 수정된다. (유병현은 당시 보안사에서 작성한 초안이 "광주 지역만을 대상으로 한 강경한 내용"이어서 자신이 수정을 제안했다고 1996년 7월 15일 법정에서 진술했다. '편집자') 그래서인지 사실 이 담화문에서 자위권 부분은 대체로 담담하게 표현돼 있다. 하여튼 그렇게 고친 문안대로 언론 매체가 생중계하는 가운데 담화문을 발표하게 된다.

그런데 <5공 전사>를 읽어보면 노태우가 그다음 날(5월 22일) 상관인 이희성 계엄사령관한테 항의한 게 나온다. 자위권 보유를 천명하는 담화문을 왜 본래 문안대로 발표하지 않았느냐는 것이었다. 아무리 수경사령관이라고는 하지만 소장에 불과한 노태우가 대장인 합참의장과 계엄사령관이 고친 걸 문제 삼은 것이다. 누가 실세인지, 어느 쪽에서 이걸 주도했는지를 충분히 알 수 있게 하는 대목이다. 그러고저러고 간에 이 담화문을 만들어서 계엄사령관한테 준 쪽이 어디냐를 가지고도 충분히 알 수 있지 않나. 이런 걸 보더라도 전두환이 이 담화문 작성에서 결정적인 위치에 있지 않았느냐고 파악된다.

정조준해 시민 학살한 다음 날 격려금 전달 지시한 전두환

▲ 전두환 합동수사본부장(1979년 11월 6일). ⓒ연합뉴스
프레시안 :
훗날 대통령 재임 기간에 전두환과 그 일가는 드러난 것만 수천억 원에 이르는 어마어마한 규모의 검은돈을 챙긴다. 그런데도 전두환은 반성과 참회는 고사하고 추징금조차 제대로 납부하지 않으면서 수중에 29만 원밖에 없다는 궤변을 늘어놓는다. 물론 그 후에도 전두환 본인과 그 일가가 호의호식하며 떵떵거리고 사는 모습은 언론 보도 등을 통해 수많은 시민들이 오늘날까지도 접해야 하는 쓰린 현실이다. 29만 원밖에 없다는 전두환의 궤변과 마찬가지로, 광주 학살과 무관하다는 전두환의 강변을 납득할 국민이 얼마나 될까 싶다.

서중석 : 5월 21일 오후 1시 직후부터 공수 부대 등이 집단 발포해서 그날 하루에만 시민 34명이 숨지지 않았나. 지난번에 이야기한 것처럼 태극기를 들고 구호를 외치다가 공수 부대의 총격에 쓰러지고, 다시 태극기를 들고 구호를 외치다가 또 총에 맞아 쓰러지는 일이 대여섯 번이나 거듭됐다.

그런데 그다음 날인 22일 전두환은 11공수여단장인 최웅한테 격려금 100만 원을 전달하도록 했다. (광주항쟁 당시 중앙정보부 전남지부 책임자였던 정석환은 전두환이 자신에게 전화해 "최(웅) 장군의 사기가 극도로 저하돼 있을 터이니 '용기를 잃지 말고 분발하라'고 전해달라"는 말과 함께 격려금 전달을 지시했다고 훗날 검찰에서 진술했다. '편집자') 이에 앞서 이미 5월 19일에도 전두환이 전남 출신 재경 유력 인사 8명을 광주에 보냈는데 이들한테 각각 50만 원씩, 모두 400만 원의 돈 봉투를 챙겨주면서 계엄군에게 우호적인 여론을 조성하라고 직접 나선 걸 볼 수 있다.

이런 것들은 어떻게 보면 앞에서 얘기한 다른 것들에 비하면 중요한 게 아니라고 할 수도 있지만, 하나하나 다 신경을 썼다는 점에 문제가 있다. 다시 말해 이너 서클의 우두머리가 공수 부대를 중심으로 한 계엄군이 광주에서 하고 있는 일에 하나하나 신경 쓰고 있지 않았느냐, 이 말이다. 그런 점에서 여러 가지를 추찰할 수 있다. 그와 더불어 전두환이 광주 만행에서 굉장히 중요한 역할을 했을 것이라는 아주 중요한 증거로는 5월 25일 최규하 대통령이 광주에 갔다 온 것, 그게 전두환 작품이라는 것을 들 수 있다.

프레시안 : 항쟁을 무력으로 진압하기 이틀 전에 이뤄진 대통령의 광주 방문에서 전두환은 어떤 역할을 했나.

서중석 : <5공 전사>를 보면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1980년 5월 24일 주영복 국방부 장관 및 각 군 참모총장과 '광주사태 대책 회의'를 했다고 나온다. 가장 중요한 군 최고 지휘부가 모여서 '광주사태 대책 회의'를 열었던 건데 이런 데서도 항상 누가 주도했겠나.

이날 합수부 안전처장 겸 보안사 보안처장인 정도영은 대책 회의 후 오찬 중이던 전두환 합수부장을 만나서 "최규하 대통령의 광주 선무 활동이 시급히 필요하다"고 얘기했다. 상무 충정 작전이라는 걸 대대적으로 펴서 광주항쟁을 무력으로 진압하려고 하는데 그에 앞서 '우리가 이렇게 노력했다'는 걸 대통령을 보내서 한 번 보여줄 필요가 있다, 이런 뜻이었다. 그러자 전두환이 "그것 참 좋은 생각이다"라고 희색을 띠면서 들어가서 식사를 빨리 마쳤다고 <5공 전사>에 나와 있다.

그 후 전두환은 주영복 국방부 장관한테 대통령의 광주 선무 활동이 필요하다고 건의했다. 건의하는 형식이었지만, 이런 식으로 사실상 시키는 경우가 많이 있지 않았나. 주영복은 바로 청와대에 가서 이걸 건의했다. 말이 건의지 실제로는 뭐였겠나. 그리고 정도영이 전두환에게 이야기한 다음 날인 5월 25일 최 대통령은 광주에 내려갔다.

이렇게 대통령을 광주에 보내서 선무 방송을 하게까지 했다. 이처럼 대통령을 조종할 수 있었던 사람을 빼놓고 광주에서 일어난 유혈 사태 전체에서 가장 책임 있는 위치에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를 말할 수 있겠나. 그런 것들을 볼 때 전두환의 위치는 확연하게 드러난다고 볼 수 있다.

(광주 학살과 전두환의 책임에서 주요하게 거론된 것 중 하나가 전두환 자필 메모 문제다. 광주항쟁 기간 중 윤흥정을 대신해 전남북 계엄분소장이자 '전교사' 사령관으로 임명된 소준열은 '전교사' 사령관 취임 직후 '소 선배, 공수 부대 사기를 너무 죽이지 마십시오'라는 내용의 전두환 자필 서명이 들어 있는 메모를 정호용 특전사령관이 자신에게 전달했다고 1996년 7월 11일 법정에서 인정했다. 당시 '전교사' 교육훈련부장이던 임헌표도 1980년 5월 23일 정호용과 함께 헬기를 타고 '전교사'로 오던 중 정호용이 '무리가 좀 따르더라도 시위를 조기에 진압해주십시오'라는 취지의 전두환 친필 서명이 담긴 메모를 읽는 것을 목격했다고 1996년 7월 15일 법정에서 밝혔다. 임헌표는 "전두환이라는 서명이 확연해 전 씨의 자필 서명임을 알 수 있었다"고 말했다. 전두환은 "모함"이라며 이를 부인했다. '편집자')

역사학자 서중석의 진단

☞ "박근혜는 유신의 허깨비가 결코 아니었다"

☞ "박정희 신드롬, 박근혜가 지울 수도 있다"

☞ "<조선> 말대로면, 이명박 · 박근혜 정부는 빨갱이"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이백일곱 번째 편도 조만간 발행됩니다.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1·2권 서평 바로 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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